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먼스 이어 Damons Year 「Mondegr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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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서 감상하세요
https://youtu.be/32fleqir-AY?si=ripCVWELLiOQ9ww9
Mondegreen이라는 단어는 원래 ‘노랫말을 잘못 알아듣는 착각’을 뜻한다. 그러나 이 단어의 배경에는 더 깊은 은유가 숨어 있다.
노래는 본래 흐름과 생동을 지닌 것이지만, 잘못 들리는 순간 본래의 진실은 사라지고 변질된 언어만이 남는다.
데이먼스 이어의 〈Mondegreen〉은 바로 이 지점을 사랑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그대는 노래 말고 사랑이나 되어주지
왜 나를 떠나서 아픈 문장이 돼버렸나”
사랑은 곁에 있을 때 노래처럼 흐른다. 함께 바라보는 풍경, 나누는 시간, 작은 몸짓 하나가 다 음악의 결을 띤다.
그러나 떠남과 함께 사랑은 더 이상 노래로 남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붙잡으려는 문장만 남는다.
언어는 사랑을 보존하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훼손한다.
사랑은 여전히 언어 속에 있지만, 그 언어는 이미 상실의 그림자일 뿐이다.
C.S. 루이스가 『헤아려 본 슬픔』에서 고백했듯, 언어는 고통을 치유하지 못한다. 오히려 언어는 부재를 확인시킴으로써 고통을 더욱 각인시킨다. 글을 쓰는 순간, 그는 아내의 부재를 다시 한 번 증명한다.
마치 〈Mondegreen〉의 화자가 사랑을 노래 대신 ‘아픈 문장’으로만 맞이하는 것처럼.
그러나 동시에, 루이스는 기록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언어는 부재를 확인시키지만, 그것 없이는 부재를 감당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언어는 고통의 증인이자, 마지막 위로의 흔적이 된다.
“처음부터 나의 마음은 그대와 다른 적 없어
아무런 말조차도 필요 없다는 걸 몰라”
이 구절은 철학적이다. 사랑은 본래 언어 이전의 것이다. 마음이 다르지 않았다면 말은 필요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은 언제나 늦다. 사랑이 이미 부재해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그 부재를 대신하는 기호이자, 실재의 잔향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지만 동시에 존재를 가두는 틀이기도 하다.
사랑을 언어로 집어넣는 순간, 사랑은 흐르는 현재가 아니라 머무는 기록이 된다.
하지만 여기서 역설이 생긴다.
우리는 사랑을 기록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언어가 사랑을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하지만, 언어를 통해서만 사랑의 흔적을 간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언어는 상실의 그림자일 뿐 아니라, 잃어버린 것을 간신히 붙드는 최후의 그물망이기도 하다.
“넌 누가 되었어도 아낌없이 사랑하고
나는 멍하니 서서 후회하지도 못하지”
이 구절은 사랑을 주는 자와 사랑을 붙잡지 못하는 자의 간극을 보여준다.
화자는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보면, 이는 단순한 무력감이 아니라 존재와 언어의 간극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우리는 사랑을 온전히 붙잡을 수 없고, 결국 언어를 통해서만 그것을 되새긴다.
하지만 언어는 언제나 한 발 늦고, 한 겹 옅다.
〈Mondegreen〉은 이 아이러니를 관조한다. 노래로 흐르던 사랑이 왜 언어로만 남는가, 실재하던 것이 왜 기호로 전락하는가.
답은 단순하다.
사랑은 곁에 있을 때 노래지만, 떠나면 언어가 되기 때문이다.
노래는 현재이고, 언어는 과거이다.
이 노래와 루이스의 기록은 같은 깨달음에 닿는다. 사랑은 말해질 수 있을 때 이미 부재이다.
언어로 남는 사랑은 언제나 상실의 그림자다. 그러나 동시에, 언어는 그 상실을 간직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진정한 과제는 언어로 붙잡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아직 노래일 때 그 순간을 살아내는 일이다.
사랑은 노래로 흐르고, 떠난 후에야 문장이 된다. 그 문장은 언제나 아프지만, 어쩌면 그 아픔 속에서 우리는 사랑의 마지막 음을 들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은 여전히 내 안에서 새로운 노래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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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오늘 가사의 의미에 취해 두 노래를 올렸어요.
아래 3호선 버터플라이의 「나비의 꿈」도 즐감하세요!
https://brunch.co.kr/@hachi2682/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