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
배경음악. Don McLean [Vincent (Starry Starry Night)]
* 들으며 읽으시면 더 좋아요:)
오랜만에 몇 년간 써놓은 일기장을 꺼냈다. 첫 장부터 익숙한 문장이 나를 반겼다.
내일은, 올해는 달라지자. 반복하지 말자.
내가 써온 일기들은 비슷한 후회와 동일한 다짐, 닮은 감정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구절들을 따라가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난 여전하구나."
다짐은 언제나 야심 찼다.
오늘은 운동을 시작하자.
이번 주에는 새로운 도전을 해보자.
다음 달에는 조금 더 나은 내가 되자.
하지만 결론은 늘 같았다. 처음엔 열정으로 가득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흐릿해지고 말았다.
처음엔 이런 패턴이 스스로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왜 나는 항상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왜 계획했던 대로 실천하지 못할까? 왜 나는 바뀌지 않을까?
그런데 오늘, 그 일기들을 읽으며 마음이 이상하게 편안해졌다. 변하지 않은 내 모습이 오히려 반갑게 느껴졌다.
요즘 나는 주변의 변화가 마냥 반갑지 않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변한다. 기술도, 사람도, 내가 발 딛고 있는 환경마저도.
세상은 더 나은 속도를 요구하고, 적응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은 압박을 준다. 그 속에서 나 자신마저 매번 달라져야 한다는 강박을 느꼈다.
"이제는 더 성숙해야 한다. 더 발전해야 한다."
이런 다짐들은 어느 순간 나를 지치게 했다. 가끔은 숨도 막혔다. 변화는 필요하지만, 그 변화를 억지로 밀어 넣는 과정에서 나는 점점 소화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일기장 속에서 '여전한 나'를 발견했다.
늘 비슷한 다짐과 후회의 문장들, 변하지 않은 나의 일상.
모든 것이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안정감과 익숙함을 느꼈고, 위로를 받았다. 그것이 싫지 않았다.
되풀이되는 구절들은 마치 운율 같았다. 한 곡의 노래가 마음속에서 반복되듯, 나는 삶의 루틴 속에서 리듬을 만들고 있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 따뜻한 물을 마시고,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는 작은 의식. 그것은 특별한 목표도, 성취도 없지만, 그 시간만큼은 나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런 행동들은 꼭 특별한 성과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안정감을 주었다.
우리는 흔히 반복되는 일상을 지루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반복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반복을 통해 우리는 익숙함을 배우고, 그 익숙함 속에서 새로운 관점을 발견한다.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들을 때, 처음에는 듣지 못했던 가사의 의미를 깨닫는 것처럼.
일기장 속 나는 매번 같은 후회와 다짐을 되풀이했지만, 그것은 내가 여전히 나아지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같은 패턴을 반복하면서도 나는 조금씩 다른 길을 걸어왔고, 이전보다 더 나은 나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계속 일기를 쓸 것이다. 언젠가 다시 이 글을 보면, 또 비슷한 다짐과 후회를 발견하겠지.
하지만 괜찮다. 변화하지 않아도, 혹은 발전의 속도가 느려도 괜찮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나는 내 삶을 살아가고, 그 속에서 나만의 리듬을 만들어가고 있으니까.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며 그날, 나는 일기를 썼다.
반복돼도 괜찮은 하루다.
배경음식. 계절 과일 플레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