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h is the Purest White 江湖兒女, 2018, 지아장커
장르 이전의 중국이라는 양상(mode) _ A
이영재1)는 전후 동아시아의 액션영화에 등장하는 맹인, 절뚝발이, 외팔이와 같은 신체장애를 가진 남성을 분석하며, 이는 주권 담론 내부의 비정상 국가에서의 ‘결여’를 의미하고, 이 결여의 담론이야말로 전후 국가를 지탱해 온 것에 다름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일본, 홍콩, 한국의 전후 영화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불구의 신체는 전쟁이나 결투에서의 성공을 의미하는 동시에 영원히 회복되지 않을 결여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들의 결핍을 확인시켜 주는 것, 그럼으로써 상처받은 남성성을 재건하는 것은 언제나 여성이었다. 2001년부터 2018년까지의 시간을 3막으로 구성하고 있는 지아장커의 <강호아녀>는 중국 북부에 위치한 다퉁의 조직폭력배 우두머리인 빈과 그의 연인 차오를 담는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들뜸과 낙관에서 피어오르는 불안으로의 2001년, 빈의 불법 소지 총기를 자신의 것이라고 진술한 대가로 차오가 감옥에서 보낸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2006년, 헤어짐 이후 되돌아온 다퉁에서의 2018년. 시작과 끝에는 이제 폐광만이 남은 다퉁이라는 도시와 차오 그리고 빈이 있으나, 빈은 휠체어를 타고 불구가 된 몸으로 돌아온다. 앞선 국가들은 식민 혹은 패전이라는 국가와 국가 간의 충돌을 전제로 하지만, 2000년대 중국에서 빈은 왜 불구가 되어서야 되돌아올 수 있었을까? 영화는 이 비어있는 시간과 공간을 결여의 과잉으로 보여준다.
멜로드라마의 규정불가능성이란 이것이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거나 때로는 모든 장르를 포괄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러므로 배리 랭포드2)는 멜로드라마 장르는 장르 이전의 ‘양상(mode)’(혹은 양태)이며, 여성지향적이라는 멜로드라마의 혐의에 내포된 경멸적 특성으로의 과잉은 오히려 토머스 앨세서의 진술처럼 “그것을 뒷받침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의 통렬한 비판을 공식화한다.”(71)고 설명한다. 또한 이같은 과잉은 “(미국 사회에서) ‘말할 수 없는’ 그러나 근본적인 차원에 (…) 주의를 기울이는 신체 변형과 분출, ‘히스테리’ 징후”(72)로서 독해될 수 있다. 멜로드라마의 파토스와 정념, 그것을 극대화하는 멜로디 사용은 <강호아녀>의 멜로드라마적 양상을 배가한다. 홍콩의 오우삼 감독이 만든 <첩혈쌍웅>의 주제가였던 ‘천취일생’, 홍콩의 대히트 드라마 <상해탄>의 주제가였던 ‘상해탄’, 미국의 그룹 빌리지 피플이 부른 ‘YMCA’, Huang Zhuo Ying의 ‘You Duo Shao Ai Ke Yi Chong Lai’를 포함한 대중가요는 중국 관객으로 하여금 형용할 수 없으나 구체적인 집단적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검열을 피하면서도,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시행된 개혁과 개방 정책으로 홍콩, 대만, 미국에서 유입된 대중문화를 통해 잠시나마 느낄 수 있던 자유의 공기는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으로서의 중국 이데올로기에 대항한다. 홍콩의 삼합회 영화를 보는 빈의 조직이 80년대 대중문화를 통해 습득한 행동 양식은 중국에서 다퉁이라는 도시를 현실 세계로부터 무관한 상상적 세계로, 즉 국가 주도의 무시무시한 속도로부터 정지한 듯 보이는 유유자적한 ‘강호(江湖)’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차오의 시련으로 구현되는 강호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으나 잠잠한 싼샤댐처럼 무너진 현실 세계를 토대로 한다. 펑제에서 광둥으로 가는 이주민이 페리에 오르기 전 기묘한 쇼트가 이어진다. 탑승 안내 멘트가 나오기 전, 부두에서 배에 오르기를 기다리는 중국 인민의 모습이 패닝으로 촬영된다. 멈춰진 제스처와 그 안에서 수평으로 움직이는 카메라, 이내 계단을 수직으로 오르는 차오와 인민들의 미세한 움직임이, 이 순간이 정지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인간의 시점을 초월하여 드론으로 촬영된 건조하지만 물에 잠긴 듯한 도시의 전경, 끝내 CCTV에 붙들린 차오까지, 진공과도 같은 압력에서 강호를 살아내는 것, 그것이 멜로드라마 이전의 중국이라는 양상이다. 다시 돌아와, 배리 랭포드의 말을 빌려,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어려움, … “어쩔 수 없음의 함수”, 이렇게 멜로드라마의 막대한 에너지는 시련의 감각을 강화시킨다(75).
