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metery of Splendour,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2015
Love in khon kaen - A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를 초현실주의, 마술적 리얼리즘, 다큐멘터리(리얼)와 픽셔너리의 경계를 오가는 영화라 말할 때, 리얼리즘이라는 것의 의미가 발산하는 극단적 양식화에 관해 고려할 필요를 느낀다. <찬란함의 무덤>에서 극도로 정교하게 구성되는 쇼트와 얽혀가는 몽타주의 리듬은 그야말로 마법적 현실 세계로의 진입과 공간을 사유로 확장시키며 시간의 이미지로 열어젖히는 시네마로의 진입을 가능케 한다. 현실이 그 자체로 늘 마법적 순간들의 제시라는 것을 전제하면서 아피찻퐁은 그것을 포착하는 것이 영화의 책무이며 작동의 이유라고 말하는 듯 보인다.
잇이 잠시 깨어난 사이, 잇과 젠은 야시장으로 나와 길거리 음식을 먹는다. 이내 그들은 영화관에 앉아 있다. 영화관에 앉아 있는 이들의 뒷모습과 스크린에 투사되는 요괴 미녀의 결투가 한창인 외설적이고도 산란하는 빛 앞에서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관건이다. 예고편이 끝나고 본편이 시작되어야 할 순간, 영화는 군인들이 잠을 자고 있는 병동으로 돌아간다. 천장의 실링팬과 조명, 잠자는 군인들, 잠자는 거리의 사람들, 잠든 도시에 남아 움직이는 사람들, 정류장 벤치에 잠들어 있는 노숙인을 영화는 차례로 보여준다. 잇과 젠의 영화가, 그리고 우리가 보아야 할 본편이 마치 잠든 군인과 도시라고 말하듯, 도시를 배회하던 카메라는 영화가 끝날 타이밍에 맞춰 잇과 젠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멀티플렉스 상영관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이 줄지어 나온다. 행렬 끝에 젠과 사람들에게 들춰진 채 나오는 잇이 등장하자 그제야 카메라가 움직인다. 카메라는 잇과 젠을 따라 패닝하고, 그들과 함께 하강한다. 잠든 군인의 병동과 영화관이 오버랩되고, 사람들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끝없이 내려간다. 긴 하강 끝에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군인들이 있다.
아무 때나 잠들고, 언제 깨고 다시 잠들지 모르는 군인들은 젠이 봉헌한 자매 여신의 말대로라면, 죽은 왕들을 위해 꿈에서 여전히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학교였으나, 이제는 폐허와도 같이 변해버린 임시로 마련된 장소에는 왕족 간의 전쟁으로 죽은 마을 사람들과 군인들이 묻혀 있으나, 더 깊은 근간에는 왕들의 무덤이 있다는 것이다. 계속적으로 더 깊은 곳으로 추락하는 영화, <찬란함의 무덤>에서 꿈을 꾸는 자들은 비단 군인만이 아니다.
꿈에서 깨고 싶을 때는 눈을 크게 뜨세요. 잠든 자들과 깨어 있는 자들을 연결해주는 영매 켕이 젠에게 한 말이다. 젠은 외출 중 또다시 잠에 든 잇의 몸을 빌리고, 잇이자 켕 그리고 젠은 도시의 공원에서 잇의 꿈으로 들어간다. 그들을 황금으로 된 왕의 거처를 구경한다. 문턱을 건너고, 낮은 문을 고개 숙여 들어가고, 문을 열어주며 연극적 공간을 구성하고, 잇의 꿈과 젠의 현재는 불쑥불쑥 중첩된다. 화려한 궁전은 꿈에서만 존재할 뿐,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상상적 과거와 영광이 끝날 때쯤, 젠이 말한다. “꿈을 꾸는 것 같아.” 이 말에는 꿈을 꾸고 있지는 않지만 현실 역시도 꿈과 같은 상태라는 암시가 있다. 도시를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꿈을 꾸고 있거나, 꿈속이 아닐지라도 꿈과 같은 현실에 살고 있다. 꿈에서 깨고 싶을 때는 눈을 크게 뜨세요.
