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죽음은 단지 우연일까
이 글은 저자인 오베리 핸드릭스 교수의 동의하에 번역한 것입니다.
1968년 2월 12일 마틴 루터 킹과 스텝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운동(Poor People’s Campaign)” 마스터플랜을 완성했다. 이 운동의 목적은 여러 지역에 사는 그리고 다양한 인종을 가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수도로 내려가서, 자신들의 참혹한 처지를 정부가 해결하겠다 천명할 때까지, 지속적인 투쟁을 이어가는 것 이었다. 킹 목사는 미국의 경제, 정치적 현실에 격렬히 저항했고, 투쟁을 이끌었다. 킹 목사는 이 운동이 이전에 그 어떤 운동보다 반대자들의 강한 반발을 살 거란 걸 알고 있었다. 킹 목사는 1968년 4월 4일 암살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우연의 일치 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었던 걸까? 미국 역사에서 잊힌 이 거대한 사건의 전말을 드러내고자 한다.
1924년 세계 대전에 따른 보상으로,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전역 군인들에겐 연금이 지급되기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1945년까지 연금은 지급되지 않았다. 대공황의 여파로, 절망에 빠진 전역 군인들은 하루 발리 연금을 지급해주길 간청했다. 그러나 지급되지 않았다. 1932년 5월, 절망에 빠진 300명의 전역 군인들은 수도로 내려가 즉시 현금으로 연금을 지급해 달라 요구하며 투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몇 달 후 수 천명의 전역군인들과 가족들이 이 투쟁에 동참한다.
1932년 7월, 43,000명의 연금 투쟁 참가자들은, 수도로 내려와 24개 이상의 캠프를 차렸다. 가장 규모가 큰 캠프엔 만오천 명가량이 수용되었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연대하였고, 필요에 따라 투쟁을 확대시켜 나갔다.
7월 17일 시위대는 연방의회에 모여 조기 보상 지급 법안에 대한 긴급 표결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 법안은 통과되지 않았고, 결국 파기되었다. 국회는 시위대에게 캠프 해산을 요구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캠프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위대의 분노는 불길처럼 타올랐다.
7월 28일, 무장 경찰이 캠프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두 명의 전역 군인이 사망하게 된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캠프를 섬멸시키기 위해 군대를 출동시켰고, 시위대는 워싱턴에서 폭력적으로 내쫓겼다. 탱크와 보병부대, 기병 연대는 총검으로 무장하여 공격했고, 최루가스가 뒤이어 이들을 탄압했다. 해가 지기도 전에, 수 백명의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부상자 중엔 갓난아기와 12살 된 소년도 있었다. 아기와 소년은 결국 사망했다.
미국민들은 후버 정권의 반시민권적 군사 폭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전역 군인들이 공격을 당한 이 전쟁 같은 만행은 더욱더 분노를 고조시켰다. 실의에 빠져 맨손으로 연방정부에 항의하는 전역군인들을 공권력으로 무참히 짓밟은 이 사건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국가가 가난한 전역 군인들의 복지를 책임져야 한단 의식을 일깨웠다. 그리고 이런 의식은 범위가 확대되어 전역 군인들 뿐 아니라 가난하고 약한 시민들에게도 복지가 주어져야 한단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 전역 군인들에게 있었던 사건에 대한 생생한 기억들과, 함께 후버의 뒤를 이어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루즈벨트는 1933년 대통령 서약을 마치고 곧바로 3주 뒤, 5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서 시민 보호 법안을 만든다. 이는 정부가 경제정책에는 손을 대지 않는 경제적 자유 방임주의에서, 정부가 직접 나서 사회적 필요들을 충족시켜 나가는 매우 상징적이며 근본적인 정책적 변화였다. 그리고 이런 정책들이 후에 사회 변혁을 이끈 뉴딜정책의 초석이 된다. (G.I 법안으로 알려진 1944년의 군인들에 대한 재정지원 법안은 늦기는 했지만, 앞서 있었던 연금투쟁의 성과라 할 수 있다).
장기적 관점에서, 연금투쟁은 팔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자유주의 정치꾼들과 기업 자본가들이 비난하는 사회보장제도를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노동자들의 권리와 보호, 조정능력을 가진 시장의 보호와 강화, 사회 보장 혜택, 실업자들에 대한 보험 적용 확대, 최저 임금 제도와 같이 수많은 기업 엘리트들과 보수 정치인들이 여전히 반대하는 정책들은 연금 투쟁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비록 미국 인구 2% 정도의 소수만이 혜택을 입을 수 있었음에도, 연금 투쟁은 미국의 정치, 경제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고, 부의 재분배에 기여했다. 킹 목사는 그의 스텝들에게 말했다 “… 현실 가능하고, 성취할 수 있고, 순수하고, 단순해서 반대자들의 극심한 반발을 살만한 것을 찾으십시오.” 이에 따라, 가난한 이들의 운동은 2천8백만 혹은 빈곤선 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미국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 대중적 아젠더가 되었다.