1) 이영재. 맹인, 절뚝발이, 외팔이-전후 동아시아 영화의 신체. 현대문학의 연구,(46), 145-201, 2012.
2) 배리 랭포드. 영화 장르: 할리우드와 그 너머. 방혜진 옮김. 한나래. 2014.
<강호아녀>를 "그냥" 보는 법 _ 난둘
중국의 6세대 감독을 대표하는 지아장커의 영화는 중국 사회를 알레고리적으로 읽어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중국이라는 컨텍스트를 떼어놓고는 그의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제대로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영화에서는 무엇을 보아야 할까? 미뤄둔 숙제를 하듯 언제나처럼 산시성 일대를 돌아다니고 있는 자오 타오를 보며, 그동안 지아장커의 영화를 알레고리적으로 읽으려 노력했던 나의 모습에 갑작스러운 위화감이 들었다. 언제나 그의 영화를 같은 방식대로만 읽으려는 강박에 빠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동안의 습관을 버리고 <강호아녀>를 “그냥” 보았다.
차오와 빈은 사랑하는 관계인 듯 보이고 주변 인물들 모두 그들을 그렇게 정의하나, 나에게 그들은 그저 서로가 당시 옆에 있었을 뿐인 관계로 보였다. 유한한 인생의 변곡점에 나의 옆에 있었던 사람. 운명적인 관계라고는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하지 않고 다소 마음 아플지라도 언제든 다른 이로 대체될 수 있을 그런 관계. 가장 마음 아픈 점은 빈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지만, 차오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차오는 다른 조폭 무리에게 구타당하는 빈을 구하기 위해 사제 권총으로 그들을 위협하고 결국 감옥에 갇힌다. 감옥에서 보낸 5년이라는 시간은 차오와 산시성을 떠나 다른 여성을 만나는 빈 때문에 낡은 세월의 한 조각이 되어버렸다. 그 조각을 어떻게든 과거와 이어보고자 차오는 연락을 피하는 빈을 찾아 길거리를 돌아다닌다. 차오는 길거리에서 도시의 서커스단, 길거리 결혼식, 불량배들, 고급 레스토랑의 손님들, 강간을 시도하는 오토바이 택시기사 등 다소 유쾌하지만은 않은 만남들을 갖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만남들은 5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사뭇 낯설어진 시공간에 차오를 적극적으로 놓아둔다. 차오는 더더욱 빈을 만나고자 한다. 그러나 2006년의 빈을 2001년의 빈과 이어붙이고자 하는 시도는 필연적인 실패로 돌아갈 뿐이다.
그래서 차오는 그 모든 조각을 버리려 신장이라는 도시로 향하고자 하는데, <강호아녀>는 차오에게 그것들을 모두 버릴 기회도 주지 않는다. 차오는 결국 기찻길의 중간에 내려 흑백의 도시를 재와 같은 흰회색 빛깔로 물들인 UFO 혹은 유성을 마주한다. 어둠이 내려 흙빛이 된 회색빛의 콘크리트 건물은 UFO 혹은 유성의 빛을 받아 원래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꿈과 같은 것이 비추는 것은 꿈 같지 않은 현실이다.
그럼에도 차오는 자신이 주워 온 세월의 조각을 자신의 미래와 이어 붙이고자 한다. 차오는 산시성으로 되돌아가 감옥에 가기 전 함께했던 그때 그 사람들을 현재의 사람들로 만든다. 그리고 빈은 뇌혈관이 터져 하반신 불구가 되어 차오를 찾아온다. 빈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차오의 도움을 받아 걸을 수 있게 되자마자 차오를 떠난다. CCTV를 통해 보이는 빈이 떠난 길을 바라보다 돌아서 벽에 기댄 차오의 모습에서 앞으로도 꿈 없이 버텨내야 하는 현실의 벽을 마주하게 된다.
무언가를 마주한다는 것, 즉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강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20년이라는 세월을 담고 있는 <강호아녀>를 변화하는 중국 사회의 알레고리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차오가 마주한 현실의 벽을 용감하게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음으로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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