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둡 Feb 22. 2024

길 위에서 | 2

새로 입은 공기



한낮 고요함이 거실 한가운데 따습게 내려앉아 식탁에 앉아 볕을 구경하기 딱 좋다. 어제 그렇게 나간 남편은 새벽 한 시경 고얀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와 쓰러지듯 잠들었다. 새벽녘까지 휴대폰을 몰래 열어 볼까 하는 유혹을 뿌리치며 뒤척이다 결국 보지 않았다.

큰 병을 얻어 숨기려 드는 것 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한 달 전 건강검진으로 콜레스테롤이 다소 높다 것 외엔 이상 없음을 알고 있어 쉽게 납득되지 않는 가정이었다. 남편 회사에 픽업 갔다가 우연히 동료 여자를 마주친 적이 있다.


        리본이 달린 연베이지 실크 블라우스와 까만색 세미 A라인 스커트

        뒷목쯤에 부스스 자연스럽게 틀은 머리

        볼드한 하프링 귀걸이

        낮은 펌프스를 신고도 쭉 뻗은 다리를 가진 여자


바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아주 조금 했을 때 그 여자를 떠올렸다. 빈폴 면셔츠에 까만색 슬랙스를 무미하고 건조하게 소화하는 나와 전혀 다른 여자. 그렇다고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는 생각되진 않는다. 다만 상정하는 것만으로 묘한 무기력과 졸음이 쏟아져 내렸다. 퀸사이즈 침대의  안락함이 불편해 햇볕이 쏟아지는 소파 머리를 베개 삼아 모로 누웠다. 일어나니 해가 꽤 기울어 다섯 시 즈음 되어 있었다. 꿈을 꾸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남편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몇 달 전 명예퇴직 대상자가 되었고 그때 인사부서 직원과 상담하던 순간의 내가 나온다. 습관적으로 텀블러를 들고 들어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니 부끄러웠다. 커피나 마시고도, 아니고 커피씩이나 마셔야도, 아닌 그런 일인데 말이다.


서둘러 쌀을 불렸다.양배추도 채 썰어 계란물을 입히고 청양고추를 더해 준다. 무엇보다 액젓을 정밀하게 한 스푼을 추가해 준다. 귀찮아 뺄까 했던 냉동 새우도 찬물에 녹인다.

생각해 보면 제대로 묻지 않았다.샤워를 어디서, 왜 했냐는 '샤워했어?'라는 응축된 질문을 형식적으로 응수한 남편에게 다시금 재차 물었어야 했다

'왜?'

'운동하고 왔어'라고 대답한다면

'갑자기 운동을 왜 시작하게 됐어? 연초도 아닌데' 이렇게 가볍게 이어 갈 수 있었다.문자는 봤고 숨기려고 하는 것 같아 불쾌하다 정도만 했어야 했다.일련의 변화들이 모두 의심된다는 뉘앙스로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 모든 것 전에 실직으로 의기소침한 나에게 남편은 최소한 작은 위로를 건넸어야 했다.공공연하게 눈치 보며 저자세가 되어 가는 와이프에게 ‘당당해'라고 훈수 한마디 했어야 했다.양배추전이 익어 가고 있는 프라이팬을 싱크볼 안에 던져 버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불도 켜지 않고 식탁에 엎드려 있는 나를 퇴근한 남편이 발견하고 놀란 듯 물었다.한참을 바라보고 주저주저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자기야? 왜 그래?"


느리고 퍽 다정한 말투로 달래듯 어깨를 쓸는다.그때 통곡 같은 울음이 둑 무너지듯 터지고  말았다.




작가의 이전글 길 위에서 |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