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밝은 미래

Bright Future, アカルイミライ, 2003, 구로사와 기요시 


늑대는 무리다, - A


<밝은 미래>는 도쿄 지하와 지상 전역에 깔린 발광하는 해파리의 등장 자체로 해파리 떼로 인해 환해진, 밝아진 도시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2000년대 초반 작품, <밝은 미래>는 그의 작품 대부분이 계보에서 의미를 짐작할 수 없이 흘러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꽤나 당혹스럽게 느껴진다. 1975년부터 2021년까지 이어진 그의 영화 필모그래피의 중간 지대에 위치한 <밝은 미래>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미래는 무엇일까?

영화는 홀로 오락실에서 목표물을 총으로 쏴 그것을 구멍에 넣으면 승리하는 게임을 하는 니무라 유지(오다기리 죠)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유지는 꿈에서 희망과 평화의 밝은 미래를 꿈꾸기에 꿈꾸는 것을 즐겨한다. 최근까지. 이 미래의 불안을 암시하는 오프닝 쇼트는 영화의 초중반 다시 한번 반복된다. 유지는 자신보다 세 살 위인 아리타 마모루(아사노 타다노부)와 함께 물수건 세탁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유지는 마모루의 아파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그와 친밀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들이 일하는 공장의 사장이 그들 사이에 불편하게 침입하기 시작한다. 그들에게 승진을 권한다거나, 갑자기 아파트에 초밥을 가지고 찾아온다거나, 보너스를 준다거나 하는 사장의 아첨에도 가까운 (불)친절함은 유지의 불안정함을 계속해서 자극한다. 그런 유지에게 마모루는 그가 독성을 지닌 붉은 해파리가 담수에 적응할 수 있도록 길들이듯 마모루의 손가락이 그의 가슴을 가리키면 기다리라는 신호를, 바깥을 가리키면 가라는 신호를 가르친다. 내내 유지에게 기다리는 법을 가르쳤던 마모루는 사장이 그의 딸의 책상을 집으로 옮겨달라는 요구를 들어주고 난 뒤 다 함께 저녁을 먹고 집 바깥으로 나온 후 집을 돌아보며 말한다. “폭풍이 올 거야. 직감이야.” 이 쇼트 이후 오프닝 쇼트가 다시 등장하고, 최근까지 유지가 꾸던 밝은 미래의 꿈은 폭풍을 예견한 마모루가 스스로 폭풍의 핵이 되어 사장을 살해하면서 아무도 없는 어둠 속을 걷는 꿈으로 뒤바뀐다. 

마모루는 죽음 이후 올 신체의 강직에 단단히 대비하듯 손을 GO라는 신호로 동여매고 자신의 사형을 집행한다. 마모루의 죽음 이후, 유지에게는 마모루의 가라는 신호와 그의 해파리 그리고 5년 동안 마모루와 교류 없던 그의 아버지가 그의 몫으로 남겨진다.

마모루의 아버지는 구로사와의 전작들 <큐어>와 <카리스마>에서 의미를 잃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다시금 세상의 질서를 주입하는 마미야 혹은 야부이케와는 비슷하나 다르게 등장하는데, 그는 정말로 선량하여 아버지답게 유지를 갱생시킨다. <큐어>의 마미야가 “너는 누구야”라는 마인드컨트롤로 연쇄살인을 유발하고, <카리스마>의 인질범 야부이케가 “세상의 법칙을 회복하라”고 요구했듯, <밝은 미래>에서 마모루의 아버지인 아리타 신이치로는 유지를 “다시 시작할게요.”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마모루의 아버지는 정작 자신의 아들들에게는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지는 못했다. 마모루의 아버지가 마모루의 동생을 찾아갔을 때, 그는 아버지에게 책임을 질 수 없다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 같은 건 하지 말라며 카페의 이중(앞뒤)의 문을 통해 사라진다. 이 쇼트 이후 유지와 마모루가 교도소에서 철창을 사이에 두고 한 프레임 내에서 대화하는 쇼트가 이어지는데, 이 쇼트는 마모루와 마모루의 아버지가 같은 공간에서 정방향 쇼트와 정방향 쇼트, 심지어는 마모루가 철창 너머 공간의 정가운데 위치한 의자에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이러한 아버지와의 단절은 특히 마모루의 아버지가 몰고 다니는 트럭에서 공간을 분절하는 방식, 하나의 공간을 두 개의 작은 프레임으로 의도적으로 조각내어 시공간을 공간화시켜 누군가의 있음과 없음을 대비적으로 드러나게 한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트럭 장면이나 교도소 장면에서 단절된 아버지와 같은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관계가 유지로 하여금 다시 연결되는, 마치 해파리 떼가 담수에 적응한 것처럼 보이는 이 순간, 구로사와는 담수에서도 살 수 있는 해파리가 다시 바다로 나가는 것처럼 완전히 다른 탈출구를 선택한다. 

