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하지 않은 일들은 모두 생각보다 재미있다
셀야란즈포스를 떠나 30분 정도 더 달리면 또 다른 오늘의 경유지, 스코가포스Skógafoss에 도착한다. 아이슬란드어에서는 o와 a 사이에 있는 g가 묵음이어서, 원어 그대로 발음하면 스코아포스에 가깝다고 하지만 넘어가고, 스코가는 번역기에 돌려보니 '숲'이라는 뜻이었지만, 근처에 숲이 있어서가 아니라 폭포가 있는 마을 이름이 스코가Skógar 라고 한다. 어차피 눈 쌓인 거밖에 못 봤으면서 숲이 없는 건 어떻게 아냐고? 아이슬란드는 가장 따뜻한 달 기온이 영상 10도 안팎인 한대기후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수목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 아니고, 푸릇푸릇한 여름 풍경을 만드는 것도 기본적으로 이끼지만, (세계지리 시간에 말만 들어본 툰드라 기후!) 뭐... 그게 이 나라에서 말하는 숲이라고 한다면 한낱 여행객인 제가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직접 뜻을 찾아보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스코가포스의 뜻이 무지개 폭포라고 알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 폭포에서 무지개를 볼 수 있다고 했던 예능 <꽃보다 청춘>의 영향인 듯싶다. 생각해 보니 그 프로그램에서도 우리처럼 겨울에 아이슬란드를 갔는데, 웃통 벗고 노천온천 들어가고 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 날씨가 이례적으로 춥긴 한가 보다. 지금 이 날씨에 탈의를 한다면 몇 분 내 동사할 게 분명하므로...
https://guidetoiceland.is/ko/best-of-iceland/top-10-most-beautiful-waterfalls-in-iceland
폭포가 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이 스코가포스는 무려 현지인 가이드가 꼽은 아이슬란드 최고의 폭포 20곳 중에 1위로 이름을 올린 곳이며, 가장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폭포라고 한다. 링로드와 가깝고, 셀야란즈포스, 레이니스파라와 한방에 해결할 수 있다는 접근성의 이유도 물론 있겠지만, 높이 60미터, 폭 2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폭포가 만들어내는 물보라가 거의 항상 한 개 이상의 무지개를 만들어낸다는 점도 큰 이유가 아닐까. 물론 우리의 여행은 아주 특별했기 때문에, 스코가포스 가면 다들 본다는, 운 좋으면 두 개도 본다는 무지개 역시 우리는 스킵했다. 무지개가 우리를 스킵한 것일 수도 있다... 는 그냥 하는 말이고, 추워도 너무 추운지라 수량이 충분치 못할 수도 있을 거라는 점은 어느 정도 예상한바였다.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언제나 남이 찍은 사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전혀 아쉽지는 않았다. 무지개야 뭐, 빛의 굴절로 생기는 현상에 불과한 것...ㅠㅠ
스코가포스에는 바이킹 시대에 마법사가 숨겨둔 보물에 관한 전설도 있다. 17세기 경 탐사대가 폭포수 뒤편에서 전설 속 보물상자를 찾았는데, 끌어내던 중 부서져 현재 고리만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상자는 동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또 다른 믿기 힘든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야기가 많다는 건 그만큼 애정을 받는다는 뜻일 터, 아이슬란드 사람이 사랑하는 스코가포스를 직접 만나러 차에서 내려 가까이 걸어갔다.
