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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감독 : 임정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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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의 긍정, <아워 미드나잇> _ 난둘

하루를 마무리하며 이 모든 날이 반복될 것임을 한탄한다. 다가올 내일을 실망하며 반복 없는 꿈에 빠진다. 그러나 그 모든 하루를 버티면서도 작은 웃음을 찾는다. 아마도 작은 웃음에 동반되는 누군가의 온기가 한탄스러운 삶을 꾸역꾸역 이어 나가는 큰 이유가 될 것이다.

은영은 직장에서 만난 사람과 연애하다 데이트 폭력을 당했다. 은영은 이를 직장에 고발했지만, 직장 내 사람들은 은영의 편을 들지 않는다. 그런데도 은영은 직장을 계속 다닐 수밖에 없다. 어쩌면 대부분의 직장인과 같이 은영 또한 한탄스러운 삶을 그나마 버틸 수 있도록 하는 건 직장에서 받는 월급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훈은 무명 배우로 변변한 배역 한 번 따내지 못하고 알바비마저 떼이는 연봉 300만 원의 삶을 살고 있지만 배우라는 직업을 포기하지 않는다. 지훈에게 한탄스러운 삶을 버틸 수 있도록 하는 건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않고 해 나간다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은영과 지훈은 한강에서 만난다. 수많은 차와 사람이 삶의 일부를 그곳에 두고 지나쳐 간다. 반복되는 삶의 일부들을 연극 대사처럼 뱉고 떠난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KF94 마스크 같은 가림막 없이는 막히지 않을 미세먼지와 같은 것들은 그곳을 지나쳐 가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흐르는 강의 운동에 따라 퇴적되지 않고 흐른다.

그러나 은영과 지훈은 우연한 만남을 그들의 삶에 쌓는다. 그들은 한강을 거쳐 청계천을 지나 을지로에서 서울극장까지 끊임없이 걸으며 대화한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서울극장에서 그들은 그림자놀이를 한다. 사라져버린 장소에서 동작을 바꾸자마자 사라져버리는 그림자놀이는 갑작스러운 코끼리 그림자의 등장으로 은영과 지훈의 기억 속에 영원한 순간으로 남을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은 그 사람의 몸에 퇴적된다. 은영과 지훈은 길거리에서 행하는 롤 플레이로 서로의 억울함과 바람을 털어놓는다. 롤 플레이와 같은 연극 행위는 녹화되지 않는 이상 물리적으로 남지 않는다. 그러나 연극을 반복하는 사람의 몸에는 그 행위가 쌓인다. 은영과 지훈이 롤 플레이를 통해 자신의 삶의 일부를 서로에게 털어놓음으로써 각자의 삶을 서로에게 퇴적하듯이, <아워 미드나잇>은 한강의 흐름에 자신을 영원히 맡기지 않고 온몸으로 인생을 버티는 사람들에게 각자의 삶을 약간씩 주고받으며 살아가자고 조용히 말 건다.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1)_  A

무명 배우 지훈이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1931)를 보고 있다. 한 프레임의 전경에는 지훈이, 후경의 연습실 거울에는 지훈의 뒷모습과 영화가 상으로 비춰진다. 영화에서 채플린은 눈이 보이지 않는 소녀에게 사랑에 빠져 수술비를 구하고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해줬으나 소녀가 자신을 알아보기 전까지 끝내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아워 미드나잇>에서 지훈은 쓰러진 은영을 구한 인물이 자신이라는 것을 만남과 동시에 밝히고, 영화는 그 순간 한밤의 긴 산책을 동행한다. 오해 없이, 지연 없이 처음 만난 사람의 특권으로 시작되는 지훈과 은영의 산책에 카메라는 한강의 물결처럼, 도시의 흔들리는 불빛처럼 유영하듯 움직인다.

지훈이 영화를 보는 하나의 사건을 앞모습과 뒷모습으로 동시에 보여주는 장면이 그러하듯, 영화는 한 사람과 다른 사람,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의 충돌로 하여금 하나의 세계가 구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훈이 카페에 앉아 선배를 기다릴 때, 뒤 테이블에서 벌어지는 초점이 맞지 않는 사건은 현실감을 위해 존재하는 배치 또는 조연의 연기에 불과해 보이나, 중반부 하나의 사건으로 생성된다. 초점의 이동, 주변의 소음과 뒤섞이는 목소리, 차단되는 대사와 같은 영화적 장치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졌던 희뿌연 세상 속 사람들의 초점을 명확히 조명하는 데 역설적으로 사용된다.

은영과 애인 사이에 있었던 일 역시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자국으로 남은 이름들 앞에서 행해지는 일종의 극중극을 통해 중요해지는 것은 사실/사건을 지우고 지우면 남는 존재의 언어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림자라는 (허)상과 현상을 패닝으로 부드럽게 오가며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것이 현실 자체라는 것을 가시화한다. 또한 이제는 사라진 극장 앞에서 펼쳐지는 빛과 어둠의 자국으로 실체 없는 것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환상에 불과한 것이 되는 영화의 원형이기도 한 그림자극에서 그 마술적 힘은 극대화된다.

동이 틀 무렵, 지훈은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갈매기》의 일인극 오디션을 준비하며 번번이 실패했던 니나의 대사를 끝마지는 것에 성공한다. 보통의 영화에서 긴 독백을 연기하는 배우가 카메라를 바라보는 것과 달리, <아워 미드나잇>에서의 독백은 오로지 서로를 위해 진행된다. 연극의 막이 올라가고 아름, 지숙, 관재의 일상을 통과해 잠 못 들던 밤을 지나 곤히 잠들 수 있게 된 은영과 그 옆에 잠들어 있는 지훈이 보이며 흑백으로 전개되던 영화도 컬러로 전환된다.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라고 하더라도 깊은 밤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놀라 도망치는 자가 있다면, 자신의 그림자와 동행하는 자가 있다. 밤의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도, 두려워하는 자도 결국 어둠에 적응해 빛을 볼 수 있게 되듯, 영화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는 사람들의 빛과 어둠의 공존을 보여 준다.

1)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의 5막 5장에 나오는 구절.


“우리 일에서 필요한 건 명성이나 영광이 아니에요. 버틸 수 있는 인내력이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법을 알고 믿을 지어다. 바로 이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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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워 미드나잇>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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