어항에 갇혀 있던 한 마리의 해파리는 더럽고 검은 물을 시작으로 강을 가로질러 넓은 바다로 떼를 이뤄 대이동 한다. 이 발광하는 해파리 떼는 유지와 회사를 급습한 우스꽝스러운 발광하는 헤드셋을 쓴 고등학생들과 대응한다.

그들은 무리이고, 그들은 예닐곱의 무리다. 무리가 예닐곱의 늑대인 것처럼 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프로이트가 ‘늑대 인간’ 일화에서 늑대가 무리성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을 분석하며 늑대 무리에 관해 이야기한다. 프로이트의 늑대인간이 아버지라는 과거로의 회귀라면, 들뢰즈와 가타리의 늑대는 뱀파이어와 같은 흡혈의 계보, 즉 감염과도 같다. 이것은 번져나간다. <큐어>에서도 그러했듯 말이다. 군중이 중심과의 동일화를 의미한다면, 무리는 주변부라는 다양체이다. 늑대 무리는 하나의 무리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운 욕망을 증식시킨다. 그래서 이 영화는 유지가 아니라 유지와의 무용한 하룻밤을 기억하는 예닐곱의 아이들에게서 끝이 나는 것이다. 

해파리가 떠난 도시에 복수의 욕망이 잠재하고 있다. 앞으로 향하는 해파리의 몸짓이 움츠려졌다가 펴지는 몸짓인 것처럼, 이들은 앞을 향해 전진하지만 그보다는 펼쳐지는 것, 즉 번져나가는 것이다. 




붉은 해파리 한 마리와 수조, 
그리고 해파리 떼 - 서너시


공장 한편에서 주인공 니무라가 눈을 붙이고 있다. 그의 왼편엔 큰 박스더미 두 개가 있고, 그 앞으로 작은 박스 하나가 혼자 떨어져 나와 있다. 니무라의 오른쪽 너머에는 공장 노동자 두 명이 함께 앉아있다. 이 장면에서 니무라는 홀로 떨어져 나온 작은 박스 하나와 대칭을 이룬다. 영화 전반에 걸쳐 니무라는 어딘가 고독해 보이고, 무기력하며, 미스테리하다. 관객이 니무라의 행동과 감정선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만큼이나 그 자신도 삶에 대한 모든 통제권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니무라는 어디로 가야 할지, 갈 수는 있을 것인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이런 그를 이끄는 것은 초현실적이지만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가 확인해주듯 환상은 아닌, 현실적 존재로서의 해파리다.

지나치게 단순하고 간단한 대입일 수는 있겠지만, ‘청년 영화’로서 <밝은 미래>의 수조 속 해파리 한 마리가 은유하는 바는 각자 고립된 채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청년(세대)에 관한 어떤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장 부부를 살해한 마모루나 감정 조절을 잘하지 못하는 니무라는 다른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영화에 등장하는 독성 해파리와 유사하다. 니무라는 고작 도시락에 들어간 치킨 조각이 작다는 이유로 식당에서 난동을 부린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해파리는 니무라가 주는 먹이를 먹지 않는다. 니무라가 해파리를 만지려 하자 마모루는 해파리가 독을 갖고 있다며 주의를 준다. 먹이를 거부하는 독성 해파리-인간의 모습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후 사장이 마모루의 집에 방문해 해파리 수조에 손을 넣었을 때 마모루는 해파리가 사장을 공격하게끔 방치하고, 이것이 실패하자 직접 살인을 저지른다. 이때 마모루의 살인은 해파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수조(삶)를 휘젓는 손을 향한 공격이다. 마모루의 붉은해파리는 이런 식으로 두 청년의 모습과 겹쳐진다.