아까 본 셀야란즈포스와 비슷해 보이면서도 큰 차이점이 있다면 폭포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놓여있다는 점이다. 옛날옛적에는 해안선과 면해 있는 절벽이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꼭대기에 올라가 아주 열심히 바라보면 저 멀리 수평선을 찾을 수 있다. 지도에서 직선거리로 찍어봐도 8km는 족히 넘는 거리에 떨어져 있으니 수만 년에 걸쳐 후퇴했을 텐데, 아이슬란드 지형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옛날'이 얼마나 옛날인지, 인간이 세운 문명의 흔적 없이 얼마나 오랫동안 자기 자리를 지켜왔을지 그 시간의 깊이를 생각해 보게 된다.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폭포라 한들 실망스러울 리가 없는 것은, 그 자체로 태어나 처음 보는 진귀한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한겨울 눈꽃 산행의 아름다움도 경험한 바 있고, 겨울에 얼어붙은 폭포도 본 적 없는 건 아니었지만, 수목이 없는 한대기후에서 태곳적 지형 그대로 빙벽이 되어 선 산과 절벽을 마주하는 것은 사계절 뚜렷한 나라에서 보는 겨울과 사뭇 다른 풍경이다. 한동안 몰입하며 봤던 미드 <왕좌의 게임>에서 야인과 백귀들이 사는 장벽 너머의 얼음 땅 같기도 하고, (실제 촬영지이기도 하다.) 사방으로 둘러봐도 눈길 닿는 곳 내에서는 봄의 작은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이 땅이 지금부터 이대로 영원히 얼어붙어서, 지구의 빙하시대가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되는 상상도 하게 된다. 집에 있어도 '만약에'로 끝도 없이 혼자 묻고 답하는 MBTI 직관형(N)에게는 이보다 좋은 상상력과 창의성의 원천도 또 없다. 신나서 계속 폭포 앞에서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혼자 발을 헛디뎌 어딘가로 푹 꺼지는 건 아닐까, 폭포 꼭대기에서 뭔가 떨어지는 건 아닐까 등등 상상공장이 쉼 없이 돌아갔다. 한기를 넘어 살기 어린 추위가 뼈마디를 시리게 하는 통에 괜히 걱정이 많아졌는지도 모르겠다. 감각형(S)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만한 걱정이었지만.
십 분이나 지났을까, 어제도 밖에서 컨디션이 계속 좋지 않았던 살별은 차에서 좀 쉬고 싶었는지 사진 몇 장을 같이 찍고 슬쩍 자취를 감췄다. 나도 사진 찍느라 손가락 마디가 굽혀지지 않을 정도로 몸이 얼었지만, 그래도 폭포 앞에서 구경만 하고 떠나기에는 좀 아쉬웠다. 손가락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여행 오기 전 생일을 맞았던 나는 미리 찜해두었던 손가락장갑을 친구들에게 선물로 받았다. 여행 내내 열손가락 온전한 상태로 지키면서 사진도 최대한 많이 찍을 수 있었던 건, 양털로 충분히 보온도 되면서 손가락 쓰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뚜껑도 여닫을 수 있는 이 장갑 덕분이다. 내 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영상들을 볼 때마다 장갑을 선물해 준 친구들에게 반복해서 감사하게 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때의 그 얼어터진 손가락의 감이 느껴지니까. 폭포 앞에서 장갑 뚜껑을 젖히고 덜덜 떨며 사진 찍는 나와 그 옆에 있던 노라에게, 우리 일행의 공식 사진작가인 반석이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만 더 앞으로 나가면 더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며. 당연히 그렇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안 간 곳으로 한 발 더 내딛는 건 왠지 모르게 너무 두려운 일이었다. 눈 아래 있는 게 땅인지 물인지도 모르겠고, 눈이 얼마나 쌓여있는지도 전혀 감이 오지 않으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 뒤통수만 찍고 가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 반석의 말만 믿고 열 발자국 정도 앞으로 갔다. 그리고, 내가 바라본 스코가포스의 압도적인 풍경을 가장 잘 담아낸 사진을 얻었다. 열 발자국 뒤에는 사람들이 와글와글했지만, 마치 폭포 앞에 나 혼자 있는 것 같은, 어떻게 보면 크게 보이고, 어떻게 보면 한없이 작게도 보이는, 대자연 앞에 홀로 선 탐험가 같은 내 뒷모습. 여행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들 중 하나다.
반석이 바로 이때라며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눈오리 만드는 집게를 꺼냈다. 한두해 전부터 유행했지만 돈 주고 사기엔 좀 쓸데없어 보여서 그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는데, 눈오리를 처음 만드는 장소가 아이슬란드라니! 그게 뭐 별 건가 싶어도, 늘 이렇게 뭔가 웃음을 주고, 같이 있으면 재미난 궁리를 하는 사람이라서 나는 반석을 참 좋아한다. 폭포 앞을 벗어나 정상까지 올라가 보기로 결정한 우리는 헨젤과 그레텔처럼 눈오리를 하나둘씩 놓아두며 가자며 정성을 다해 오리를 만들었다. 뒤늦게 반석과 나의 작업을 발견한 노라가 뭐 하는 거냐며 물었다. 뭐 하긴, 오리를 만드는 거지. 두 NP형의 철저한 흥미위주의 작업이 SJ형인 노라에게는 재미도 의미도 없어 보였 나보다. 어이가 없긴 해도 우리를 귀여워하는 게 틀림없는 표정을 남기고 노라는 먼저 총총 올라갔다. 우리도 정상에서 다시 작업을 이어가기로 로 하고 곧 뒤따라 속도를 냈다.
