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고시원연가 (4화) 자판기 커피는 200원이었다.

원고지가 품은 것

by 해이





아버지가 손을 잃은 건 1994년 겨울이었다.

공장 바닥은 늘 철가루와 기름으로 미끄러웠다.

새벽 근무 교대가 끝나기도 전, 커다란 기계에서 철판을 삼키듯 말아 올리던 순간,

굉음과 함께 오작동을 일으키며 철판을 쥐고 있던 아버지의 손을 함께 빨아들였다. 기계는 사람의 비명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것이 끌고 간 건 살과 뼈, 그리고 한 집안의 버팀목이었다.


회사에서는 근로자 부주의라며 산재 보상을 거부했다. 위로금이랍시고 건네진 건 변변치 않은 합의금 몇 푼. 그걸로는 병원비도 다 채우지 못했다.


그 무렵, 엄마는 병으로 누워 있었다. 기침이 잦았고, 날마다 야위어 갔다. 집안은 빠르게 무너졌다. 엄마의 약값, 아버지의 병원비, 밀려드는 공과금. 남은 돈은 늘 마이너스였다.

엄마는 끝내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그렇게 한쪽 손과 함께 모든 것을 잃었다.



집은 더 어두워졌다. 수연은 그때 겨우 국민학생이었다. 방과 후 집에 들어서면 늘 약봉지와 공과금 고지서가 작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같은 반 친구들은 피아노 학원이나 미술 학원 얘기를 했지만, 수연은 그럴 수 없었다. 학원을 가는 대신 학원 전단지를 돌리거나 신문 안에 끼워 넣는 일을 해 번 몇만 원의 돈으로 약값을 보탰다. 그마저도 나이 어린 미성년자라 언제 내몰릴지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는 ‘장애인 고용’이라는 명목의 공장을 전전했다. 그러나 임금은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보다 적었고, 심지어 떼이는 경우도 많았다. 어느 날은 봉투를 열어보니 반 토막 난 월급이 들어 있었고, 사장은 “다음 달에 맞춰준다”는 말만 던졌다. 물론 그 ‘다음 달’은 오지 않았다.




지금 병원 침대 위의 아버지는 여전히 딸을 못 알아봤다. 때로는 다른 보호자에게 하듯 깍듯한 인사를 했고, 때로는 죽은 아내를 찾았다.

그러나 아주 가끔, 눈빛이 또렷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니... 글 쓴다 했지? 꼭 써라. 글은... 니 손가락에서 안 나온다. 가슴에서 나온다. 너는 꼭... 하고 싶은 걸 하고 살거라.”


순간 수연은 숨이 막혔다. 그러나 말이 끝나자마자 아버지는 다시 흐려졌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며칠 후, 침대 밑에서 검은 비닐봉지를 발견했다. 귤 몇 개가 하얀 곰팡이를 뒤집어쓴 채 썩어 있었다. 껍질은 녹아내리고 과즙은 바닥에 스며들어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버지, 이건 왜 숨겨놨어요?”


잠시 눈빛이 맑았다.


“너 오면 주려고... 내가 모아놨다.”


귤이 아니라 그 말이 손에 얹혀 무겁게 내려앉았다.

수연은 손가락 끝이 저릿해짐을 느꼈다. 모든 것을 까맣게 잊은 줄 알았던 아버지 안에 여전히 자신을 향한 마음 한 줄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를 않았다.


슬픔인지, 기쁨인지, 안도감인지, 좌절감인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한꺼번에 휘몰아쳐 눈가를 물들였다.



하지만 병은 잔인했다.

몇 시간 후, 아버지는 그 엉망진창의 귤들을 스스로 까먹었다. 기억이 사라진 채였다. 당 수치가 치솟아 응급실로 옮겨졌다.


수연은 복도에서 자판기 커피를 들이켰다. 종이컵 속 검은 액체가 떨리는 손에 묻어 나왔다. 왜 이렇게까지 힘들게 하는지, 왜 단 한 번만이라도 조용히 있어주지 않는지. 원망이 목까지 차올랐다가, 귤의 향과 함께 가라앉았다.




편의점 아르바이트까지 마친 후 새벽에서야 고시원으로 돌아온 수연은 2층 식당에서 믹스 커피 한 잔을 타 손에 든 채, 본인의 방 204호 문 앞에서 멈칫했다. 계단 밑에서 델마가 휘청이며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어깨에 걸친 숄이 델마의 걸음에 같이 흔들렸다.


“You are my sunshine. My only sunshine...”


그녀는 혼잣말처럼 흥얼대고, 알싸한 술 냄새와 독한 향수냄새를 풍기며 자기 방으로 향했다.

수연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을 닫았다.


고시원 복도에는 아직 델마의 흥얼거림이 남아 있었다.

좁은 방이었지만 그 좁은 공간을 채우는 것은 고작 그새 식어버린 커피 한 잔과 적막, 원고지와 연필, 옷가지 몇 벌과 이불 한 채가 전부였다. 그리고 며칠째 아무 글자도 적어 넣지 못한 원고지에, 이제는 글자를 채워 넣어야 했다.


작고 마른 몸을 겨우 욱여넣어야 하는 낡은 좌식 책상은 수연을 더욱 작아 보이게 했다. 무슨 말부터 적어봐야 할까, 머릿속을 맴도는 단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연필을 든 손은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기를 몇 분여.. 결국 몇 마디의 단어만 나열한 채로 멈추고 말았다.


귤, 자판기 커피, 200원.

그리고 아버지.


지우개를 들어 지워버리려 했지만, 고개만 떨군 채 원고지를 덮었다.




겨울은 길었고, 고시원 복도는 늘 좁고 어두웠다.


그래도 누군가는 또 누군가를 챙겨주었고,

누군가는 무언가를 잊으려 노래를 흥얼거렸다.


각자의 사정은 달랐지만, 그렇게 작은 순간들이 모여 또 하루를 버티게 했다.


그때 고시원에 살던 사람들은

나이도, 살아온 길도, 고시원으로 흘러들어온 이유도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같은 문으로 들어와 같은 복도를 지나며

저마다의 하루를 견뎠다.


곯아버린 귤과 쓰디쓴 커피는 각기 다른 의미로 다가왔고,

다른 방식으로 살게 했다.

겨울은 그렇게, 또 하나의 하루를 삼켰다.











#고시원 #신림동 #청춘소설 #단편소설 #옴니버스

#인생이야기 #자취 #하숙 #힐링소설

#아버지 #가족이야기 #귤 #짠내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