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의상실 재봉틀 옆에서 일일 공부를 한 장씩 풀고 나면 아이템플 이모가 가게로 와 색연필로 동그라미, 세모, 네모 점수를 매겼다. 사자머리를 한 예쁜 이모들이 가봉된 옷을 입어보러 오는 날이면 나도 예쁜 옷 옆에 서서 시침핀 하나씩 뽑는 일을 도왔다. 멋진 모델 얼굴이 표지에 있는 최신 모직 샘플이 붙은 책이 한 달에 몇 권 왔었는데 예쁜 천은 내가 먼저 뜯어서 종이에 그림 그리고 치마로 바지로 만들어 오려 붙여 못쓰게 했던 적도 많다.
엄마의 고객은 투피스 정장을 좋아하시는 분들이셨는데 아이템플 두 장 다 쓰면 골목골목을 지나 아버지 계시는 꽃가게를 들렸다가 집으로 갔다. 여섯 살 많은 언니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코를 킁킁거리면서 골목투어를 했다. 엄마가 사 주신 두 부 한 모 들고.
글자도 모르면서 종이(엄마 재단 종이)에 그림을 그려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접어 우체통에 자주 넣었다. 우체국 아저씨랑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옷을 짓든 집을 짓든 글을 짓든
물질은 그늘에서 보는지 빛에서 보는지에 따라 달라져 보인다.
그늘 속의 다양한 빛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원초에 현대를 그리고 철학을 어떻게 넣을 것인가를 유동룡(이타미 준) 건축가는 고민하고 고민한다.
손으로 만지고 재료를 확인하듯
나는 나의 시는 무엇을 만지고 무엇을 확인해야 할까?
이타미 준은 풍토에 대하여 철저한 기본심을 가진 건축가인데 이 풍경에 맞설 수 있는 것이 덩어리, 돌이라 생각했다.
물질에 대한 애정이 인간적인 따뜻함이었다.
소재를 잘 다루는 방법을 알아야
인간적인 따뜻함을 전달할 수 있다. 이것은 시간의 힘이 함께 한다.
네모든 동그라미든 일절, 아무 말도 하지 말라며 어머니는 아들에게 집 건축을 맡기면서 가족에게 당부했다(이타미 준 31세 여백의 집)
외할머니는 의상실,
엄마는 시인,
누나는 패션 디자이너.
우리 집 형편은 이러하나 건축학을 전공하는 아들에게 늘 해 줄 수 있는 말이 부족해, 나도 이타미 준을 찾아보고 안도 타다오도 배우고,
원초에 현대에 철학을 어떻게 플러스하는 건지 나는 내 식으로, 너는 네 방식으로 공부하는 밤.
제주도 방주교회, 수ㆍ풍ㆍ석 미술관, 포도호텔, 두 손 미술관
도쿄 여백의 집, 먹의 집, 열린 벽의 집, 석채의 교회 가보고 싶은 곳이 이렇게 많고 흥미롭다.
빛과 그림자로 샤워하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한국 판소리의 연속과 불연속 그리고 차단을 의식하여 만들었다는 포도호텔의 밤에는 어떤 꿈을 꾸게 될까?
몸이 약했기 때문에 바다의 마을 시미즈에서 살았다는 유동룡. 아버지 자전거 뒤에 타고 바다를 보며 자랐다. 물, 돌, 바람 건축이 많은데 제주랑 닮은 이 건축가는 자신은 빛과 어둠, 희망과 불안의 중간에 있다고 했다. 절대 고독의 표출이라 해석되는 먹의 집(도쿄)을 보면 마음속 큰 어둠이 보이며, 마치 드로잉 안에 들어 있는 느낌 같다는 표현을 했다. 바닷속 장어의 침실처럼.
재봉틀과 엄마 아빠의 글과 사진을 보물처럼 안고 다섯 식구는 하동군 진교면 하평마을로 왔다. 코르덴 천 염색공장이 가까이 있었고 월동 준비하듯 코르덴을 끊어 엄마에게 재킷을 맞추는 이가 하나 둘 늘었다. 미나 양장점으로 유리에 글을 박고, 쇼윈도는 없으나 손님에게 차를 내어 줄 홀은 있었다.
부산에서도 아버지는 오토바이나 자전거 뒤에 나를 태우고 송도 바다를 자주 보여주셨다. 엄마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디자인해주신 옷을 쫙 빼입고 바위 위에 한 다리만 올려도 부산 갈매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멋있었고 가슴 벅찼다. 잘 안 풀리면 바다에 대고 깊은 한 숨 뱉었다가 또 좋아졌다. 잠수를 워낙 잘하셔서 성게 해삼을 먹었던 추억이 송도 갈 때마다 생각난다.
하평으로 이사 와서도 우리는 재첩도 잡고 문저리도 잡고 아버지 자전거 뒤에 타고 날아다녔다.
어디까지 왔니?
-평당까지 왔지
어디까지 왔니?
-굴다리까지 왔지
어디까지 왔니?
-민다리 건너고 있지
어디까지 왔니?
-다 왔다 집이다
컴컴해져 무서우면 등 뒤에서 눈 꼭 감고 아버지랑 <어디까지 왔니>를 주거니 받거니 부르면서 집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