영화는 눈을 끄게 뜨자고 말하고 있지만, 실상 이 영화에서 꿈을 깨우는 것은 피부와 피부의 마주침이다. 애무와도 같은 마사지, 몸을 갖다 대야만 가능해지는 꿈의 대화. “네가 잠들면 밝은 세상도 어두컴컴한 느낌이야”라고 말하는 젠에게 다가가 켕이자 잇이 개처럼 젠의 상처를 핥을 때, 젠은 그제야 어깨를 흔들며 눈물을 흘린다. 접촉을 통해 기억이 전이되고, 이로 인해 치유되고, 꿈은 말해지고, 해석된다. 탈마법화disenchatment의 순간은 진정으로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꿈을 다시 꿈으로 인식하는 순간이다. 탈마법화를 넘어서는 것은 깨어남이고, 이 깨어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꿈이 아닌 꿈의 해석이다(벤야민).
영화는 태국이라는 현실과 맥락화 되어 외설적이며 섹슈얼리티한 기운 그리고 질병과 믿음에 기반한 치유를 향한 슬픔으로 넘실거린다. 서로의 살을 문질러주고 핥아주는, 그럼으로써 오는 몸과 몸의 마주침이 사람들을 꿈에서 깨어나게 만든다. 섹슈얼리티와 파시즘의 동력은 너무도 같고, 파시즘으로 추동되는 욕망의 찌꺼기는 배설과 같다. 마치 마을 사람들의 축제가 끝난 뒤 찾아온 집단적인 기생충 감염처럼. 이 순환은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배치되는 순환펌프와 팬 실링처럼 고여있는 곳에서의 기계적 움직임으로 이루어진다.
아피찻퐁은 과거 왕들의 무덤이었던 곳을 포크레인으로 불경하게 파헤친다. 그리고 그것을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본다. 꿈에서 깨어나도 여전히 꿈꾸는 것만 같은 현실 앞에서, 마주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의 무너짐일 수도, 군부와 결탁한 왕권으로로 파멸하는 돌이킬 수 없어 보이는 태국일 수도 있다. 아직 잠들어 있는 도시에서, 태국에서, 영화는 그렇게 안녕을 고하며 눈을 감아 버린다.
수차(水車)로서의 영화- 서너시
잘 알려져 있듯,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군부가 장악한 태국의 사회정치적 상황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이를 작품에서 주요하게 다루어내는 태국의 영화감독이다. 해외 영화제에 소개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피찻퐁은 태국에서 영화를 제작・상영하기 위해 엄격한 검열을 거쳐야 한다. <찬란함의 무덤>은 태국에서의 영화 작업에 한계를 느끼던 그가 태국에서 만든 마지막 영화가 될 것이라고 선언한 작품이다.
초자연적 요소, 환상과 현실의 경계 넘나들기, 정글, 군부에 대한 비판, 역사, 기억, 그리고 이 모든 것의 흐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에 나타나는 것들이다. 아피찻퐁 영화의 특징들을 도식화하거나 요약정리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의 영화를 처음 접하게 되면 손에 잡히는 것들을 찾으려 애쓰다 빈손으로 영화를 흘려보내기 쉽기 때문에 이렇게 어떤 것들이 흘러지나갈 지 예고되면 좋을 것 같다. 아피찻퐁 영화에서는 그 흐름에 전적으로 몸을 맡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영화 역시 많은 독립・예술 영화를 무력화시키곤 하는 질문에 부서지기 쉽다. 그 질문이란,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야?"
그러니까⋯ 어려운 영화라는 말이다. 다른 아피찻퐁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찬란함의 무덤> 역시 쉽지 않은 영화다. 그러나 그 난해함이 이 작품의 가치를 훼손시키지는 않는다. <찬란함의 무덤>의 한 장면을 보자. 물가에 수력발전기가 돌아가고 있다. 거대한 규모로 수력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거의 없는 수준이라 이 작고 조악한 수력발전기의 힘이 거세 보인다. 여기서 남는 것은 흐르는 물이 아니라 물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다. 말하자면 아피찻퐁의 영화는 이 수력발전기와 비슷하다. 남는 것은 흐름의 힘이다.
