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ng of the Exile, 客途秋恨, 1990, 허안화
시간 안팎의 기록자들 - 난둘
허우옌이 아이코의 역사에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또한 어머니와 유사한 궤적을 걸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인 아이코는 전쟁이라는 굴곡진 역사로 인해 일본에서 만주로 간다. 그다음 중국군을 사랑하게 된 대가 혹은 필연적 삶의 굴곡 덕택에 만주에서 마카오로, 마카오에서 광저우로, 광저우에서 홍콩으로 휩쓸리듯 가게 된다. 아마도 본인을 (홍콩인이 아닌) 중국인이라 정체화했을 허우옌은 학업 때문에 광저우에서 홍콩으로, (광저우의 시부모가 아이코에게 그랬듯) 자신을 배타하는 아이코 때문에 홍콩에서 영국으로 간다. 허우옌은 자신을 배태한 가족 때문에 발생한 배타를 표류로 견뎌왔고, 아이코는 새로이 편입한 가족의 배타 때문에 발생한 표류를 견뎌왔다. 그러다 정말로 ‘혼자’가 된 아이코는 가족 구성원의 소속감을 강화해 허우옌과의 간극을 좁히고자 하고, 허우옌은 그것을 자꾸만 거부한다.
역설적으로 서로에게 발생한 간극이 서로를 닮게 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해 생기는 불안감과 종속으로의 거부. 아이코는 남편과 사별하고 둘째 딸은 결혼해 자신의 곁을 떠났다. 아이코는 그저 그런 과부로 남고 싶지 않다. 허우옌은 가족이 살고 있는 홍콩으로의 귀환을 꺼렸다. 허우옌은 낯선 서양의 동양인으로 남아있고 싶지 않다. 아이코는 이를 남들보다 나은 삶을 산다는 주술 같은 다짐으로 해결하고자 했고, 허우옌은 영국 방송국 취업으로 대체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객도추한>이 제시한 것은 ‘客途秋恨’. 여행길에 올라 가을의 한을 푸는 것이었다. 이제 허우옌은 일본에서 아이코의 궤적을 밟아나간다. 일본어를 알아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허우옌은 그곳에서 중국에 도착했을 당시 아이코의 상황을 이해한다. 그러나 허우옌은 아이코와 똑같은 길을 밟아가진 못한다. 서로에게 전제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허우옌은 아이코와 달리 언제든지 낯섦을 거부할 수 있다. 그래서 허우옌은 자전거를 타다 길을 잃게 된다. 허우옌이 길을 잃어야 아이코에게 닥쳤던 가을의 한을 이해할 수 있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경우에, 특히나 허우옌처럼 15살이 되도록 자신의 어머니가 일본인인지도 몰랐거나 ‘시간 안팎의 기록자들’1의 시간을 깨달아야 하는 경우에, 일종의 체험을 통한 번역의 경험이 필요한 것이다.
