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남을 특별하고 소중한 기억을 만드는 일
오늘의 일정은 가는 길에 두 개의 폭포를 들른 후 검은모래해변 레이니스파라까지 갔다가 그 근처인 비크에서 숙박하는 계획이었다. 총 이동거리 180km, 이동시간은 세 시간 정도니까 거리도 시간도 대략 서울시내에서 대전쯤 가는 것과 비슷하다. 아이슬란드 겨울 여행에는 짧은 일조시간뿐 아니라 악천후와 도로 컨디션까지 고려해야 하므로 하루 이동거리를 최소한으로 잡으라는 조언에 충실했다고 확신했었다. 아침의 그 눈보라를 만나기 전까지는. 긴장과 공포의 심장 쫄깃하게 빠져나오고 나니, 아이슬란드 초행자 네 명인 우리가 무슨 근거로 뭔가를 확신할 수 있었나 싶다. 대자연 앞에서 자신하는 인간만큼 어리석은 자가 없음을 깨닫고, 한참 늦었지만 그제야 차가 멈추고 설 때마다 우리의 안전한 여행을 위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한겨울 아이슬란드의 흰 벌판을 차로 달려다가 보면 아주 귀엽게 생긴 말들을 드문드문 볼 수 있다. 경마장이나 사극에서 볼 수 있는 말처럼 미끈한 체형이 아니라서 처음에는 당나귀 종류인가 싶었는데 강추위를 이기고 험한 지형에서도 잘 살 수 있는 아이슬란딕 토종마라고 한다. 무려 아이슬란드 관광청 블로그에 토종마의 역사와 특성을 설명하는 글이 있는데, 초기 노르웨이 정착민들 배에 함께 타고 있던 말들이 이 땅에 뿌리내린 뒤로 10세기 경 알싱기 의회에서 말의 국외 반입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아이슬란드 말의 국외 반출은 가능하지만 외국 품종 말의 반입은 불가능하다고 하니 천년 이상 보호된 아이슬란드의 토종마가 강추위에 움츠러든 우리를 비웃듯 유유자적하게 바깥을 돌아다니는 게 조금 이해가 된다.
한참 흰 벌판을 달리며 아무리 봐도 지겨워지지 않는 설산의 모습에 감탄하다가, 어제 봤던 장엄한 자연을 자연스럽게 회고했다. 손가락이 없어지기 직전이라 어쩔 줄 모른 채 마구 찍었던 많은 사진은 따뜻한 실내에 들어온 저녁에서야 여유를 갖고 조금씩 넘겨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추위에 떠느라 충분히 즐기지 못했지만, 그래도 남는 건 사진이니까 오늘도 열심히 찍어보자는 결의를 다지며, 우리 그룹의 패셔니스타 노라가 어제의 사진에 대한 총평을 한마디로 남겼다.
"혜빈, 사진이 너무 시꺼멓게 나오던데, 다른 옷 없어?"
흠, 영하 18도까지 방한이 가능하다는 캐나다구스의 기능성을 드디어 검증할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의기양양한 나머지 간과했던 포인트였다. 놀러 가면 꼭 밝은 색깔 옷을 매일 갈아입으며 사진 찍으라던 우리 엄마의 말과 비슷하다 싶었는데, 역시나 노라도 엄마한테 비슷한 잔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그래, 엄마 말 들어서 나쁠 거 없지. 오늘은 내가 설원의 패셔니스타다! 겹겹이 껴입었던 레이어 중 최대한 흰 눈에서 튀어 보이는 색깔을 바깥으로 내어 입었다. 흡사 스키복과 같은 색감. 내가 나를 볼 순 없지만 확실히 어제보다 눈에 들어오는 색깔이란 건 알겠다. 어제는 괜히 바지 위에 시꺼먼 방수 레이어를 덧입었는데, 오늘 입은 기모 조거팬츠는 회색이니까 아래위로 어제보단 밝게 나오겠지? 어제의 시린 경험 때문에 엉덩이가 거의 방석같이 보일 정도로 뚠뚠하게 레깅스를 껴입었지만, 그래도 오늘은 방한과 색감 둘 다 잡은 거 같지 않냐고 검증받을 때 즈음, 점차 시야에 다른 차량들이 하나둘씩 보였다. 어딘가 가까워지긴 하나보다 싶은데, 저 멀리 폭포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이슬란드에 있는 폭포 중 유일하게 뒤편으로 들어가 볼 수 있어서 유명하다는 셀야란즈포스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진입로를 따라서 걸어가는데, 육중한 무언가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굉음이 났다.