<찬란함의 무덤>에서의 흐름은 꿈과 현실의 교차와 중첩 속에서 이루어진다. 마을 학교를 개조한 병원에는 설명할 수 없는 수면병에 걸린 군인들이 잠들어 있다. 그들은 아주 가끔 깨어나지만, 많은 시간을 잠든 채로 침대에 누워있기 때문에 주인공 ‘젠’을 비롯한 간호사들이 그들을 돌본다. 그러던 중 젠은 자신이 돌보는 젊은 군인 '잇'과 유사 모자 관계를 맺는다. 그녀는 호수 옆에 있는 사원에 가 봉헌을 하며 잇의 건강을 빈다. 사원에서 모시는 공주 신들은 그녀의 봉헌에 감동하여 젠의 앞에 나타나는데, 흥미롭게도 그들의 모습은 속세의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영화에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요소들은 이렇게, 종교적이고 성스럽다기보다는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찬란함의 무덤>에서는 환상과 미신, 꿈, 그리고 현실적인 것의 경계가 흐리다 못해 비현실적인 요소들이 일상화되어버린다. 그것은 현실의 일부, 그것도 특이할 것 없는 일상적인 무언가로 섞여있다. 신들은 젠에게 군인들의 집단 수면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과거 태국 땅에서 있었던 왕가의 권력 다툼과 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땅 밑에 묻힌 왕족들은 군인들의 영혼으로 전쟁을 계속한다. 태국 근현대사에서의 폭력은 먼 과거로부터 이어져오는 '흘러온 것'으로서 현실에 육체를 두고 꿈의 세계로 들어간 군인들의 몸에서 과거와 연결되고, 중첩된다.
영화 후반부, 젠은 꿈의 세계에 있는 잇과 대화하게 된다. 영혼들의 말을 듣는 영매 ‘켕’의 몸을 통해서다. 잇은 젊은 여성의 몸을 하고 젠의 옆에 서 있지만, 그의 영혼은 왕실 복도에 서 있다. 그러나 현실과 꿈의 공간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중첩되기 때문에 여기에 불일치는 없다. 오히려 기묘한 일치됨이 있다. 젠은 현실 공간에 있지만 잇이 말하는 꿈의 물체들을 본다. 잇은 꿈 공간에 있지만 젠이 언급하는 현실의 물체들을 본다. 관객은 꿈 공간을 직접 볼 수 없지만, 잇과 젠을 통해, 두 공간의 겹쳐짐을 봄으로써 그것을 '본다'.
켕과 같은 영매로서 아피찻퐁은 현실에 중첩되어 있지만 보이지 않는 여러 층들을 볼 수 있게 한다. 과거는 현재에 침투한다. 환상과 꿈, 초자연적인 무언가는 현실 속에서 '비현실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낼 변화의 씨앗으로서 잠재되어 있다. 태국에서 만들어진 아피찻퐁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찬란함의 무덤>은 태국 어느 시골 마을 한 켠에 놓아진 채 계속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은 불분명함이 만들어내는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흐름의 힘이다. 그렇게 아피찻퐁의 영화는 일종의 수차(水車)로서 기능한다.
차라리 꿈-세계로 빠지고 싶다 - 난둘
젠이 기도를 드리는 두 여인 신상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그들이 움직이고 있다 착각했다. 그들을 열심히 관찰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이 이후 살아있는 인물로 등장했다. 그들은 젠에게 자신들을 신이라 소개하며, 젠이 먹는 간식을 열심히 먹었다. 신이 무언가를 먹는다는 사실에 웃음이 났다. 먹는다는 행위는 너무 현실과 밀착되어 있다. 그리고 신이란 존재는 현실과 떨어진 일종의 이-세계에 존재한다. 이상한 세계들이 공존하고 있다.
오래된 학교를 병실로 개조한 곳에서 군인들은 죽은 듯 잠을 잔다. 여인-신들은 그곳이 사실 죽은 왕들의 무덤이 모여있던 곳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세계에서는 그 국왕들이 전쟁을 벌이고, 그 전쟁에 잠든 군인들을 병사로 가져다 쓴다고 알려준다. 현실 세계의 병사들을 이-세계의 군인으로 만들기 위해, 이-세계가 현실에 속한 군인들을 재운 것이다.
