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의 미학
나는 이렇다 할 취미가 없었다.
남들에게 ‘내 취미는 이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꾸준히 즐기는 무언가.
꾸준함이 없어 뭘 해도 오래 하는 법이 없었다.
한두 번 하면 금방 귀찮아졌다.
그저 취미를 갖고 싶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2017년 벼락같이 뮤지컬이라는 취미가 생겼다.
과거의 어떤 분이 나에게 뮤지컬을 보여준 덕분이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취미의 소용돌이 속에 미친 듯이 빠졌다.
이전까지는 뮤지컬이 부자들의 향유물이라고 생각했다.
금수저들이나 즐기는 비싼 취미.
혹은 벌 만큼 번 중년들이 즐기는 여가생활.
당시 대학로 중소극장 티켓값은 4~5만 원 선이었다.
나에게는 가치 대비 비싼 금액이었다.
한 번 보는데 4만 원?
이 돈이면 다른 걸 하지.
하지만 시작이 내 자본이 아니었다.
남의 돈으로 시작한 취미는 재미를 붙이기에 더없이 좋았다.
가치 대비 가격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유일한 취미생활은 뮤지컬 관람이 되었다.
과거의 어떤 분과 연이 끊어져도 취미는 계속됐다.
이제 내 돈을 써가며 뮤지컬을 보기 시작했다.
2017년부터 시작한 이 취미생활에 꽤나 많은 돈과 시간을 쏟아부었다.
2017~19년도에는 월에 2~3번 정도,
2020년이 되자 월에 6~7번을 보기 시작했다.
2021년에는 폭주하기 시작했다.
월에 10회, 많으면 15회까지 뮤지컬을 봤다.
2024년 2월까지 폭주가 지속됐다.
무려 3년간이다.
물론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보는 사람도 있다.
매번 달마다 20번 이상 뮤지컬을 보는 사람도 있다.
SNS에서 그런 사람들을 보면 감탄했다.
그 사람의 재력과 체력과 여유시간이 부러웠다.
세상에는 취미생활에 이만큼이나 몰입한 사람들이 많구나 느꼈다.
폭주가 지속되던 어느 날,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전부터 스스로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체력이 떨어지면서 예전만큼 즐길 수 없었다.
그리고 뮤지컬에 할애하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앉아서 보는 뮤지컬 관람이 생각보다 에너지 소모가 있다.
뮤지컬을 보면서 졸지 않으려고 하루를 모두 뮤지컬을 위한 시간으로 사용했다.
졸면 당연히 돈이 아깝기 때문이다.
한두 푼도 아닌데!
졸지 않기 위해 낮잠도 자고, 쉬는 날에는 일부러 늦게 일어났다.
그러니 나만의 시간이 줄어들었다.
집안 꼴도 엉망이었다.
어떤 날은 자체 할인까지 하며 양도했다.
(자체 할인 – 본인이 결제한 가격보다 저렴하게 양도하는 행위)
양도가 되지 않은 날에는 ‘아, 쉬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며 억지로 집을 나섰다.
하지만 또 관성처럼 새로운 뮤지컬을 예매하고 있었다.
막상 가서 보면 또 재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
삶의 만족도가 떨어졌다.
돈도 아끼고, 내 시간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어리석은 일들은 2024년 3월부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2023년 연말정산서를 받은 후의 일이다.
도서·공연비에 1300만 원이 찍혀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별거 아닌 금액일 수 있다.
하지만 내 벌이에 비하면 과한 금액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4월에 종지부를 찍었다.
‘정신 차려! 이제 현생을 살아야지!’
내 계획은 ‘적당히’ 보는 것.
두세 달에 한 번씩 보고 싶은 극만 보는 것이다.
내 인생의 첫 도파민인 뮤지컬을 완전히 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직 뮤지컬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뭐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건강한 관계라고 한다.
뮤지컬과 나도 그런 관계이다.
긍정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
결국 내 삶의 균형과 과도한 지출을 막기 위해 나는 뮤지컬과 시간을 갖기로 했다.
나를 위해, 나의 재미와 설렘을 위해 시작했던 뮤지컬.
이제 나를 위해 잠시 쉬려고 한다.
안녕, 뮤지컬!
이제 휴식시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