오래된 흔적

45.남기고 간 생명

by 재학

소녀는 자꾸 헛디뎌지는 걸음을 제촉하며 계곡을 건넜다. 해는 벌써졌다. 익숙한 길이지만 머리에 인 보퉁이의 무게가 걸음을 더디게 했다. 벗어지는 짚신을 자루 속에 쑤셔 넣고 맨발로 오르기 시작했다. 어서 가야 한다. 소녀가 올 때까지 소년은 동굴 속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돌아서는 소녀를 바라보던 그 눈빛 그 자세 그대로 소녀를 기다릴 것이다. 오늘따라 길이 가파르다.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며 난간을 건넜다. 마당 바위에 다다르면 소녀의 발자국 소리를 소년이 웃음으로 답할 것이다. 오늘 밤도 소년은 밤이 새도록 소녀의 발을 안고 잠들 것이다.

소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가슴에 앉겨 별무리를 헤던 바위에도 기척이 없다. 동굴을 텅 비어있었다. 나뭇잎이 어지러히 흩어져 있다. 소년이 없다.

소년이 사라진 동굴은 낯설었다. 마당바위에서 소녀는 소년을 기다렸다. 이틀 사흘...

소년은 돌아올 것이다. 소년이 돌아왔을 때 소녀가 없으면 얼마나 슬플까? 소녀는 돌아올 소년을 위해 계곡으로 들어가는 산허리에 자리를 잡았다. 작은 움막을 지었다. 소녀만큼 낮은 지붕을 얹었다. 소년이 남기고 간 생명을 키우며 소년을 기다렸다. 그리고 먼 훗날 소녀의 딸이 낳은 딸이 소년을 데리고 왔다. 소년만큼 찬란한 금발의 머리를 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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