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th by Hanging, 絞死刑, 1968, 오시마 나기사
실패한 기록, <교사형> - 난둘
전형적인 교육 프로그램의 진행 방식처럼 보이스 오버가 교사형 집행소의 구조와 사형 방식, 사형수의 마지막을 상세히 설명한다. 이때 핸드헬드 카메라는 마치 보이스 오버의 시선처럼 집행소의 구석구석을 굽어 살핀다. 그러나 사형수의 심장이 멈추지 않으며 시작되는 등장인물들의 연극적 대화는 핸드헬드 카메라를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으로 바꾼다. 이처럼 내부 사건의 국면 변화로 인한 형식의 변화는 마치 사형수 R이 스스로가 R임을 잊어 발생하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문제, 즉 재일한인의 정체성을 강제 형성하는 일본 국가주의의 모순, 일본의 조선인 재현 방식, 일본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재일한인에 관한 것으로 이어진다.
“R은 R이 아니다.” 사형소에 있는 모두는 이를 단순히 신체와 정신의 불일치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R이 R이 아니라면 또다시 사형을 집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상하게도 R의 영혼에 과잉 집착하는 그들은 R을 R로 만들기 위해 R이 저지른 강간살인사건을 그의 앞에서 재연한다. 이때 R은 R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건에 집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형집행관들이 그 사건을 재연하는 데 열중할 뿐이다.
그 재연에 쓰인 심문 기록을 R의 원본 진술을 번역한 것이라 한다면 R의 오리지널리티인 재일한인의 역사는 부재한다. <교사형>은 이를 지적하며 영화의 후반부에 조선 여인을 등장시킨다. 실재하지 않는 조선 여인을 사형집행관들은 처음에 볼 수 없었다가 그 여인의 등장을 ‘믿게 되면서’ 그녀를 볼 수 있다. 조선 여인은 식민국가로서의 조선인의 애환에 관해 R에게 말해주며, R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한다.
이때 사형집행관들이 조선 여인의 몸을 보며 탐욕적인 생각을 한 스스로를 반성하는 행위는 여성의 타자화 혹은 재일조선인의 타자화에 대한 성찰로 작용한다. 그러면서 심문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 재일조선인 R의 강간 살해의 궁극적 이유는 ‘재일조선인의 일본에 대한 증오’로 읽히게 된다.
하지만 여성을 강간살해한 사실에 재일조선인의 비천한 삶을 동기로 부여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R이 살인을 저지른 장소는 고정된 카메라로 찍혔다. 여기에서 의미작용의 문제는 남지 않아야 한다. 이 고정된 카메라에는 R의 강간살인이 사실로서 남아있다. 이때 R은 그가 실제로 행하는 강간살인 재현re-presentation을 통해 스스로를 R이라고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교사형>은 조선 여인을 등장시켜 재일조선인 R이라는 존재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재현을 실패로 귀결시킬 뿐 아니라 일본인 소녀 두 명을 타자화한다. R이라는 타자의 주체화에 의해 드러나는 또 다른 타자화는 R의 정체성이 결국 조선 여인의 언어로 의해 형성되었다는 것, 즉 R의 정체성에는 어딘가 모를 ‘이물감’이 있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조선 여인의 언어에는 일본인 소녀 두 명에 대한 고려가 들어있지 않다.
따라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 R의 몸뚱이가 사라지는 장면은 경계에 위치한 R의 상태를 사형집행관과 조선 여인 모두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사형집행관은 애초에 원본이 될 수 없는 R의 사건 기록에 집착적으로 오리지널리티를 부여하였고 조선 여인은 사적 영역을 복구하지 못한 R에게 재일조선이라는 공적 영역만을 강조해 국가 정체성에만 우위를 부여하였다. 결국 R은 타인들이 부과한 경계를 고려하지 않은 정체성을 받아들이기 실패하였기에 사형 집행 후 정신뿐 아니라 그 정신을 현시하는 신체마저 사라지게 된 것이다.
국가라는 허상의 이미지, 그리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영화의 허상에 관한 질문 - A
1958년 재일조선인 이진우의 강간살인사건인 ‘코마츠카와 사건’을 일본인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이야기하는 <교사형>은 이렇게 시작된다.