“콰쾅”
걸어가던 모든 사람들이 순간 놀라서 무슨 일인가 파악하려고 동작을 멈췄는데, 누군가가 얼어붙은 폭포 물줄기 덩어리가 떨어진 거라고 말했다. 폭포의 왼쪽 절반이 떨어져 내리던 모습 그대로 고드름이 되어 있었는데,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아래쪽이 떨어진 것이었다. 원래 이 셀야란즈포스의 묘미가 저 물줄기 뒤편으로 가서 그쪽 편에서 보이는 요정의 굴 같은 신비로운 풍경을 감상하며 다른 폭포까지 이어지는 길을 걷는 거라고 하는데, 만난 지 몇 초만에 이런 무시무시한 일을 목격하니 선뜻 들어가 볼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근처에 있다가 60미터 높이에서 낙하하는 얼음덩어리 파편이라도 맞으면 그게 무슨 날벼락... 아니, 대체 이 나라는 인구 때문인지 연말이라 그런지 어딜 가도 관리요원 하나 없고, 이렇게 위험해 보이는 관광지에 안전요원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이상한 객기 부리는 사람 한 명이라도 나타나면 뭐가 됐든 사고 크게 한 번 날 법도 한데, 대자연의 위용에 다들 본능적으로 기가 눌려서 객기는 꿈도 안 꾸나 보다.
여름에는 진입로에 푸릇한 이끼도 자라고, 폭포에서 흘러나온 물길도 이어지는 걸로 보였는데, 사진 상 야트막한 펜스를 쳐놓은 저 바깥쪽이 얼어붙은 물길 위에 눈이 쌓인 곳일 테니 정말 최소한의 안전장치만 해놓은 셈이다. 낙하하는 폭포수가 닿는 수면 근처는 신기하게도 물이 얼어있지 않았는데, 그래서 폭포 속으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질퍽한 살얼음으로 되어 있어 사실상 방수 부츠를 신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상태였다. 귀여운 숏패딩에 어울리는 어그 롱부츠를 예쁘게 코디한 노라가 "내가 왜 어그를 신었을까..." 연신 중얼거렸다. 목이 긴 고어텍스 등산화를 신은 나는 비교적 담대하게 좀 더 가까이로 다가갈 수 있었는데, 측면에서 보니 떨어지는 물줄기가 수직이 아니라 포물선을 그리고 있었다. 얼지 않은 폭포의 오른쪽 절반에서 떨어지는 수량만도 상당해서 꽤 거리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튀어오는 물방울에 눈을 뜨기가 힘들 정도였다. 얼음이 모두 녹는 시기에 몇 배나 더 거센 기세로 쏟아질 물줄기를 상상만 해도 압도적이었다.
폭포 뒤편을 구경하는 것은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워낙에 아름답고 독특한 촬영지로 아이슬란드에서도 유명한 곳이라 다양한 영상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저스틴 비버의 'I'll show you' 뮤직비디오 속에서는 다양한 앵글로 신비롭게 촬영한 셀야란즈포스를 볼 수 있는데, 우리가 본 얼음폭포와는 전혀 다른 곳 같았다. 아이슬란드를 다녀온 지 한참이 지났을 때였지만, 신비롭기까지 한 그 풍경을 직접 감상하기 위해 겨울이 아닌 계절에 아이슬란드를 꼭 다시 찾고 싶어 졌다.
어딜 가나 아이슬란드 관광지 소개에 나온 전형적인 풍경은 볼 수 없지만, 대신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는 겨울 중의 겨울 풍경이 우리를 반겼다. 여기까지 와서 저 안으로 들어가 보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이슬란드에 오기까지 삼십 년이 훨씬 넘게 걸렸는데 또 얼마나 걸릴까 생각해 보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첫날부터 벌써 몇 번이나 홀로, 또는 다 같이 되뇌었던 말,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지금 경험하는 것을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마법의 말을 다시금 입 밖으로 꺼냈다.
“셀야란즈포스를 이렇게 본 사람들이 여기 있는 우리 외에 몇이나 되겠어”
녹색의 아이슬란드를 보는 사람이 훨씬 더 많겠지만, 영하 17도의 냉동실 같은 날씨에서 이 나라를 둘러본 사람은 훨씬 적을 테니까, 어차피 여행은 남들이 다 본 걸 보는 것보다 내 인생에 남을 특별하고 소중한 기억을 만드는 일이니, 특별하다면 이만큼 특별한 일이 또 있을까. 몇 분 밖에 있었다고 또 입이 얼어붙어서, 말로는 충분히 못하고 마음속으로 백 배쯤 격하게 감탄하며 다시 차에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