정상까지 가는 길은 꽤나 구불구불 긴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문제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계단이 완전히 파묻힌 거였다. 완만하긴 해도 절벽 위로 올라가는 길인데, 계단이 그냥 경사로로 바뀌어 자칫 경로를 이탈하면 엉뚱한 길로 미끄러져 떨어질까 공포스러웠다. 흡사 스키장 슬로프를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랄까. 초반에는 그래도 약간 계단이 보여서 나도 발을 디딜 때마다 뒷사람 올라오기 편하게 발로 쓱쓱 밀어 좌우에 있는 눈을 치웠는데, 올라갈수록 가팔라지고 사람 지나간 흔적이 적어지면서 한 발 겨우 놓을 자리만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계단 난간이었을 로프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해서는 한 발씩 위로 옮겨 짚으며 무거운 몸을 끌어당겼다. 등줄기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이 되자 ’이게 맞나' 싶어 다시 내려갈까 하고 아래를 보기도 했는데, 이미 절반 이상 올라온 상태라 아래는 더 까마득해 보였다. 내려가는 것도 답이 없다 싶어 그냥 끝까지 올라나 가보기로 했다. 어느새 우리 셋 모두 말도 없어지고, 반석도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를 가방에 넣어 맸다. 앞뒤로 모르는 사람들과 불안에서 비롯한 연대감을 느끼며 얼마나 올랐을까, 드디어 정상에 다다랐다. 그제야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니 멀리 주차장에 차들이 깨알처럼 보였다. 나무 계단이 철제 난간으로 이어지며 폭포의 낙수가 시작되는 지점을 둘러볼 수 있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흰 물보라가 시야를 채울 것 같았으나, 이미 사방이 충분히 흰 까닭에 여느 설산의 정상 같기도 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무지개는 공기 중 물방울에 빛이 반사되며 만들어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오늘 무지개가 안 보이는 이유도 너무 추워서 물방울이 무지개를 만들 수 있는 어떤 조건을 충족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전망대 위에서 좀 여유를 찾자 웃으며 사진도 찍고, 다시 오리도 몇 마리 만들어 놓았다. 별 의미는 없다. 그냥 여기까지 힘들게 올라온 사람들이 눈오리를 보고 귀여워서 웃음이 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내려갈 시간... 올라올 때처럼 주머니 단단히 잠그고 양손으로 줄 잡고 엉금엉금 오리걸음하고 있었는데, 내가 잡은 줄 반대편에서 나처럼 초긴장 상태로 기어 내려가던 한 관광객이 눈이 마주치자 씩 웃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기는 더 못하겠다며, 슬라이딩을 하겠다며. 뒤따라 기어 오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자 하나둘씩 미끄럼을 타기 시작했다. 갑자기 분위기 눈썰매장... 어제 입었다가 짐가방에 도로 개어넣었던 방수바지 생각이 났지만, 오늘 이런 일을 만날 줄 누가 알았나. 하필 오늘 입은 바지는 물을 그대로 흡수하는 면소재였지만, 그래도 엉덩이가 네모낳게 될 만큼 겹겹이 껴입은 레깅스 덕에 쿠션은 충분해 다행이었다. 스르륵 미끄러져보니 꽤나 안정성이 느껴진다. 그동안 나는 뭘 무서워했던가. 저 아래 점들이 사람 형체로 보일 때까지 신나게 소리를 지르며 눈썰매를 탔다. 무지개폭포고 뭐고 계획한 대로 되는 거 진짜 하나도 없는데, 계획하지 않은 일들은 모두 생각보다 재미있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앞으로는 계획대로 되지 않으리라고 계획하면 어떨까.
다녀와서 한참 후에 어느 가이드북에서 물보라가 얼어붙기 쉬운 겨울에는 이 산책로가 폐쇄된다는 내용을 읽었다. 우리가 갔을 때가 겨울 중에서도 핵 겨울이었으니 이제야 짐작해 보건대 아마 그 산책로는 이미 폐쇄된 상태일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계단 초입에 통제선 같은 걸 둘러놨는데 그마저 눈에 파묻혔던 게 아니었을까? 모를 일이다. 나도, 우리 중 누구도 계획한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