그렇다면 니무라가 해파리에 이끌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동질감? 무엇이든 간에 마모루의 붉은해파리가 니무라보다 먼저 수조 밖으로 '감'으로써 니무라를 추동하는 것은 분명하다. 니무라에게 해파리는 매혹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향한 신호에 가깝다. 한 마리의 붉은해파리는 니무라와 마모루 세대를 상징하는 어떤 것이면서, 그 세대에게 "가라"는 신호를 보내는 한 발 앞선 선발대 같은 것이기도 한 것이다. 빛을 내며 움직이는 해파리는 그들에게 '밝은 미래'와 같다. 만약 해파리가 니무라, 마모루와는 달리 떼를 이루게 되면 그보다 더 '미래'의 것이 된다.

해파리는 수조 안에서 수조 밖으로, 집 바닥 밑에서 집 밖으로, 도쿄에서 도쿄 밖 바다로 이동한다. 이 이동에서 니무라는 수조 밖에서도 생존하는 해파리의 모습을, 그리고 갇힌 채 제자리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닌 이동의 움직임을 본다. 어딘가에 갇혀있고, "가야 한다"는 감각이 니무라를 지배한다. 마모루는 감옥에 갇힌 채 죽는다. 그러나 해파리와 니무라는 어디론가 간다. 탈출과 이동은 해방이나 자유의 차원보다는 생존의 문제와 연결된다. 살아남기 위해서 "가라". 다소 강박적인 이 신호는 도쿄를 벗어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어떤 압박감으로도 읽힌다.

니무라와 달리 이전 세대의 인물들은 해파리보다는 수조 쪽에 가깝다. 마모루에게 살해당하는 사장은 전형적인 옛 세대의 인물로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정상 가족'을 이루고 있다. 그는 수조 속에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가정, 공장, 국가까지. 사장은 해파리 청년에게 정사원이 될 것을, 함께 국가대표를 응원할 것을 제안한다. "일본! 짝짝짝". 가족 식사 후 혼자 계단을 올라가던 사장의 딸은 사장 부부가 살해당한 뒤 그 수조를 벗어난다.

마모루의 아버지 아리타씨는 사장과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그는 이혼했고 자식들과 사이도 좋지 않으며 혼자 중고 기계를 수리하는 일을 한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수조다. 그는 니무라가 자신의 곁에서 일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고 끝내는 니무라를 양자로 입양하려 한다. 해파리 떼가 바다로 향하는 장면에서 아리타는 그 광경을 보고 처음엔 즐거워하지만, 곧 해파리 떼가 자신이 있는 곳을 떠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도쿄탈출"하는 해파리를 손으로 잡으려다 독에 쏘인다. 아리타가 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살만한 수조를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일종의 수조 수리공으로서 그는 이미 한번 박살 난 가정이라는 수조를 니무라를 받아들이고 애정을 줌으로써 고쳐보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니무라에게든 마모루에게든 실패하고, 아리타가 수리하는 고장 난 중고품들처럼 무가치한 일이 된다.

영화는 거리를 걷는 불량 학생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난다. <밝은 미래>에서 무리를 이루는 인간 집단은 이 학생들이 유일하기 때문에 도쿄를 벗어나 바다로 향하는 해파리 떼와 이들을 연결 짓기란 어렵지 않다. 한 마리의 붉은해파리가 아닌 해파리 떼. 마모루와 니무라의 다음 세대로서 이들은 일본의 '밝은 미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들이 보여주는 미래란 박스를 걷어차는 것이다. 여기에 밝은 미래는 없다. 자신을 가두는 어떤 것으로부터 벗어나 "가라"는 신호(혹은 명령)와 기계적 위반만 남아 떠돌 뿐이다.