그렇지만 이-세계는 꿈-세계가 아니다. 꿈은,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자면, 무의식을 발산하는 곳이다. 고로 꿈은 의식적인 순간에서 표현할 수 없던 것을 표현하는 곳이다. 잠에 든 군인 중 한 명인 잇의 ‘꿈’은 전병 가게를 여는 것이다. 이-세계의 병사로 싸우는 것은 잇의 무의식(이자 욕망)이 아니다. 식사를 하던 군인 중 한 명이 갑자기 잠에 빠져든다. 이는 국왕의 병사로 차출된 것이다. 그곳의 군인들은 본인이 원하는 무언가를 제대로 할 수 없다.
무력감이 <찬란함의 무덤>을 지배한다. 무력감의 도피는 종교로 가능해진다. 태국의 군부독재 문화에 쓸쓸히 저항하는 방식에 태국의 전통신앙이 결합된다. 자연 모든 것에 신이 깃든다는 태국의 전통신앙은 신비한 무엇이 아니라 태국 사람들의 도피처다. 그런 자연을 포크레인이 열심히 헤집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럼 사람들은 대체 어디로 도망가지? 영화는 출구 없이 똑같은 공간만을 맴맴 돌고 있다. 잠에 든 군인들처럼, 명상을 수행하면 당뇨, 고혈압, 에이즈를 물리칠 수 있다는 강사의 믿음처럼, 고무 팩을 사면 젊어질 수 있다는 판매원의 말처럼…
눈을 부릅떠야 이 맴돌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벗어남은 힘듦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남을 위해 싸워야 하는 병사의 의무에서 벗어나자, 그들의 말을 전달하며 오는 고통에서 벗어나자, 누워 있는 병사들을 간호하는 삶에서 벗어나자... 슬프게도 영화의 등장인물 대부분은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어 눈을 부릅뜨는 것조차 힘들다. 젠은 다리 한쪽이 유난히 짧아 한 쪽 발에만 높은 신발을 신고, 목발을 짚어 움직여야만 한다. 잇은 수면병에 걸려 열심히 잠을 자며 국왕을 위해 싸운다. 젠의 친구 켕은 타인의 말을 전하는 전달책으로만 사용된다.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것도 너무 힘든데 눈마저 부릅떠야 한다고? 내가 보기에 그들이 가장 편안해 보일 때는, 젠이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며 튀긴 바나나를 간식으로 먹을 때나, 젠과 잇이 노점상에서 튀긴 음식을 먹으며 콜레스테롤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다.
물론 이러한 편안함은 눈을 감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1980년대에나 봤을 법한, 헐벗은 요괴 여인이 나오는 영화가 2014년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에 아무도 경악하지 않는 영화관 장면을 보며 느끼는 당혹스러움처럼. 그런데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우습다. 이런 당혹스러움 자체가 포크레인으로 땅 헤집기와 얼마나 다른가? 나는 똑같다고 본다. 그러니까 눈을 뜨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계몽주의를 주장하는 진보적 엘리트주의의 오만함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글을 쓴 나조차도 오만하다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차라리 이-세계를 벗어나 꿈-세계로 들어가는, 또 다른 방식의 도피를 선택하고 싶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켕은 잇의 목소리를 전하다가 젠을 황량한 산속으로 데려간다. 왕들의 궁전이었다던 그곳에서 켕은 젠의 무릎에 키스한다. 젠은 훌쩍인다. 켕이 켕인지 잇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진 접촉이 이-세계의 언어를 전해 듣던 젠을 깨어나게 한 것처럼 보인다. 그 깨어남의 공간이 어디일까. 젠이 눈을 부릅뜨는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찬란함의 무덤>은 그 공간이 현실 공간임을 보여주려 한다. 하지만 나는 그 공간을 꿈-세계로 믿을 것이다. 항상 위로받고 싶던 젠이 위로받게 된 순간, 그 순간에 만들어진 꿈-세계.
우리는 처절한 저항이 아니라 소박한 위로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