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니어그램 5번 유형의 동화
안녕. 난 백만 번 산 고양이야.
내 비결은 백만 번이나 죽고 백만 번이나 살았던 거야.
미안. 다시 인사할게. 사실은 난...
안녕. 난 태어나고 싶지 않아 태어나지 않은 아이이기도 해.
난 별과 별 사이 골목을 누비는 길고양이였어.
누구의 고양이도 아니어서 나는 나를 참 좋아했지.
언제부터인지 까마득히 내가 나를 의식해 정신을 차린 채(?) 둘러보니 어느새 우주 한가운데 홀로 있더라구.
별들은 깜깜한 밤에 출근을 하고 태양은 뜨거운 빛살치레로 간섭해.
시차가 없는 곳인 데 여기도 여전히 바쁘단 말이야.
별이 어깨를 부딪쳐 지나가고 태양이 뜨거운 눈초리를 쏘아도 난 아프지 않아.
왜냐고?
난 누구의 고양이도, 아이도 아니고,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상관이 없거든
전에는 내 곁에 많은 친구들이 있었어.
멋진 바구니에 담아 전쟁터에 데리고 다니다 화살에 죽은 나를 성의 정원에 정성껏 묻은 임금님,
배에서 떨어져 푹 젖은 걸레로 죽은 나를 그물로 건져 올린 뱃사공,
마술쇼 중 정말 톱으로 쓱싹쓱싹 반으로 잘린 나를 들며 연기는 내려놓고 엉엉 운 마술사,
개에 물려 죽은 나를 훔친 다이아몬드와 함께 껴안고 울면서 도망간 도둑,
포대기 끈에 목이 졸려 죽어 머리가 덜렁거리는 나를 안고 우는 여자아이,
매일 나를 안고 창문을 바라보기만 하다 그녀보다 더 쪼글쪼글히 죽은 나를 놓아주지 않고 껴안고 운 할머니.
난 임금님을 아주 싫어했어. 싸움이 재능이 된 한심한 작자야.
난 도둑을 아주 싫어했어. 꼭 개가 있는 집을 골라 개와 고양이의 앙숙을 품게 했어.
난 할머니를 아주 싫어했어. 난 담요가 아니야.
난 여자아이를 아주 싫어했어. 난 인형이 아니야.
난 바다를 싫어했어. 아무도 헤엄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잖아.
난 서커스 따위를 싫어했어. 연기는 피곤하다고.
죽은 나를 안고 너희들은 처음으로 얼굴을 잊을 채 엉엉 울었어.
고양이는 물을 싫어해.
이봐. 죽은 건 나라고.
짐승 같은 격렬한 감정은 네 거야.
난 울음의 곡조에 한 음도 보태지 않았다니까.
끼어들지 않을래.
친구들 곁에서 죽어버렸지만 난 진짜 상관없었어.
이래 봬도 난 백만 번이나 죽어봤다고.
새삼스럽게 이런 게 다 뭐야!
어차피 다시 태어나. 죽는 게 뭐라고! 하악!
지구도 별반 다를 바 없어.
여전히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딘가를 늦지 않으려고 바삐 움직이고. 아, 여기는 시차가 있는 곳이지.
소방차는 어디론가 불난 데로 달려가고 경찰 아저씨는 제 안의 도둑심보는 못 본 체 도둑을 쫓아가.
모두가 제각기 고소한 빵을 가지려 몸을 움직이지만 난 먹고 싶지 않아.
어차피 먹어도 또 배고플 테고 내가 원하는 맛도 아니거든.
그래서 난 아무런 상관없는 이 모든 것들을 홀로 물끄러미 바라만 본다.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상관이 없어. 사는 게 뭐라고! 물끄럼.
어, 저기 개가 고양이를 문다. 저 개는 나를 물었던 시절의 버릇이 여전하네. 쯧쯧.
어, 저 고양이는 대체 뭐지? 물려도 놀라지도 않고 부드러운 혀로 핥고 있어.
상처를 입지 않는 걸까? 상처를 받지 않는 걸까?
"이봐. 너 아직 한 번도 죽어보지 못했지?"
"그래"
"난 백만 번이나 죽어봤어!"
"그러니"
"난 서커스단에 있었던 적도 있다고"
"그러니"
"이봐. 난 백만 번이나...."
"......."
"네 혀는 반창고인가 봐. 이봐. 공중돌기를 해볼게. 다치면 혹시 네 혀로 닦아주지 않을래?"
"으응"
"네 곁에 있어도 괜찮겠니?"
"으응"
나는 그날부터 하얀 고양이 곁에 늘 붙어 있었어. 게다가 귀여운 새끼 고양이까지 많이 낳았어. 세상에. 맙소사. 백만 번이나 살다 보니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다.
나 자신보다 하얀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가 더 좋아져 버렸어.
상처가 날 때마다 난 하얀 고양이에게 신나게 달려가서 안겼어.
"와~ 반창고. 반창고"
그럴 때마다 하얀 고양이는 깨끗이 씻겨 치유해 줬어. 그러면 상처는 흉터가 아니라 아름다운 털로 자랐어.
그녀 옆에서 포근히 잠을 청하는 건 행복한 일이었지.
" 이제 나 잘래. 태어난다는 건. 참 피곤한 것 같아"
푹 잠들어 꿈도 꾸지 않았어.
난 하얀 고양이와 영원히 오래오래 살고 싶었어....
어느 날 하얀 고양이는 곁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멈췄어.
이봐. 자는 거야? 죽은 거야?
이봐. 너도 나처럼 태어날 거야? 죽을 거야?
너도 나처럼.... 태어난 거야. 죽은 거야.
나는 또. 혼자. 다.
혼..... 자?
나는 누구의 고양이도 아이도 아닌 나여서 좋았잖아.
새삼스럽게 이런 게 다 뭐야?
고양이는 물을 싫어해.
나는 처음으로 울었어. 밤이 되고 아침이 되고, 목젖이 찢어져라 상처로 벌어지도록.
또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백만 번이나 울었어.
고양이는 물을 싫어해.
나는 물을 싫어해.
아 나는............?
격렬한 감정의 밀물에 흠칫 발뺌하려는 것을 울음이 바다로 꼴깍 삼켜 버렸다.
아침이 되고 또 밤이 되고, 눈물이 썰물로 빠져나가고, 어느 날 울음을 그쳤어. 조용히 움직임도 멈췄어.
그러고는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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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이봐. 이게 끝이냐고?
다시 되살아나지 않은 걸 어떻게 아냐고?
난 진짜로 태어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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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에니어그램 전형적인 5번 유형으로 추정되는 사노 요코의 그림책 「100만 번 산 고양이」와 「세상에 태어난 아이」 두 책은 저에게 각각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권으로 읽혔습니다.
고양이와 아이는 분리된 개체가 아니라 바로 저를 투사한 것 같아 읽는 내내 찬바람에 노출된 듯 얼얼히 아팠습니다.
한 권씩 소개하고 싶었지만 5번의 인색한 털이 곤두선 걸까요~
개인 소회 및 줄거리를 삐죽삐죽 갈기뭉치 털갈이(?)로 손질한 합본버전으로 소개합니다.
쓰다 보니, 낯스레 지렁지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