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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ebangchon Feb 13. 2020

월계수냐 올리브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부모님의 첫 유럽여행 in 크로아티아

"월계수야. 월계수."

"아니야, 잎이 월계수랑은 조금 다른데."

"에이, 월계수지. 그럼 이게 뭐야."


여행 둘째 날, 자그레브 돌라체 시장에서 이모와 엄마는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첫째 날은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와 시작하기도 전에 쌓여버린 피곤에, 시차와 에어비앤비의 새로운 공간, 통하지 않는 언어 등에 적응하거나 혼란하여 쓰러져 잠들기에 바빴다.


하지만 둘째 날 "잘 잤다."하고 일어난 부모님과 이모는 시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활기를 되찾았다. 부모님, 이모와 함께하는 크로아티아 자유여행 이틀째 아침. 돌라체 시장에서 수다스러워진 세 분을 보면서 나는 우리 모두가 "여행 체질"이라고 확신했다.


"아이 참, 아니라니까. 월계수랑은 조금 다른데."


세 분이서 뭔가 해결이 안 되는지 다른 가게에서 마그넷을 보고 있는 나의 팔을 이모가 당겼다.

"이게 뭐야, 다정아?"




돌라체 시장 입구에는 꽃시장이 있었는데 자그레브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자그레브 사람들은 꽃을 즐겨 사는듯했다. 남자들이 꽃다발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도 쉽게 눈에 띄었다. 그 많은 꽃과 화분 속에서 부모님과 이모가 꽂힌 것은 가판대 앞에 가득 쌓여 있는 '무슨 잎'이었는데 2초에 한 다발씩 사람들 속에 들려 팔려갔다. 모두가 이걸 사러 온 것처럼 활발하게 거래되었다.


자그레브 돌라체 시장 초입의 꽃시장
월계수 잎이다 아니다로 말을 틔게 해 준 올리브 잎 @돌라체시장 in 자그레브, 크로아티아


이건 분명 월계수 잎이라는 엄마와 뭔지는 모르겠지만 월계수 잎은 아니라는 이모. 그 사이에서 뒷짐 지고 월계수와 월계수 아닌 어떤 것 사이 어중간한 위치에서 '이다, 아니다'를 할 수 없는 아빠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옆에는 정답을 내려줄 것으로 기대되는 내가 있었다.


하지만 난들, 그 잎이 무언지 알 턱이 없다.

다행히도 그 잎이 가득 높인 가판대에는 읽을 수 없는 크로아티아 어로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구글 번역을 이용해 그 잎의 이름을 찾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그 순간 내 존재의 이유였다. 구글 번역 앱을 열어 내 존재를 증명해야 했다. 월계수인지 아닌지가 그렇게 중요한진 모르겠으나 적어도, 억지로 편안한 듯 뒷짐 지고 있지만 이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중재자이기보다 벌칙자에 가까워 보이는인 아빠를 구제해야 했으니까.


"올리브! 올리브야 올리브."

나, 아니. 구글이 알려준 정답은 '올리브'였다.


"아, 그래. 여기는 올리브가 많이 나나보다. 월계수랑 많이 닮았는데 올리브라네."

엄마가 당당하게 외치던 월계수는 아니었지만 올리브라는 정답을 찾은 그들은 수차례 "올리브네, 올리브"를 반복하며 여전히 그 올리브 바구니와 올리브 잎을 사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돌라체 시장 이후 그들은 조금 조용(?)했다. 그래서 나는 가끔씩 여행이 재미있는지, 만족스러운지 여러 번 물어 확인받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부모님, 이모와 함께하는 첫 해외여행이자 유럽여행이었기에 그들의 만족도는 내게 중요했다.


그러던 그들은 대한민국인다운 뒷심을 보여주는 것 마냥 여정의 마지막 도시인 두브로브니크에서 다시 활기를 띠었다. 두브로브니크 성벽 뒤 언덕에 있는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성벽으로 가기 위해 내려오던 길목에서였다.


두브로브로니크 성벽 가는 골목 옆으로 많던 오렌지귤(?) 나무 @두브로브로니크, 크로아티아


"오렌지네 오렌지. 아닌가 귤인데?"

또 시작됐다. 


오렌지냐 귤이냐를 두고, 누가 경상도 사람들 아니랄까 봐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갑자기 잦아들며 의견 일치를 본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무화과나무였다.


의견 일치를 본 무화과나무 @두브로브니크, 크로아티아


"와, 무화과네. 무화과."

"무화과가 진짜 많이 열렸다."

"그래 이거 무화과 맞네."


무화과 열매가 잔뜩 열렸다. @두브로브니크, 크로아티아


무화과나무를 보고 무화과라고 의견 일치를 보고 지나가면서도 "무화과네, 맞네 맞아."를 수십 번 반복했다. 지나가던 크로아티아 사람이 들어도 '저 열매를 한국어로 무화과라고 하는구나.' 알 수 있을 만큼.