허우옌은 어딘지 모를 숲길을 떠돌다 작은 마당이 있는 집을 발견한다. 그는 마당에 열린 토마토를 아무렇지 않게 따먹는다. 작은 궁금증. 아무도 없는 집이라고 생각해 토마토를 따 먹었을까? 갑자기 집주인이 등장해 허우옌에게 마구 소리친다. 토마토를 따 먹지 말라고. 일본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허우옌은 도망친다. 상당히 긴박해서 웃기다. 남의 집 토마토를 따 먹을 담력의 소유자가 이렇게 다급히 도망친다고? 자전거를 타고 도망치다 넘어져 자전거를 버리고 도망간다. 허우옌이 일본 사람인 줄 알았던 집주인은 불량스러운 말투와 표정으로 허우옌을 쫓는다. 허우옌은 결국 붙잡혔다. 그런데 집주인이 토마토를 먹으려던 허우옌을 쫓아갔던 이유는 토마토에 농약을 잔뜩 쳐놨기 때문이었다. 물론 허우옌은 이를 알아듣지 못한다. 집주인은 괄괄하게 소리치다 허우옌이 외국인인 것을 알자 금세 친절해진다. 그리곤 마을 사람들을 모두 모아 허우옌을 집에 데려다준다. 조금은 김 빠지고 조금은 따스한 마무리.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허우옌을 두고 나누는 대화에는 “중국인인가?” “중국인이 여길 왜 와?”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만약 허우옌이 마을 사람들에게 영어로 말하지 않고 중국어로 말했다면, 그들이 이만큼의 친절을 보여주었을지 질문하도록 한다. 물론 허우옌은 그들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소통의 실패가 <객도추한>에서 중요하다. 허우옌은 마을 사람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그들에게서 드러나는 중국인 배척을 깨닫지 못했지만, 낯선 이에게 보여주는 마을 사람들의 따스함을 느꼈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작은 마을에서 다른 추억거리를 하나 적립했을 뿐이지만, 허우옌에게 낯섦의 따뜻함이란 경험을 선사했다.
타인의 궤적을 침범하고, 타인이 나의 궤적을 침범하며 발생하는 격차와 혼동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끊임없는 말걸기와 대화가 필요하다. 허우옌의 영어를 알아듣기 위해 영어 선생님을 찾아간 마을 사람들처럼. <객도추한>은 찰나의 경험으로 허우옌에게 필연적으로 아이코의 궤적을 번역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허우옌은 홍콩에 남아 뉴스를 만든다. 그는 살아가며 믿음과 불신을 반복하고, 세상에 순응하며 때론 반항할 것이다. 아이코 또한 남은 삶을 그렇게, 남은 한을 풀며 살아갈 것이다. <객도추한>의 암담하지만 희망찬 결말에 맞추어.
1) 부산현대미술관의 <시간 밖의 기록자들>(2019.09.11~2020.02.02) 전시 제목에서 따왔다.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그 안에서 존재하는- A
<객도추한>은 객의 영화다. 경적 소리를 시작으로, 런던 브릿지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는 허우옌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앞서가던 두 친구를 가로질러 선두에서 골목의 이곳저곳을 누비고, 경쾌한 리듬으로 이동하던 그들은 이내 중식당에 도착한다. 동양인 점원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런던에서 중국어로 허우옌에게 주문을 받고, 허우옌은 다시 점원에게 중국어로 대답한다. 허우옌과 친구들이 테이크아웃한 중국음식을 서투른 젓가락질로 먹고 있을 때, 허우옌은 그들 뒤에 버스킹하는 남자를 카메라로 찍기 시작한다. 그리고 허우옌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1937년, 여름. 내 인생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미래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내레이션. 73년 여름, 허우옌은 런던에서 홍콩으로 돌아오고, 영화는 허우옌 개인의 역사를 통과하는 마카오와 광저우, 벳푸와 만주를 방문하기 시작한다.
허우옌과 그의 친구들이 펍에 있다. 춤을 추는 사람들 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패닝하던 카메라가 즐거운 듯 웃는 허우옌 앞에서 멈춰 선다. 허우옌의 시점숏으로 클럽의 사람들이 보여지고, 허우옌의 표정은 즐거움에서 잠시 이탈하는 듯 보인다. 잠시 난처한, 잠시 과거가 스쳐 가는 듯한, 잠시 쓸쓸한, 어딘가로부터 떠나온 사람에게 비치곤 하는 그 얼굴의 표정을, 영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시 자전거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그들로 전환시킨다. 그러나 이때 영화의 오프닝씬에서 가장 앞에 위치하던 허우옌은 가장 마지막으로 전치되어 있다.