이 캠페인은 건장한 모든 노동자들을 위한 일자리를 요구했다. 가사 노동과 농사일을 포함하는 모든 사업장의 노동자들을 위한 실업 보험과, 공정한 최저 임금, 모든 미국인들을 위한 연소득 보장, 자기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육권을 요구했다. 킹 목사는 이 운동에서 “고난 아래 있는 모든 인종들의 연대”를 보았다.
이 연대는 새로운, 다인종의, 그리고 계급에 기반한 가난한 이들의 운동이었다. 킹 목사는 말했다
전 단지 흑인들의 빈곤에만 관심을 두고 있진 않습니다.
전 가난한 백인들에 대해서도 관심하고 있습니다. 전 푸에르토 리코의 가난한 사람들과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린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에 맞설 것입니다.
연금 투쟁의 참가자들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운동은 수도로 가서 그들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도시를 점령할 계획이었다.
연금투쟁에 의한 변화들이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사실이나, 그 변화들은 상대적으로 한정된 이들에게만 관심했다. 가난한 이들의 운동은 모든 인종, 지역, 민족들의 참여와 지지를 추구했기에, 대중적 참여를 이끌어낼 힘과 가능성이 보다 높았다. 이런 이유에서, 가난한 이들의 운동은 연금투쟁보다 더 많은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운동은 미국의 정치, 경제 엘리트들에겐 심각한 문젯거리가 될 거라 예상했다.
킹 목사의 지지와 함께, 이 운동은 수천만 명에 이르는 미국인들의 관심을 이끌어 냈고, 미국 역사상 최대의 대중 집회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만약 이 운동이 워싱턴에서 있었던 연금투쟁에 대한 기억들을 다시 소생시킨다면, 그 도덕적 권위와 미국의 정치, 경제를 변화시킬 수많은 대중들의 영향력이 미국 정부를 급진적으로 변화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막대한 비용과 기회를 산업에 투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 성공적인 운동이 자본가들에게는 악몽을 회상시키는 방식으로, 힘없는 대중에게 힘을 부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킹 목사는 그의 여정에서 자본주의가 계급 불평등을 낳는 걸 목도하며, 이를 고발했다. 수많은 엘리트 권력가들은 킹 목사의 이런 여정이 지나치게 선동적이라고 평했다. 킹 목사가 한 청중에게 말했다
지금 우리는 계급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린 가진 자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 사이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킹 목사는 뉴욕 타임즈 기자에게 말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충분히 계급투쟁에 연루되어 있다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킹 목사는 이렇게 연설했다
매우 급진적인 경제, 정치권력의 분배 없이는 우리의 문제 또한 해결될 수 없습니다.
킹 목사는 더 이상 시민권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구조적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었고, 구조적 혁명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개혁운동과 혁명운동의 위대한 차이를 바로 이곳에서 목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킹 목사는 혁명적 운동, 혁명적 행동을 지지하고 있단 사실을 분명히 했다. “사회 전반에 아주 명확한 그리고,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집니다.. 그것은 혁명의 가치입니다.” 킹 목사는 인종 문제로 그를 찾은 사람들에게 이런 그의 입장을 밝혔다. 킹 목사에게 혁명의 의미란, 그가 여러 번 언급했듯이 “미국민의 삶의 구조 전체가 변하는 것” 이었다.
끝으로 킹 목사는 스텝들에게 말했다
정의로운 통치를 선포할 의지가 없는 권력에 억지로 머리를 숙이기보다, 이제 정부의 선의에 기대지 않는 새로운 전략으로 우리의 투쟁을 이어 갈 때 가 되었습니다.
킹 목사는 “공격적 비폭력주의”에 대해 말한다. “우린 부탁하기 위해 워싱턴에 가는 게 아닙니다. 우린 워싱턴에 우리의 몫을 요구하러 가는 것입니다.” 킹 목사는 “비폭력 사보타주”에 관여할 것을 암시했다. “우리의 투쟁은 온전한 평등을 위함이요, 그것은 바로 경제적 평등입니다.” 계급적 본질을 건드리는 이 운동이 지향하는 바는 미국 자본가들에겐 매우 막강한, 잠재적, 국내적 위험이었다.
