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 대신 페이지를

홈존(homezone) 「책을 넘기는 듯한 마음으로」

by 하치

https://youtu.be/EiwITbgjDFM?si=qT_X7uWvq58arYzb


https://youtu.be/JmUeLS_RBvA?si=ExltmVrYUp2uCr5N


이 가사는 사랑을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라, 계속 수정되고 넘어가야 하는 책으로 상정한다. 그래서 이 노래의 핵심 질문은 단순하다.

“우린 왜 끝맺으려 하고, 왜 그 마침표 앞에서 망설이는가?”



이 가사는 왜 ‘문장’과 ‘마침표’로 시작하는가


가사는 초반부터 언어의 구조를 끌어온다.


기억이 나지도 않을 만큼
많고 많은 이 단어들 뒤로
마침표를 올리고 나면
우린 어디로 가야 할까요


여기서 '단어들'은 관계 안에서 쌓인 사건과 감정, 오해와 기억이다


사랑은 늘 말로 설명하려 들고, 우리는 관계를 설명 가능한 문장으로 정리하려 한다.

그런데 문제는 마침표다.


마침표는 정리이자 판단이다.

“이 관계는 추억이었고, 행복했다”라는 문장은 과거형이며, 동시에 봉인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이 결정적이다.


추억이었고 행복했다는
마지막 문장을 담아요
넘겨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그대는 왜 망설일까요


이 망설임은 미련이 아니라 존재적 저항이다.

사랑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버리는 것에 대한 본능적 거부.

아직 설명되지 않은 감정이 남아 있다는 감각 때문이다.




“Happily ever after”를 의심하는 이유


Happily ever and after
동화 같은 결말 아닐까 봐
불안하다면 Babe


여기서 이 노래는 아주 솔직해진다.

우리가 원하는 결말은 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이지만, 이 문장은 현실의 사랑에서는 가장 위험한 문장이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갈등이 사라진 상태

더 이상 수정되지 않는 상태

변화가 멈춘 상태

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그 완결성을 위로가 아닌 불안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불안하다면 내 얘길 들어달라”고 말한다.

여기서 화자는 하나의 관점을 제안한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방향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하나의 문장으로 환원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왜 “방황하며 길을 잃을” 수밖에 없는가


앞으로도 늘 우리는
수많은 문장 속에서 함께
방황하며 길을 잃고 말 거야


이 대목은 이 가사의 윤리 선언에 가깝다.

이 노래는 길을 잃지 않는 사랑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를 말한다.


사랑은 항상

오독되고

띄어쓰기가 어긋나고

의미가 달라지고

같은 문장을 다시 읽게 된다.




그래서 등장하는 이미지가 탁월하다.


띄어쓰기 가득한 미로


띄어쓰기는 말의 호흡이자 간극이다.

사랑에서 이 간극은 곧 오해, 침묵, 기다림, 혼자 있는 시간이다.

이 노래는 그 간극을 없애려 하지 않는다.

미로임을 인정한 채 함께 걷자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책을 넘기는 마음’이어야 하는가


이 가사의 정수는 반복되는 이 문장에 있다.


마치 책을 넘기는 듯한 마음으로


책을 넘긴다는 것은


앞 페이지를 부정하지 않고

그렇다고 거기에 머물지도 않으며

다음 장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그러나 계속 읽겠다는 선택이다.


책을 넘기는 행위에는 세 가지 태도가 공존한다.


1. 수용 – 이미 쓰인 이야기를 지운다고 착각하지 않는다


2. 용기 – 다음 장이 불안할 수 있음을 안다


3. 신뢰 – 이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 노래는 “해결하자”거나 “약속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넘기자고 말한다.




음악적으로 이 노래가 선택한 태도


이 가사가 음악적으로 선택한 출발점은 과장되지 않은 리듬과 반복이다.

“One two three”라는 카운트는 박자를 세는 동시에 시간을 건너는 행위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순간 넘긴
종이 두께처럼
우린 더 더 더
단단해져 있을 거야


여기서 사랑은 폭발하지 않는다.

축적된다.

페이지가 쌓이듯, 종이가 두꺼워지듯.


이 음악의 행보는 드라마틱한 클라이맥스를 거부한다.

대신 지속을 택한다.

반복되는 후렴은 끝을 향한 고조가 아니라,

같은 마음을 다시 확인하는 페이지 넘김의 리듬에 가깝다.




이 노래가 말하는 사랑의 윤리


그래서 이 노래가 끝내 말하는 사랑은

완성되는 문장이 아니다.


한 번 쓰이고 고쳐지지 않는 문장도 아니고,

마침표 하나로 안전하게 봉인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사랑은 계속 수정되는 원고이고,

자주 길을 잃는 독해이며,

때로는 같은 페이지를 여러 번 되짚게 되는 느린 읽기다.


우리는 앞으로도

수많은 문장 속에서

의미를 오독하고

띄어쓰기에 걸려 멈추고

어디쯤 읽고 있는지 잊어버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덮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아직 넘기지 않은 페이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약속하지 않는다.

행복한 결말도, 명확한 방향도.


다만 조심스럽게 권한다.


불안해하지 말고,

서두르지 말고,

정리하려 들지 말고.


마치 책을 넘기듯,

아직 모르는 다음 문장을 향해

조용히 한 장을 넘겨보자고.


끝이 보이지 않아도,

이야기 속에 머무르는 선택 자체가

이미 충분한 사랑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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