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출발해 겨울에 도착하다
오클랜드 공항은 겨울 초입의 서늘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반팔 차림으로 출발했던 나는 비행기 문이 열리자 마자 공기의 결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주섬주섬 패딩을 꺼내 입으며 느릿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따라 입국심사대로 향했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 속에서 산만하게 안내판을 살피며 걷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차례를 기다리며 잠시 멈춰섰을 때, 주변에 스며들어 있는 낯선 냄새를 맡기도 했다.
부리나케 자동 출입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하지만 심사대를 막 나서는 순간 입국 도장을 실물로 남기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낯선 환경에 한 눈을 팔다 편의와 낭만을 맞바꾼 그 허전한 느낌을 나는 아직도 가끔 떠올린다.
시내로 향하는 우버를 호출했다. 이동하는 동안 기사님은 왜 뉴질랜드에 온 것인지, 얼마나 머무르며 무엇을 볼 예정인지 물으셨다. 현지인에겐 다소 어설프게 들렸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름 포부 가득한 여행 계획을 늘어놓으니 그제서야 내가 뉴질랜드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모니터 너머로 보던 것들이 눈 앞에 펼쳐질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매일 늦은 밤까지 일하던 나는 미래의 내가 이렇게나 후련한 기분으로 먼 곳에 날아와 있을 줄 몰랐겠지 싶어 한숨 섞인 웃음을 흘린 것도 같다.
오전 열한시. 기사님이 추천해 주시는 식당들을 구글맵에 바쁘게 저장하며 브리토마트에 도착했다. 도착 당일에는 이렇다 할 일정이 없었기 때문에 숙소에 짐을 맡기고 근처를 둘러보기로 했다. 스파크 아레나 근처에서 출발해 바다가 시원하게 보이는 키 스트리트를 따라 걸었다. 바이아덕트 하버로 향하는 길, 높고 커다란 무채색 빌딩과 푸른 바다 사이에서 햇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페리 터미널이 인상적이었다.
프린스 와프에 다다르니 크고 작은 요트들이 잔잔한 물결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바닷바람에서 느껴지는 소금기와 돛대를 고정하는 복잡한 밧줄들에 잠시 감각을 빼앗겼다.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바다로 나아갔을까. 불과 하루 전 비행기에 오르던 내 마음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도착 직후여서인지 아직 낯설고 묘한 들뜸이 남아 있었다. 제대로 된 식사보다는 어디든 앉아 차가운 맥주부터 한 잔 들이키고 싶었다. 근처 레스토랑에 물으니 음료만 마시는 것도 괜찮다고 했다. 테라스 한 쪽에 자리를 잡고 맥주잔을 앞에 둔 채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무사 도착을 알리며 느긋한 오전 시간을 보냈다.
한참을 한량처럼 노닥거리다 찾아 들어온 식당, The Shuker Brothers. 이 곳의 시그니처는 굴 요리라고 들었지만 뉴질랜드는 초록입홍합이 유명하다고 해서 이번엔 홍합 요리를 골랐다. 조개류 특유의 비린 향도 거의 느껴지지 않아 모든 접시를 말끔히 비웠다. 비행 중에도 식사며 간식을 꽤 챙겨 먹었지만 역시나 이제 갓 조리된 따뜻한 음식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테라스 자리에는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와인과 그라브락스로 마무리한 첫 식사도 아주 든든했다. 긴 비행으로 피로가 가득했지만 여유로운 식사 덕에 몸도 마음도 느슨해졌다. 낯선 공기에 예민했던 신경도 이 즈음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 했다.
다음 날 일정이 있어 저녁은 숙소에서 간단히 해결하기로 했다. 근처 카운트다운에 들러 끼니거리를 고르며 천천히 매장을 한 바퀴 돌았다. 새로운 여행지의 마트는 언제나 흥미롭다. 이 날은 특히 매대를 가득 채운 와인과 샴페인 코너가 인상적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조금 정리하고 나니 금세 피로가 몰려왔다. 창문 너머로 멀리서 들려오는 차 소리가 묘하게 편안해서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깊이 잠들었다. 설렘과 낯섦이 교차했던 뉴질랜드의 첫 날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둘째 날 아침, 나는 어린 시절부터 마음에 그려왔던 장소로 떠나기로 했다. 오랜 시간 스크린 속에서만 봐 왔던 풍경이 이제는 현실이 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