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받고 자란 딸들에게
친구랑 놀다가 문득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을 느낄 때가 있다. 어느 집이나 문제는 있기 마련이라지만 평범한 가정, 그러니까 경제적 능력이 있는 부모님 밑에서 애착 관계를 형성해오며 자라온 친구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종종 다른 세계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해가 지날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어른이 되어갈수록 이질감과 괴리감은 점차 커져간다.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겠다는 인류 보편적 소망이 대화 주제로 올라올 때,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막막함에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진다. '나도 그런 미래를 가질 수 있을까.' 의문이 피어오른다.
심리학에서 성격은 유전적인 영향보다도 환경적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인격은 어린 시절의 경험을 기반으로 형성된다고 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정서적 교감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아이의 정서에 좋아서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삶에 대한 태도와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교감 능력을 학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기반이 오로지 부모라는 외부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예전에 '라디오 스타'에서 이효리 씨가 남편에 대해 '자신과 맞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감정 기복이 심한 자신과 달리 남편은 감정 기복이 적어 중간 지점에서 항상 만난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가 싸우는 걸 자주 보고 자란 아이는 지속적인 긴장 상태에 놓인다. 특히 불안한 엄마로부터 아이는 한때 탯줄로 이어졌던 존재로서 엄마의 정서를 그대로 체감한다. 아이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외부로부터 계속되는 자극으로 인해 아이는 자신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인지한다. 때문에 미어캣처럼 외부 반응에 예민해지고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된다.
외부 반응에 민감한 것은 장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로서는 피곤할 뿐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 호수에 누군가 돌을 던지면 나는 그 돌로 혼자 물수제비까지 뜬다. 그러나 정서가 안정된 친구는 그 돌을 가만히 가라앉힌다. 외부 자극에 대해 감정적 반응보다 이성적 반응을 보인다. 외부 자극이 자신에게 미치는 긍정과 부정의 영향을 구분할 줄 알고 이를 자기 발전의 양분으로 삼는다. 한마디로 자존감이 높다.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자존감은 현대 사회의 치열한 경쟁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역량이다. 참으로 불공평하지만 누구나 자존감을 가질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딸과 엄마의 관계가 그러하듯, 나 또한 엄마와 아주 긴긴 애증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내가 엄마에게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애정은 그저 내면의 증오심이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과거를 꾹꾹 눌러 없던 일처럼 치부하는 방법뿐이다. 어차피 입 밖으로 꺼내봤자 엄마는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만 그 장단에 맞춰주면 겉보기에 평탄한 모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엄마는 할머니와 또 긴긴 역사가 있다. 할머니는 정서적, 물리적 학대를 다섯 남매에게 행사했고 장녀인 엄마는 그 폭력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지금도 엄마와 이모, 삼촌은 할머니에 대한 증오심을 숨기지 않는데 나는 그 모습을 목도할 때마다 마치 외가가 저주를 받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할머니가 엄마와 이모에게 그렇게 했듯, 엄마와 이모들도 딸에게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본인들은 본인의 엄마보다는 낫다고 착각하면서,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는 엄마와 똑같이 행동한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잔인한 악순환이 일어난다.
나는 그래서 두렵다. 나도 그 저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 같아서.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의 모든 말과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애정을 애증으로 만들까봐. 다행히 나는 내가 지나온 유년 시절이 끔찍할 정도로 싫기 때문에 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지가 있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이해하려고 한다. 엄마가 내게 미안하다 하지 않아도 용서하려고 한다. 그러려면 나는 배워야 한다. 엄마가 왜 내게 그랬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럼에도 엄마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알려고 한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학습해야 한다.
평소 즐겨보는 유튜버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부모는 자식에게 우주이고 나는 한 사람의 우주가 되어주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한 것 같다. 그래서 아이를 갖기 두렵다. 내가 과연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그때, 한 구독자가 말했다. '그런 고민을 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엄마가 되실 자격은 충분하다'라고.
나는 엄마가 될 생각이 없다. 딸인 것만도 벅차다. 그런 내가 굳이 엄마와 나의 관계를 되짚어 보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엄마도 그냥 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내게 이해시키려고. 엄마는 어떤 때에는 시대의 흐름에 상처 받은 피해자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을 끊으려면 문제를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나는 그 실마리가 엄마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엄마와 딸의 심리학'은 엄마와 딸, 그 복잡다단한 관계를 한 발짝 뒤로 물러서 관찰한다. 무엇이 모녀 사이를 불안한 외줄 타기로 만들었는지 분석한다. 심리학에 기반해 덤덤하게 애증의 실타리를 풀어나간다. 항상 감정의 화염에 휩싸이고 마는 엄마와의 대화를 머리로 할 수 있게 도와준다. 엄마를 용서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냥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해하는 행위 자체로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해준다.
근래의 수많은 에세이는 자신을 분석한다. 자신에게서 이유를 찾고 그 원인을 파헤치기 위해 자신의 삶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책은 자신이 아닌 타인으로서의 엄마를 분석한다. 엄마가 보인 행동의 원인을 엄마의 삶에서 찾는다. 그럼으로써 자식인 내가 엄마를 이해할 수 있도록 실마리를 제공한다. 엄마를 이해하는 것은 결국 내가 받은 상처를 돌아보는 것이다. 이 책은 문제의 본질에 근접하여 아물지 못한 상처에 새살이 돋을 수 있게 도와준다.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말해준다.
다정하게 위로를 건네는 책은 아니다. 나를 십분 이해해주는 책도 아니다. 엄마를 이해하기 위한 여정이므로 엄마에게 받은 상처가 클수록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참고로 우리 엄마는 읽다가 구석에 던져놨다. 엄마를 이해하려는 의지는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있다. 엄마와의 관계가 나의 발목을 잡는다면, 더 이상 그런 관계가 지긋지긋하다면, 아물지 못해 현재에 와서도 곪아 터지고 있는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싶다면, 한 번쯤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엄마를 안다는 건, 나를 이해하는 과정의 일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