여러분은 사형폐지에 반대합니까, 찬성합니까. 1967년 6월 법무성 여론조사, 사형폐지 반대 71%, 찬성 16%, 모름 13%. 그런데 사형폐지를 반대한 71% 여러분. 여러분은 사형장을 본 적이 있습니까? 사형집행을 본 적이 있습니까? 사형장을 본 적이 있습니까?
말 그대로 사형장과 사형집행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는 구치소에서도 멀리 떨어진 사형장을 상공에서 점차 아래로, 그리고 내부로 들어가 건물의 구조부터 자재까지 자세히 카메라로 패닝하며 보여준다. 직접 그 내부를 보고, 과정을 목격한 뒤에는 아마도 국가가 개인에게 가장 큰 폭력과 권한을 휘두를 수 있는 사형이라는 제도의 덧없음을 관객으로 하여금 직시하게 만들고자 했던 이 영화의 매개는 일본 내부의 ‘이물’로 여겨진 재일조선인이다.
한 번의 사형집행 후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R은 깨어난 후에는 R이 아니다. R을 R로 만들어 사형을 집행해야만 하는 공직자들과 의무관 그리고 교회사는 R의 범행을 ‘재연’하며 R이 아닌 R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나간다. 그들이 범행을 재연하고자 할 때마다 비켜나가게 되는 R의 실제 삶은 R을 재일조선인으로서 ‘재현’하는 것마저도 실패해버린다. 그리고 영화는 R의 범행 동기는 ‘악’도 ‘욕정’도 아닌 그 무엇이라고 이야기한다.
사건의 실제 인물이었던 이진우는 1차 재판이 끝난 뒤, 자신의 범행이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진우는 자신의 범행을 라디오에 전화를 걸어 자백했고, 불우하고 가난한 삶을 살았던 이진우에게 재일조선인 지식인 내지는 일본의 지식인들은 부채감을 느꼈다. 재일조선인을 사형하는 문제가 내국인을 법 안에서 다루는 문제보다도 태평양 전쟁의 상흔과 국가폭력 그리고 민족과 국가라는 다양하고도 좀 잡을 수 없던 복잡한 문제를 불러일으킨 것처럼, 영화는 오프닝에서부터 일본 민중의 소리, 조선의 자장가, 김일성의 목소리처럼 쉽게 알아듣기 어려운 다양한 소음을 배경으로 한다. 다양한 소음을 배경으로 남자의 목소리는 카메라와 함께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함께 사형 집행장으로 들어온다. R이 정신과 육체의 분리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내야만 하고, 느닷없이 나타나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누나의 신체는 누군가에게는 보이고, 누군가에게는 보이지 않아 ‘여기 있음’을 증명해야만 하는 것과 달리 보이스-오버의 신체와 분리된 목소리는 이 사건을 서술할 권리로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집행장 내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위계를 갖는다. 그렇다면 이 신체 없는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인가?
주인 없는 권위자의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원고지에 직접 펜으로 눌러쓴 7개의 인터-타이틀은 ‘R은 R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라는 객관적 서술에서 시작해 ‘나는 누나를 좋아했다. … ’의 주관적 서술로 변화된다. 객관적 시점에서 ‘나’로 스며든 펜을 들어 글을 쓰는 손의 주인은 누구인가? 시점의 변화는 누나를 통해 민족의식을 갖추게 된 R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합치된 정신과 육체로 국가의 힘에 직접 ‘주체’로 저항하게 되는 변화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말미, R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사형을 당한 뒤 신체 없는 올가미만 남음으로써 집행장 바깥으로 사라지는 것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면, 영화에서 유일하게 집행당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벌거벗은 몸으로 일장기에 눕고, 한복을 입었으나 일본적 외양을 한 조선이라는 사라진 국가의 민족 의식을 고양하는 누나는 너무도 쉽게 집행당한다. 이러한 영화의 구조가 체제 안에서의 폭력과 도발이 저항이라 생각했던 60년대 일본의 학생 운동 혹은 68년 지식인의 흔적으로 보이지는 않는지 이제는 질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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