이럴 거면 식물원을 갈 걸 그랬다.


60대 중턱을 넘은 부모님과 60을 코앞에 둔 이모는 식물들에 열광했다.


맛있는 메뉴가 가득한 레스토랑에서도, 커피를 마시러 들어간 카페에서도, 우리를 기다리다 환하게 맞아주는 호스트가 있는 에어비앤비 숙소에서도 너무나 조용했던 그들은 식물(월계수 같은 올리브), 열매(누가 봐도 무화과인 무화과) 앞에서 가장 시끄러웠다.


"나무, 열매 보는 게 이렇게 좋았으면 진작 말을 하지. 식물원을 갈 걸 그랬네!"

이번 여행을 계획한 나는 이제야 그들의 취향을 알게 된 것 같았다.


그저 웃으며 앞서가는 엄마 아빠를 따라가던 나는 '식물원'을 일정에 넣지 않은 게 큰 실수 같아 구시렁 하며 따라갔는데, 그 뒤에 오던 이모가 내 실수를 만회해줬다.


"아는 게 이거밖에 없어 그런다."


띠용. 충격이었다. 9박 10일의 여행에서 8일쯤이 돼서야 알게 된 사실.


먼 유럽 대륙에 처음 와, 낯선 그들의 나라에서 모든 것이 낯설었을 것이다. 아무리 친절한 호스트를 만나도 언어 문제 때문에 나서서 그 친절을 받고 고마움을 나눌 수 없었고, 아무리 맛있는 메뉴가 있어도 영어뿐인 메뉴판은 읽을 수조차 없었다.


여행경비를 몽땅 가지고 총무 역할을 하고 있는 내가 맘먹고,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하고 마음껏 주문하라고 할 때에도 메뉴판을 테이블에 두고 다들 먼 데 보기 바빴다. '메뉴판 여는 사람 술래'라도 되는 게임 같았다.

주문을 독촉하는 내게 왜 '아무거나'를 외쳐서 '효도 여행'으로 마음먹고 온 나를 실망시켰는지, 무화과나무가 많은 골목을 지나가며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동시에 너무 미안했다. 이제야 새로운 대륙, 새로운 나라에 그들을 데려온 것이. 내가 조금 더 자세하고 친절하게 메뉴 하나하나, 호스트 소개 하나하나 먼저 해주지 못했음이. 영어를 몰라도 뒤로 물러설 필요 없다고, 아는 것이 없어도 새로운 것을 보고 놀라는 게 여행의 핵심이라고 먼저 말하지 못한 것이.


부모님과 이모는 자라면서 익히 봐왔던 식물들, 혹은 봐왔던 식물들과 생김새가 비슷한 것들을 봤을 때 마음이 놓였던 거다. 또한 그게 무어라고 목소리 낼 수 있었던 것. 낯선 곳에서 발견한 익숙한 것. 월계수 잎이 월계수 잎이 아니고 올리브면 어떠하랴. 저게 귤이면 어떻고 오렌지면 어떠리. 이건 묻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무화과인데 무화과가 가장 효자인 순간.


내려가는 길에 했던 열매 이름 맞히기는 올라올 때도 계속된다. 확실한 건 무화과. @두브로브니크, 크로아티아




해외여행을 처음 할 때 누구나 설레면서도 동시에 주눅이 든다. 보고 듣고 읽는 것 모든 게 인식되지 않고 그저 내 앞에 있기 때문이다. 길을 몰라 의식하지 않고 가던 대로 나아갈 수가 없고, 어디에서 무엇을 먹을지 모른다. 모르면 물어보면 되는데 어떻게 물어볼지도 몰라서 속으로 겁을 먹었던 순간들.


그런 순간들이 반복되면 방법을 찾게 되고, 그다지 방법이 없어도 문제가 없음을 알게 된다. 그건 해외여행이 거듭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거듭 반복되지 못한 부모님의 해외여행은 낯선 곳에서의 새로움이 그들의 목소리를 작게 만들고, 의견 없는 아무거나 괜찮은 취향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을지 모르겠다.


이번 여행은 '효도 관광'이라고 마음먹고 함께 온 딸인 나도 그런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나보다 두 배의 세월을 사는 동안 나보다 새로운 곳을 더 가보지 못한 부모님에게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매년 꼭 한 번은 해외여행을 함께 하겠노라 다짐하게 됐다.


새로운 여행지를 발견하고 톡을 보내보면, "시간 되면 가지 뭐." "너네 먼저 갔다 와." 하신다.


하지만 뒤늦게 깨달은 나는 시간을 만들어 함께 가는 여행을 하고 싶다.

그래서 다음엔 어디를 가지? 재미있는 고민이 시작된다.


여기는 무화과가 참 많네, 그쟈? 엄마와 이모 @두브로브니크, 크로아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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