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밑줄 치며 배운 것
내 의도나 노력과 관계없이 진창으로 빠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어렵고 복잡한 관계를 조율하다가, 급기야 갈등의 중심이 나에게로 옮겨지면서 매일을 칼끝을 걷는 듯한 긴장과 스트레스 속에 보내야 했던 몇 달이었다.
우선 문제가 해결돼야 감정도 해결된다고 믿는, 대문자 T로 태어난 나였기에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쉼 없이 질문하고 해법을 찾아 헤맸지만, 그 과정 속에서 내가 점점 나 자신을 의심하고 끝없이 질책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내가 정말 기준이 높은가?”, “내 말이 너무 날카로운가?”, “왜 나는 이걸 그냥 넘기지 못할까?", "결국 문제는 나에게 있는 건 아닐까?"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질문들 속에서, 생각의 고리를 끊어내지 않으면 전혀 엉뚱한 것을 끊어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한 순간, 처음으로 상담실을 찾았다.
대학 시절 심리학을 부전공하고 치료적 상담을 연구하는 학회 활동도 오래 했던 터라 처음에는 ‘이런 기법쯤은 다 알고 있다’는 얄팍한 자만도 없지 않았지만, 문을 열기 직전 나는 마음속으로 단 하나의 목표만을 정했다.
자기 돌봄.
단지 그뿐이었다. 문제를 분석하고 원인을 파고드는 일은 이미 혼자서 너무 오래 해왔고, 더 이상은 나 스스로를 상하게만 할 것 같았다. 문제 해결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해결되지 않는 이 상황의 한복판에서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마주하는 일이었고, 다시 내가 알던 나, 내가 좋아하던 나의 모습을 만나고 싶었다. 남들이 어떻게 보느냐보다는 내가 나를 믿고 지지하는 방법을, 잊고 지냈던 내 강점들을 다시 배워나가고 싶었다.
총 10회기의 상담이 끝났을 때, 그토록 빠져나오고 싶었던 상황은 단 한 걸음도 진전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 스스로는 발견하지 못했던 나의 재능과 강점들을 새롭게 발견했고, 어디에서든지 그것들을 잘 활용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던 스스로의 가시도 발견했다. 감정을 다루는 것보다 문제를 해결하는 게 언제나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해결은 전적으로 내 손에 달린 것이 아니며, 인생에서 내 영향력을 가장 크게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이 ‘나를 돌보는 것’이라는 사실도,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돌봄 자체를 ‘해결’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비로소 배웠다.
좋아하는 것을 하며 하루 일정을 비우는 루틴만으로 나를 돌볼 수 없다는 것, 자기 돌봄이란 상당한 시간이 드는 일이자, 나를 돌보지 못했던 시간들을 깊이 있게 다시 들여다보며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다시 쌓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아는 데에 꼬박 10주가 걸렸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해서 그 터널을 빠져나올 때까지 계속 상담을 이어갔다는 한 친구는, “나라는 사람을 책이라고 할 때, 상담가와 함께 손으로 짚어가며 아주 자세히 읽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때는 참 감성적인 표현이라며 웃으며 넘겼던 그 말을, 이제 와 다시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사놓기만 하고 오랫동안 책장 속에 묵혀 두었던 ‘나’라는 책을 이제야 한 번 밑줄 치며 완독 해봤다. 살면서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다. 그때는 이번과는 전혀 다른 곳에 밑줄을 치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