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Article 2024 2024 September Edition
늦잠때문에 더 바빴던 아침, 해외 출장 중인 남편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Mom is in a hospital. She’s got an aneurysm.(엄마가 병원에 계셔. 뇌경색이래.)”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려던 나는 이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어머니가 계신 밴쿠버는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병문안은 커녕 전화조차 바로 드릴 수 없는 상황이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어머니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다리가 불편하셨다. 외출에 어려움은 있었어도 대체로 건강하고 친구들도 자주 만나는 활동적인 분이셨다. 그랬던 어머니의 뇌경색 소식은 그녀의 삶이 생(生),노(勞)를 거쳐 병(甁)의 단계로 접어드는 신호탄 같았다.
신혼 생활을 했던 캐나다를 떠날 때,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남편은 좋은 기회로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지만 그곳에 혼자 남을 시어머니에 대한 생각으로 떠나겠다는 결심을 하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나는 당시 고민하던 남편에게 “다른건 생각하지 말고, 당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해.”라고 말했고, 그는 내 조언을 받아들여 캐나다를 떠나 새로운 일을 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캐나다를 떠나 있는 동안 나를 힘들게 한건 안온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었다. 언젠가 마주할 시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이 혹여 우리가 그 곁을 떠나 있는 동안 오지 않을지, 그것이 불안했다.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어머니가 건강하게 살아계실까? 우리가 해외에 있는 동안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어쩌나? 그렇다면 남편은 자기 어머니의 끝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혹시라도 노모를 두고 고향을 떠났던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을까? 자책하지는 않을까? 아니면 혹시 나 때문에 떠났다고 나를 원망하지는 않을까?
어머니는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혼자 지내고 계셨다. 사실 어머니는 아들이 결혼하면 아들 내외와 함께 지내기를 소망하고 계셨다. 하지만 한국에서 온 며느리인 나는 일찌감치 한국 시집살이의 매서움을 조기 교육 받았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을 끝내 거부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산다는 건 구시대의 유물 같은 일이라 생각했고, 내가 부엌데기 노릇을 벗어나기 힘들 것 같은 공포가 들게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한번도 나에게 직접적으로 합가를 제안하신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아직도 우리는 사이 좋게 남아있는 건지 모르겠다. 만약 어머니가 내게 직접 요구를 하셨다면 거절하기 참 난처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내 외할머니와 같은 해에 태어나셨다. 연세가 많으신 어머니였지만 가끔은 나보다도 깨어있는 사고방식을 갖고 계셨다. 한번은 어머니 댁에서 남편과 다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두 사람 사이에 종교인의 참전에 대한 찬반 논쟁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끝까지 웃는 얼굴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셨다. 그런 어머니의 태도에 약이 오른건지, 남편은 “엄마는 전체적인 그림을 보지 못한다.”며 식탁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의 양보없는 논쟁과 남편의 마지막 말에 적잖이 당황한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급히 어머니께 죄송하다며 남편의 행동을 대신 사과했다. 어머니는 오히려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시며 내게 말씀하셨다.
"얘야, 난 내 아이들이 나와 논쟁할 수 있다는 게 정말 기뻐. 저 애가 자기 엄마에게도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면, 어떻게 세상에 나가서 자기 뜻을 펼칠 수 있겠어?"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부모의 말에 반기를 드는 것은 불효라고 교육받은 나에게 어머니의 수평적인 사고방식과 깊은 이해심은 정말 획기적인 교육관이었다. 어머니는 팔십이 다 된 나이였고, 나는 이십대였지만, 어머니보다 내가 더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사실 어머니와 합가를 꺼린 데에는 어머니에 대한 진실한 이해나 공감이 부족했던 탓도 있다. 어머니뿐 아니라 타인이 보낸 시간과 경험을 그려보는 능력이 내겐 부족한 시간을 살았다. 그걸 늦게서야 깨달았다. 나에겐 아직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부족하다. 하지만 나의 그런 점을 인지할 수 있게 해준 건 오롯이 딸아이 덕분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동안, 이 한 사람을 위해 치열하게 최선을 고민하게 되었다. 타인의 탄생과 성장을 이토록 가까이에서 목격할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에 대해 경탄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시어머니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와 공감도 그제서야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시어머니의 엄마도 그녀를 내가 딸을 키우듯 키워냈을 것이다. 젖을 먹이고 눈을 맞추며 다정히 웃었을 것이다. 우주의 깊음과 세상의 순수함을 아이의 까만 눈동자를 통해 느끼셨겠지. 어머니는 스무살이 되자마자 고국인 필리핀을 떠나 캐나다로 가셨다. 멀리 떠나는 어린 딸의 안전을 걱정하고 소식을 기다렸을 내 시어머니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내 시어머니 역시 그런 엄마였을 것이다. 아들에게 말과 글을 가르치고, 용기를 주며 키워냈을 것이다. 밥 먹는 법, 옷 입는 법 따위를 수도없이 일러주셨겠지. 소중히 길러낸 아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어하는 건 어쩌면 약해진 노모가 갖는 자연스러운 마음이었을 거다. 이제야 그런 어머니의 마음이 이해가 되고, 그저 내 입장만 생각했던 것이 죄송해진다.
우리 가족의 출국 전, 어머니와 함께 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노인 생활 시설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곳은 깨끗하고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은퇴한 노인들이 함께 커뮤니티를 이루고 지내는 곳인지라, 그들을 위한 의료진이 상주하고 있었다. 입주민들은 누군가와 함께 방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아파트에서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독립적인 생활이 어려운 분들은 시설에서 제공하는 식사와 청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결코 집이 될 수 없었다. 주방이 있어도 거실이 있어도 손때 묻은 것이 아니었고, 추억이 깃든 것이 아니었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생활’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안전이 보장된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생활이었다. 어머니가 이제까지 살아온 생활을 그곳에서 영위하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그곳은 그저 수많은 개인이 섞여 있는 광장 같은 곳이었다.
남편과 전화를 끊고 가만히 어머니가 살고 계신 아파트의 시세를 가늠해 보았다. 그 아파트를 팔고 지금까지 모아둔 돈으로 단독주택을 매매할 수 있어 보였다. ‘남편과 내가 맞벌이를 한다면 20년 후엔 모두 갚을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래층에서, 우리 세 가족은 위층에서 살고, 남는 방 하나 쯤은 홈스테이 학생을 들여 놓으면 가욋돈이 생기겠지?’, ‘캐나다 생활에 차는 꼭 필요하니까 한 대만 뽑고……’ 나는 잠시 이런 종류의 비루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다가 이내 다시 불안이 엄습한다. 아픈 어머니를 돌보는 일이 과연 내 깜냥으로 가능할런지. 괜한 생각을 하고 있는건 아닌지. 어머니의 혈관들이 얼마나 버텨줄지, 어머니의 정신이 앞으로 몇 년이나 또렷할지.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나보다 30년 먼저 사랑한 나의 시어머니. 그녀 생의 마지막 장을 내가 어떻게 함께 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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