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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Aug 19. 2023

사진

곧 사라질 거라는 뚜렷한 사실에 대해 내가 대응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라

밤새 뒤척였다. 낮동안 한 사람의 임종 소식을 듣고도 정신없어서 제대로 쓰지 못했던 마음이 잠들기 전 몰아치는 듯 온몸과 맘이 시큰거렸다.


전 직장에 갓 입사해서 완전히 새로운 일을 배워나가던 시절, 연대활동을 하던 동료 단체의 팀장이던 그분을 처음 만났다. 경력으로나 실력으로나 베테랑이라 할만했지만, 시민사회 선배라는 이들에게 흔했던 은근한 권위주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기본도 안되어있는 질문에도 무안을 주지도, 자신의 지식과 영향력을 과시하지도 않고 필요한 답변을 주는 그의 차분하고 친절한 말투에서 동료로 존중받는 느낌을 받았다. 잘은 모르지만 참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가 출산과 육아의 시간을 보내느라 휴직하는 동안 나도 이 바닥 짬이 어느 정도 붙었다. 몇 년 만에 다시 대면하는 나를 보며 그는 ‘많이 컸다’ 따위의 말 대신 ‘반갑다’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이 정말 반갑고 고마웠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단체로 복귀한 그는 이전과 다름없이 목소리를 내고 연대를 이끌었지만 그 어떤 공격성 없이도 그의 발언과 행동은 힘이 있었다. 참 곱고 강한 분이라 생각했다. 할 수 있다면 좀 더 가까이 지내며 더 많은 걸 배우고 싶었다. 


한두 해 전쯤 내가 팀을 옮기고 새 업무에 적응했을 때쯤 암 투병을 시작하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업무상 만날 일은 없어졌지만 수많은 동료들과의 접점이 있어서 소식 듣기는 어렵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걱정과 기도, 사랑을 받으며 밝게 이겨내고 계신 모습을 보고 들으며 먼발치에서 나도 몇 번쯤 회복과 행복을 빌었다. 불과 몇 달 전, 함께 아는 지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재발하셔서 걱정이다'라는 대화를 나누었는데 부고를 듣고 나서야 보니 이미 8월 초부터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임종을 준비하셨던 모양이다. 남편분이 매일 저녁 9시마다 부탁하셨다는 기도에 단 한 번도 동참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어쩔 수 없었지'라는 말만으로는 내 마음이 괜찮아지지 않았다. 


사진치유 작가이신 남편분이 마지막 투병의 시간을 보내며 본인 SNS에 올리신 살뜰한 글과 사진을 찬찬히 훑었다. 작은 희망을 잡고 끝까지 매달리던 절절함의 단계를 지난 그 글들은 오히려 평온한 사랑고백으로 보이기까지 했지만, 영원한 이별을 목전에 둔 그 비애를 세상의 어떤 언어로도, 어떤 행동으로도 표현할 수 없음을 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겨진 사진과, 수많은 지인들이 애도하고 추억하며 올린 글이 타임라인을 가득 채웠다. 그중 아마도 임종 직후의 모습이었을 사진을 보며, 애쓰지 않아도 우리 엄마의 임종 직후, 그리고 믿을 수 없어하면서도 그 순간 엄마의 사진을 찍었던 내가 떠올랐다. 


사망 선고가 이루어진 시점에 나는 엄마 곁에 있었으면 했던, 그리고 있어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했었나 보다. 언니가 돌잡이 조카를 맡기고 달려오고 있었고, 엄마의 형제들과 외할머니는 바다 건너 외국에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이후로 점점 식어서 생기를 잃을 엄마의 모습을 영원히 보존해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엉엉 울면서도 잠을 자듯 누운 엄마의 정면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이송 준비를 한다며 의료진들이 엄마를 둘러싸는 중에도 나는 엄마를 부르며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리고 우리 아빠는 입관 때도 발인 때도 사람들에게 영상 촬영을 부탁했다. 누군가는 꼭 찍어야 하냐고 말했던 것 같다. 그게 슬픔보다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으로 보이기도 했나 보다. 아빠는 사흘 만에 한국으로 날아올 수 없는 이모들을 위한 거라고 했고 그 말도 어느 정도 사실이었지만 나는 나와 아빠의 그 행동이 사실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고, 다음은 없을 엄마의 모습을 단 일분일초라도 더 이 땅에 붙잡아두고 싶은, 사랑과 슬픔의 표현이었다고 믿는다. 엄마가 투병하는 동안에도 어떻게든 사진과 영상을 더 많이 찍고자 했다. 흰머리에 두건을 쓴 게 뭐 이쁘다고 찍냐고 엄마는 자주 카메라를 피했지만 나는 지금도 더 많은 사진을 찍어두지 못한 게 못내 아쉽고 후회스럽다. 관찰예능처럼 온 집안에 카메라를 달아두고 영상기록물로 남겨두었으면 좋았겠다 상상한 적도 있다. 지금 있는 사진과 영상들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수시로 생각한다. 엄마의 젊고, 예쁘고, 기뻐하는 모습뿐만이 아니라 늙어가는 모습, 약해지는 모습, 마지막 숨을 놓는 그 모습까지도 더 많이 다시 보고 싶다고. 함께하는 실체가 곧 사라질 거라는 뚜렷한 사실에 대해 내가 대응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라서, 울고불고 현실을 부정할 시간을 아껴서 더 많이 남겨두고 싶은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유난스럽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설명이나 설득은 시도하지 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이 땅에서의 영원한 이별을 경험한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슬픔의 깊이니까. 


아무리 봐도 나에게는 낯선 그의 병상 사진을 계속해서 보았다. 마음이 아팠지만 한편으로 얼마나 멋지고, 또 얼마나 사랑받은 사람이었는지 피드에 가득 남은 증거들 때문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가족들과 부부의 내밀한 시간을 이렇게 사진으로 남겨, 원근각지의 모두에게 이별을 충분히 슬퍼할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했다. 


장례미사 때는 생전 가장 좋아하셨다는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라는 곡을 불러드렸다고 한다. 우리 엄마가 같은 곡을 참 좋아해서 성악을 하는 교회 오빠에게 불러달라고 부탁했던 일도 떠올랐다. 주인공이 따로 있는데 자꾸 우리 엄마 생각을 하는 게 민망하고 죄송스럽지만, 팀장님의 어린 딸도 살면서 겪는 다른 사람의 임종 앞에서 줄곧 나처럼 엄마를 떠올릴 것이라 생각해 본다. 물론 슬픈 때뿐만은 아니다. 기쁨의 때에도, 많은 다른 중요한 인생의 순간에도, 함께했던 일이나 함께 했으면 하는 일 앞에서 어김없이 엄마를 떠올릴 것이다. 그럴 때마다 엄마를 찍어두었던 많은 사진들과 엄마가 받았던 많은 사랑의 증거들, 엄마가 자기의 일을 할 때 얼마나 멋지고 힘 있는 사람이었는지 보여주는 자료들이 딸의 마음을 온통 밝고 환하게 채워서 슬픔을 덮을 것이라 믿는다.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팀장님이라고 밖에 불러본 적 없지만, 처음으로 다정함을 담아 불러본다. 지영 님,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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