(해)가 뜨고 (파)도가 치는 곳으로, 
(이)만 가자 - 난둘


폭염으로 컬럼비아 강의 연어가 죽어가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지구온난화 현상과 더불어, 인근에 댐이 조성된 탓에 강물 흐름이 느려지고 수온이 높아졌다고 한다. 산란을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는 어떻게든 경로를 변경해 가며 살아가야 한다. 연어는 자신의 숙명을 인간이 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연어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지구온난화와 댐과 같은 포획 틀에 갇혀, 원망할 대상조차 찾아낼 수 없는 연어의 현실. 연어와 같은 해양 생물이 처한 상황은 더욱더 슬프다. 2021년의 폭염으로 10억 마리 이상의 해양 생물이 폐부 했다고 한다. 1 이렇게 최악의 상황을 조장해 놓고는 에어컨이라는 탈출구에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어떻게든 생물들이 살아남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면서 이러한 지옥에서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 또한 인간의 또 다른 포획 틀 만들기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다행히도 <밝은 미래>에 등장하는 해파리는 민물에 적응했다. 자신의 실수로 밀물에 쓸려 가버린 해파리를 방치했던 니무라(오다기리 죠)가 보기에, 해파리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니무라에게 해파리의 움직임은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절박함으로 보였을까. 그는 적극적으로 플랑크톤을 부화시켜 해파리에게 먹이로 준다. 이때 니무라는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얕디얕은 의지를 해파리에게 투사하기로 한 것 같다. 해파리가 계속해서 민물에서 살아남는 모습을 보며, 니무라는 해파리에게서 삶의 동력을 얻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니무라는 유령이 된 마모루(아사노 타다노부)의 방해로 플랑크톤 부화가 실패하자, 모든 삶의 의지를 상실했단 듯이 잠적해 버린다.

비록 먹이를 공급받지 못했지만, 해파리는 자가증식해 도쿄 한복판에 등장한다. 그렇다면 해파리는 니무라의 약한 의지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해파리는 그저 산 것이다. 낯선 장소에서 외롭지 않도록 자가증식까지 마친 해파리들은 바다로 간다. 바다가 그들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운명으로 회귀하기 위해 끝까지 살아남는 것. 인간에게는 큰 결심이 필요한 과정을 해파리는 그저 수행한다.

마모루는 니무라가 깨닫기를 바랐을 것이다. 적응과 운명의 차이. 따르는 것과 가는 것의 차이. 해야 하는 것과 할 수밖에 없는 것의 차이. 마모루가 보기에, 가는 것은 기다림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는 공생을 전제로 가능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게, <밝은 미래> 속 인간들은 자연과 타인을 침범하며 증식해 왔단 것을 잊어버린 듯 군다. 그들은 모든 것을 계층화하는 올가미를 쳐 놓고는, 그것의 틈새에 머무는 모든 것을 없애고자 한다. 그래서 인간은 도쿄에 출몰한 해파리 떼를 해파리의 독성을 이유로 없앤다. 사장은 갑자기 마모루의 집에 놀러 와 스스로 해파리 어항에 손을 집어넣어 놓고는, 그걸 말리지 않았단 이유로 마모루를 해고한다. <밝은 미래>에서 공생은 불가능하고, 밝은 미래는 영화 너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마모루는 사장 가족을 죽인 후 자신 또한 죽이는 것을 택했고, 그것을 깨달은 니무라는 영화 너머로 사라지기를 택했다. 해파리가 바다로 간 것처럼, 마모루와 니무라도 해가 뜨고 파도가 친 곳으로 이만 떠난 것이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밝은 미래>는 막연한 밝은 미래를 미래에 펼쳐질 운명처럼 여긴다. 니무라와 헤드셋으로 소통하던 불량 청년들은 헤드셋을 집어던지고 체 게바라 티를 입었다. 그들은 어디론가 간다. 엔딩크레딧이 오르며 화면이 서서히 밝아진다. 사라진 니무라와 뜬금없는 체 게바라의 등장이 다소 엉성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영화는 이렇게 마무리될 수밖에 없다. 해파리는 자신의 운명이 바다인 것을 알지만,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점칠 수 없는 인간의 미래는 엔딩 크레딧처럼 밝아야 한다. 골동품이 쓸모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골동품을 고치며 살아가는 마모루의 아버지처럼, 밝은 미래 따위는 알지 못한 채 사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지만, 우리는 그러한 운명을 벗어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밝은 미래는 없기에 밝은 미래는 존재한다.

2021년으로 거슬러 올라온다. 다른 생물을 위해 죽음을 맞이해야 할 생물은 인간인 걸 알면서도 쉽게 죽지 못하는 인간에게, 인간이 끔찍하게 싫으면서도 어떻게든 인간과 그 외 생물이 공생하기를 바라는 모순적인 인간에게.

막연하고 엉성한 믿음만이 우리의 운명이다.

1) 곰팡이 핀 몸으로 강 거스른다···폭염에 살갗 터진 연어 떼 '충격', 중앙일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