연금투쟁은 궁극적인 변화들을 가져왔는데, 뉴딜 정책을 통한 부의 재분배로 미국의 사회적 관점을 뒤바꿔 놓았다. 그러나 불편한 사실은, 그러한 변화들이 자본주의에 위협이 되진 않았다. 하지만 킹 목사가 추구했던 사회 변화와 경제 민주주의는, 만약 그것이 성공한다면 자본가의 수익과 특권들이 큰 폭으로 제한될 수 있었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이 거대한 위협을 멈추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운동이 실행되고, 이 운동이 성과를 거두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킹 목사는 암살되기 전, 범 도시적 투쟁을 위해 농성 중이던 맴피스의 위성설비 노동자들을 불렀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의 운동이란 이름으로 모인 이 국가적 투쟁은 정치가들과 CEO들의 불안과 걱정을 야기했다. 이런 불안과 걱정은 정계와 재계 양쪽 모두를 극도로 위압했다. 한때 미국을 뒤덮었던 비노조 대중운동으로 도시 전체가 마비되고, 수백만 달러의 사업 투자비를 잃은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운동에 대한 극심한 공포는 “침묵을 깰 때다”라는 킹 목사의 베트남 반전 고백으로 더욱 고조되었다. 이 연설에서 킹 목사는 전쟁과 미국의 광범위한 빈곤은 자본가들의 탐욕과 착취가 낳은 비극적 결과라고 강조했다. 킹 목사는 “서부의 자본가들은 막대한 돈을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에 투자합니다”고 말하고는, “그렇게 이윤을 챙기고는 그 나라들의 사회 개선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라며 비판했다. 킹 목사는 자본주의 사회 심장부에 직설적이고 강력한 비판을 날린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양산하는 구조는 허물고 다시 세워야 합니다.” 킹 목사가 함께 한 가난한 사람들의 운동은 자본가들이 원했던 경제 체제와 전쟁을 통한 그들의 수익 구조 양쪽 모두에 위협을 주었다.
이라크 전쟁에 헬리버튼 그룹이 연계되어 있었던 것처럼, 미국의 수많은 기업들이 베트남 전쟁을 통해 수십억 달러의 이윤을 챙겼다. 베트남 전쟁은 1968까지 매해 200억에서 250억 달러의 미국 재정을 소모시켰다. 하지만, 거대 기업들은 막대한 이윤을 얻었다. 가령, 1966년 베트남 전쟁을 수행한 미국의 가장 큰 기업 네 곳 중 세 곳은 해외 사업을 진행하고 있던 400개의 미국 기업 중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린 기업 상위 10 안에 들어갔다. 캐터필러 그룹은 연례보고에서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사업들이 큰 기여를 했다고 기록 보고를 했다.
기업 자본가들과 엘리트 은행원들과 변호사들은 전쟁을 경제적 투자, 새로운 생산시장이란 말로 이해한다. 베트남이 바로 그런 경우인데, 린든 존슨 대통령의 해외 정책 참모들의 명단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이 명단엔, 몇 명의 막강한 법조인들과 미국의 기업 대표들이 포함되어 있다. 제너럴 모터스와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듀폰 가문, 월가의 막강한 법조인들로 추측되는 의 유명 로펌 대표들, 전설적인 존 J. 머클로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존슨의 임명을 받은 이들은 대통령과, 거대 은행의 중역들 그리고 거대 기업들의 이사진들로 하여금 전쟁을 위해 공적 지원을 받도록 촉구했다. 가장 영향력 있던 존슨의 참모는 기업 법조인으로 리먼 브라더스와 친밀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리먼 브라더스는 가장 강력한 투자은행 중 하나였고, 그들의 “명예로운 파트너”로 여겨졌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의 운동이 제시할, 마틴 루터 킹의 베트남 반전과 반자본주의적 복지 선언 정책기조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누설되었을 때, 경제적, 정치적 현상유지를 위해 투자를 했던 투자자들에겐 마틴 루터 킹은 위협적인 존재였다. 캠페인을 기획하거나 지도한 누구도 킹 목사만큼 영향력이 있거나 급진적이진 않았다. 살제로, 제스 젝슨, 앤드류 영과 같은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심각하게 걱정했다. 킹 목사와 함께한 가난한 사람들의 운동은 분명 거대한 항쟁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마틴 루터 킹은 이 운동을 준비했기 때문에 암살을 당한 것인가?
킹 목사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에 대해선 무수한 질문들이 남아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은 킹 목사의 죽음이 이미 알려진 혹은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음모의 결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70명 이상의 증인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1999년 12월, 한 레스토랑의 주인이 살인 현장과 가까이서 킹 목사의 살인을 계획한 공모현 장을 목격했고, 테네시 쉘비의 한 다인종 배심원이 이름을 알 수 없는 “정보 요원들”과 킹 목사의 암살을 공모했다고 결론 내려진다. 2000년 6월 미 법무부의 보고서는 흠결 투성이에 사실관계에 있어 오류 투성이인 평결들을 재검토했다. 법무부는 현재 새로운 확증이 발견되지 않는 한은 더 이상의 수사는 없다며 끝맺었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의 가족은 킹 목사가 알 수 없는 사람들의 공모에 의한 피해자라고 하는 걸 여전히 의심하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전히 많은 질문들이 의문으로 밝혀지지 않은 체로 남아있다.
아마 대중들은 킹 목사의 죽음이 정말 공모자들에 의한 음모 때문인지, 가난한 사람들의 운동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알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마틴 루터 킹이 실천했던 급진적 경제운동이 가져올 영향력을 잘 알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운동의 성공적 지도자로서, 정치 경제의 구조적 변화를 요구하고, 연방정부와 막대한 자본을 지닌 자본가 계급을 위협하는 운동의 두려움을.
1967년 4월 킹 목사의 베트남 반전 연설이 죽음의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전 분야에 걸친 미국의 경제 민주화를 향한 그의 결심이 죽음의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불의한 현재를 유지하고자 한 공모자들이 그를 처형한 것이라는 결론도 그럴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