허우옌의 존재는 런던에서 가장 이해받는 듯 보이지만, 허우옌이 런던에 있을 때 그곳의 풍경은 분명히 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텅 빈 공간으로 포착된다. 허우옌이 홍콩에서 열리는 동생의 결혼식에 가지 않으려 했지만, 불현듯 홍콩에 가겠다고 결심했을 때, 영화는 허우옌의 시점숏을 통해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즉 부재의 쇼트를 제시한다. 텅 빈 도로와 텅 빈 기숙사의 풍경. 이어 허우옌이 홍콩으로 떠났을 때, 모든 이동의 과정은 그의 행동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생략되어, 텅 빈 허우옌의 방으로 보여진다. 허우옌이 머물렀던 공간들은 존재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부재 혹은 정지의 상태로 마치 사진 찍히듯 미라화된다.
이러한 쇼트의 분절을 통한 단절감은 영화의 후반부에 재등장한다. 이때의 장면은 런던의 것과는 다른데, 앞선 것이 정지에 가까운 분절이었다면, 이 장면에서는 분절의 분절, 즉 하나의 씬을 데쿠파주하기 때문이다. 허우옌의 어머니 아이코의 고향인 벳푸에서 홍콩으로 떠날때 길게 놓여진 기찻길은 아마도 허우옌이 서 있을 곳이라 짐작되는 곳을 기점으로 두개의 쇼트로 분할되어 연속된다. 그러나 또 이러한 기찻길은 허우옌과 아이코가 일본에 도착했을 때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영화에서 인물들의 지리적 이동이 잦은 만큼, 길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객도추한>의 전반부에 길은 없고, 도착지만이 존재할 때, 아이코의 고향으로 향하는 기차는 유일하게 길의 이미지, 파노라마의 이미지, 즉 연속의 이미지로 보여진다.
장소의 분절과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언어 역시도 분절되어 나타난다. 허우옌은 일본에 머무를 때, 영어를 사용한다. 일련의 영화들에서 언어로 인한 소통 불가능이 어느 정도의 몸짓으로 극복되는 것과 달리 <객도추한>에서 언어의 다름에서 오는 소통은 늘 실패하고 만다. 언어의 불일치는 그들이 항상 ‘객’이라는 처지와 동시에 번역을 통해 말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었는가 보다도 그들이 번역을 통해 내뱉는, 오역에 기반한 순수한 언어와 욕망에 더욱 관심을 기울인다.
영화에서 조부모-부모-자식 3세대를 관통하는 역사의 격변에서 끊임없이 이동(당)하는 인물들에게, 고향과 기원은 중요한 테마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고향은 지리학적인 것보다도 집이나 사람에 의해, 즉 기억에 의해 붙들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코가 고향에서 홍콩으로 다시 되돌아가려 했을 때는 살던 집과 사람이 없어지던 순간으로, 더 이상 벳푸는 고향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허우옌 역시 고향의 의미는 자신의 유년시절의 기억과 연결되어, 허우옌의 고향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함께 했던 기억의 한켠에서 오는 무상함으로 끝이 난다.
Song of the Exile - 서너시
밥 딜런의 <Mr. Tambourine Man>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허우옌의 모습이 나오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I'm not sleepy and there is no place I'm going to……." 영화의 영어 제목 ‘Song of the Exile’에서 짐작할 수 있듯, 디아스포라 영화로서 <객도추한>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은 이주와 이동의 가족사 혹은 가족 서사다. 일본, 중국, 마카오, 홍콩, 영국에 이르는 허우옌과 허우옌의 어머니 아이코의 이동은 중일전쟁, 홍콩 반부패 운동(염정공서), 문화 대혁명 등 20세기 동아시아사를 가로지른다.
