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째 대학교 화석이 되었습니다.’ 인터넷 기사가 어둡게 눈에 띈다. 졸업을 연장하며 9년 동안 학교에 묶여 있는 취업준비생에 관한 내용이다. 우리 집에는 한 학기 졸업을 미루고 상반기 동안 40장이 넘는 이력서를 제출했음에도 합격증을 받지 못한 취준생이 있다.
가끔 딸의 방에서는 긴 한숨소리가 난다. 짧은 탄식이 있기도 하고 외마디 비명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서류나 1차 합격 뒤에 오는 비명, 며칠 뒤의 탄식. 그리고, 이른 아침의 긴 한숨. 그 소리를 듣는 문밖의 나는 날씨와 관계없이 흐렸다 개었다 한다.
딸도 나도 집에 잘 있지 않았다. 둘 다 나름 힘든 시기이고 서로에게 그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그랬다. 탈출구를 찾기 위해 나 홀로 여행을 시도하기로 했다.
“너도 어딘가 다녀와” 혼자 있을 딸이 맘에 쓰였다.
“언제 면접 보러 오라 할지 몰라. 대기해야 돼” 관심 없는 척하더니 ”엄마가 경비 빌려주면 나도 오로라 보러 가고 싶어 “ 하며 진심을 털어놓는다.
딸이 대학교 입학할 때 한 달에 십 만원씩 붓던 정기 적금이 있다, 취직 기념 여행을 하려고 했다. 그 통장을 깨는 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샴페인을 터뜨릴 수 없었다. 하지만 목적지에 가기 전에 탈진할 거 같다.
서로 혼자 가면 조심하라고 잔소리하다 결국은 함께 스페인행 비행기를 탔다.
스페인 여행 세 번째 도시 론다에 도착했다. 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 론다. 헤밍웨이가 피카소와 함께 투우를 즐겨봤다는 곳. 반나절이면 다 본다고 여행 목록에서 제외되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호기심 가득한 곳이다. 정보도 얻고 한식도 먹을 겸 한인민박으로 갔다.
김치찌개와 김 스팸이 차려진 아침 식탁에 게스트가 모였다. 여자 다섯 명 사이에 젊은 청년이 한 명 끼어 있다. 우리나라 취준생의 로망 S전자에 합격하고 대학원에서 준 장학금으로 스페인 여행을 왔다고 한다. 나도 모르게 딸 표정을 살폈다. 그날 청년 일정이 우리와 같아서 동행하기로 했다.
투우장을 지나 누에보 다리에 도착했다. 두 명의 청춘은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신비로운 풍경에 탄성을 질러댔지만 나는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며 가만히 서있었다. 한참 그렇게 바라만 봤다. “이런 풍경도 있구나. 이런 곳에도 저렇게 집이 예쁘게 서 있을 수 있구나” 혼자 중얼거렸다.
풍경은 단순하다. 옹기종기 붙어 있는 하얀 집들이다. 그런데 그 집들 아래로는 수 십 미터 협곡이 있다. 지진으로 땅이 갈라진 듯 땅 속을 훤히 보여주고 있다. 낭떠러지라고 하기에는 동네가 너무 평화롭다.
전망대 앞에서 두 청춘은 또 서로 사진을 찍어 준다. 나는 뒤에서 그들을 찍었다. 누에보 다리를 건너 헤밍웨이 산책길에 있는 로컬풍 레스토랑에서 타파스와 빠에야를 먹었다. 청년은 조용하고 겸손하다. 온실에서 자란 난초 같은 느낌이다.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로 점심식사를 즐겁게 만들었다.
민박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 들러 와인을 샀다. 스페인에서는 와인을 먹어야 한다는 게 우리 위시 리스트다. 저녁 먹을 때는 셋이 더 친해져 있었다. 깻잎통조림 장조림 김 등등. 그는 여행 마지막 날처럼 케리어 속 비상식량을 모두 꺼내 왔다. 다시 모인 게스트들은 여행 에피소드를 풀어놓았고 달짝지근한 와인을 모두 비웠다.
다음날은 게스트가 대부분 흩어진다. 우리는 세비아 그라나다를 거쳐 바르셀로나에서 출국할 계획이다.
청년은 딸과 나의 여행 마지막 날 바르셀로나로 간다고 한다. 같이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엄마는 왜 그래?” 딸은 마땅치 않은 듯 말했다. “여행이라는 게 그런 맛도 있어야 하지 않니?"라고 말했지만 다른 속셈도 있었다.
우리는 바르셀로나로 갔다. 2월 말의 날씨는 꽤 쌀쌀했다. 가우디 투어는 기억에 오래 남을 거 같다. 마지막 여행지는 딸과 떨어져 각자 가고 싶은 곳을 갔다.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차로 몇 시간 떨어진 까딸루냐 지방 작은 동네들을 돌았다. 그곳 성당에서 초에 불을 붙이며 기도했다. 다른 모든 성당에서도 같은 기도를 했다.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딸과 합쳤다. 딸은 남자 친구가 좋아하는 축구 선수 피규어를 산다고 돌아다녔다.
마지막 날 저녁에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청년과 셋이 다시 모였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역시나 좋은 환경에서 잘 자란 듯했다. S전자에서의 삶에 대한 기대를 차분히 이야기한다. 나는 또 딸의 눈치를 살폈다. 딸은 그 틈에도 남자 친구와 카톡을 하고 있다.
“너는 저 친구 어때?” 청년이 화장실 간 사이에 딸에게 물었다.
“저 오빠랑 있으니까 우리 **오빠가 더 보고 싶어”
“왜에??”
“몰라.”
내 작전은 실패 같다.
청년은 딸과 야경을 보고 안전하게 숙소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살며시 허락을 구했다.
나는 허락하지 않았다. 구세대 발상이고 꼰대라 해도 그건 내게는 모험이었다. 내일은 출국이라 일찍 자야 한다는 핑계로 헤어져 각자 숙소로 갔다.
-여행은 약상자에 없는 약이다.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예방약이자 치료제이며 회복제이다. (다니엘 드레이크) -
스페인이 치료제이며 예방약이 되길 바랬다. 13일 동안 붙어 있던 우리는 다시 각자의 생활을 했다. 한국이 스페인보다 더 따뜻했다. 봄을 지나 여름의 초입이다.
“스페인 그 친구 하고는 연락하니?” 문득 궁금했다.
“그 건 스페인이지. 여태 연락을 해?” 딸은 너무 당연하게 말한다. 참 낭만도 없다.
“요즘은 **오빠 잘 안 만나니? 신입 사원이라 바쁘대?”
“헤어졌어.”
“뭐어? 왜애?”
“스페인에서 선물 고르고 있을 때 다른 년 하고 썸 타고 있었더라구.”
주말마다 꼼짝 안 하고 방구석만 지키던 이유였다. 스페인에서 야경 보러 가라고 허락할 걸 그랬나 하고 후회했다.
그즈음 딸은 3차 면접을 보고 왔다. 3차 면접이면 합격이나 다름없다고 좋아했는데 결과는 절망이었다. 한숨소리는 더 깊어졌다. 여행이 다시 치료제가 될 거 같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들의 약상자에는 가끔 다른 비타민도 있다.
딸과 함께 눈썹 문신을 하기 위해 강남으로 갔다. 딸이 먼저 끝냈다. 한결 깔끔하고 이쁘다. 실력이 좋은 미용사다. 미용사가 누워있는 내게 소독약을 바르는데 딸이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