주인공 허우옌은 영국에서 학위 과정을 마친 뒤 가족이 사는 홍콩으로 돌아가지 않고 영국 방송국에 취직하려 한다. 그런 허우옌에게 동생으로부터 청첩장이 날아온다. 허우옌은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취업 문제로 홍콩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갈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 아무도 없는 기숙사의 공간에서 허우옌이 동생과 통화를 하는 장면은 앞선 장면들과 비교하면 어딘가 다른 결을 지닌다. 유창하게 영어로 대화하고 다른 인종의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영국의 여러 장소에서 이질감 없이 섞여있던 허우옌은 여기서 홀로 있다. 창밖으로는 텅 빈 거리가, 안쪽으로는 사람이 있었던 흔적만 지저분하게 남아있을 뿐 아무도 없다. 영화는 통화를 하는 허우옌의 모습에 (그녀가 바라보는) 사람 없는 내/외부의 공간 쇼트를 삽입함으로써 안팎으로, 어디에서나 고독한 이방인의 정서가 틈입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국에서 대학을 나온' 허우옌과, 중일전쟁으로 일본에 대한 반감이 남아 있는 중국인 가정에 시집 온 일본인 아이코가 경험한 이주의 경험에는 큰 차이가 있다. 동생의 결혼식이 끝난 후 아이코는 허우옌과 다툼 끝에 함께 일본으로 떠난다. 그러나 그곳에 돌아온 자에 대한 환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코가 살던 고향 집은 곧 팔리게 되고, 카미카제 출신 남동생은 일본을 떠나 산 아이코를 비난한다. 그녀는 일본인이고 중국인과 결혼했지만 중국과 일본 어느 곳에도 그녀가 갈 곳은 없다. 홍콩에서 함께 살던 둘째 딸은 결혼해 캐나다로 이민을 가고, 첫째 딸 허우옌은 기껏 영국에서 돌아와서는 외국인과 결혼하고 영국에서 취업하겠다고 이야기한다.
허우옌은 같은 파마머리에, 비슷한 색 옷, '가족'으로서 공통된 무언가를 하도록 요구하는 아이코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코 역시 자신과 함께하려 하지 않는 허우옌을 이해할 수 없다. 두 사람의 간극은 층 구분을 통해 시각화된다. 한 사람은 위층에, 다른 사람은 아래층에 있다. 아이코가 마카오 집을 떠날 때, 홧김에 집에서 뛰쳐나간 아이코가 돌아와 창문에 서 있는 허우옌을 볼 때, 일본에서 외삼촌과 허우옌이 대화하며 위층에 있는 아이코를 볼 때, 그리고 영화 중반부 허우옌과 아이코가 함께 목욕을 하다 언쟁하며 허우옌이 일어날 때… 계속해서 모녀는 다른 층에 놓인 채 상대방을 바라본다.
허우옌이 아이코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일본에서 '이방인'으로서의 경험을 하게 되면 서다. 자전거를 타고 아이코의 집을 나선 허우옌은 길을 잃고 헤매다 어느 가정집 화단에 있는 토마토를 딴다. 집주인은 고함을 지르며 허우옌에게 다가오고, 허우옌은 깜짝 놀라 자전거를 타고 도주한다.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계속해서 쫓아오는 남자 때문에 허우옌은 겁에 질리지만, 사실 그 일본인은 토마토에 묻어 있는 농약 때문에 그녀가 걱정되어 따라오는 것이었다. 이 자전거 추격신은 허우옌이 호의조차도 호의로 이해할 수 없는 이방인으로서의 경험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학생 허우옌의 영화 초반부 자전거 장면과 대비된다. 소란에 모인 일본인들 사이에서 그녀는 아이코를 떠올린다. 정확히는 이방인으로서의 아이코를 생각하게 된다.
지역 축제가 열린 일본의 밤, 불꽃을 들고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과 춤을 추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있다. 허우옌과 아이코는 팔짱을 끼고 그 옆을 지나 사람 없는 거리로 걸어간다. 이전의 사람 없는 공간들처럼, 축제로 한산해진 이 거리도 그 땅에 섞이지 못한 이방인들의 공간 같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혼자 걷고 있지 않다. 걸음의 끝에 두 사람은 바닷가에서, 욕실에서,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비로소 같은 층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