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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맨

First Man, 2018, 데미안 셔젤



결딴난 세상, 두 발 딛고 서 있기 - 난둘


아폴로 11호의 달착륙은 어떤 의미인가? 냉전 시대, 미국에는 처음으로 우주 경쟁에서 소련을 이겼다는 값진 승리를 안겨주었겠다. 냉전 시대에 승기를 쥐어야 한다는 필요조건. 서로의 국력이 과시되어야 한다. 미사일, 군사, 정치, 행정 등 국력을 과시할 만한 모든 것이 충분조건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이 논리의 구성요소에 의문을 가지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냉전 시대에 우위를 차지하는 것. 미국과 소련은 그를 위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논리의 참 혹은 거짓만을 따지기 때문에 어떤 희생은 가려진다. 오직 가정과 결론만이 존재하는 세상. 우주 경쟁은 당연하게도 이를 닮았다. 우주를 탐사하겠다는 계획에서 중요한 것은 탐사를 위한 수많은 계산과 예측이다. 이 계산과 예측이 참인가, 거짓인가. 그렇다면 우주 경쟁을 위해 수많은 인력이 희생되는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해 필요충분조건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아폴로 11호 착륙에 성공한 닐 암스트롱은 냉전 시대 논리의 훌륭한 수행자다. <퍼스트맨>은 이를 건드리지 않는다. 소련을 이겨야 한다는 우주 경쟁 논리는 스쳐 지나가듯 나올 뿐이다. 닐이 비행사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끊임없는 공부를 통한 발전뿐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는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서 과학자의 표준이다.


그렇지만 백인 남성만이 즐비한 나사에서 닐의 태도는 자신에게 내재한 권력에 의문을 품지 않는 것으로도 보인다. 나는 이미 모두 가지고 있으니 그 모든 것에 초연하다. 물론 <퍼스트맨>은 이를 강조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탐사에 실패하는 우주선과 세금을 낭비한다고 비판하는 언론과 자신들에게 세금을 착취하면서 백인들은 나사에 있다는 흑인들의 기근 시위가 다만 삽입될 뿐이다.


<퍼스트맨>이 전면화하지 않는 이 모든 것은 닐의 일상을 통해 암시된다. 닐은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 있다.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아내와 아이들과 친구들과 동료들. 땅에 두 발을 디디고 서 있을 수 있게 해 주는 사람들. 그러나 닐은 외롭다. 모두가 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편해지기 바라지만, 닐은 그들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는다. 닐은 지구 궤도에서 벗어난 탐사호 같다. 언제든 우주 미아가 될 수 있는 상황. 역설적이게도 닐은 그런 상황에서 가장 충만해 보인다. 당장 당면한 문제를 계산하고 예측해 성공해야 한다는 목적만이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살아남기 때문이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목적만이 남아있을 때 닐은 살고 싶어 진다. 그에게 그를 수식하는 많은 것들, 우주 비행사라던지, 누군가의 남편이라든지, 누군가의 아버지라던지, 누군가의 친구라던지 등의 것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그런 수식은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자신을 수식하는 것 없이 인간은 그다지 의미 있지 않다. 나는 오직 나로서 존재한다는 단언이 가장 우스운 말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그는 필연적으로 외롭다. 


그렇지만 <퍼스트맨>은 그를 위로하지 않는다. 닐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닐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닐이 벗어날 수 없는 외로움의 굴레를 넘어서는 시작 지점은 아폴로 11호의 선장으로서 달 착륙에 성공하면서다. 닐은 고요한 달 표면에 선다. 가족들과 보낸 행복한 한 때가 꽤 오랜 시간 삽입된다. 다소 감상적인 순간. 앞선 기자회견에서 닐은 역사에 길이 남겨질 비행사가 된다면 어떨 것 같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닐에게 역사에 한 줄을 남긴다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닐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달 표면에 발을 딛는 것 자체가 중요해 보인다. 내가 여기서도 두 발 딛고 서 있을 수 있다는 것.


영화의 출발점부터 들었던 의문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달 착륙의 의미는 무엇인가. 항공과학을 전공하지 않는 나는 그 중요성을 알 수 없다. 그래서 달 착륙이 왜 필요한 거야? 같은 질문이 순환 논증의 오류처럼 떠다닐 뿐이다. 그렇지만 이 순환 논증의 오류가 냉전 시대를 말해준다. 왜 국가끼리 경쟁해야 하는 거야? 이러한 질문. 오히려 닐의 내면에만 집중한 <퍼스트맨>의 미약한 성과 아닐까.




반사와 반영의 삶 - A 


최초의 SF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조르쥬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1902)을 시작으로 지금껏 인류의 달 착륙을 다뤄온 영화들이 있어 왔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인간의 자취를 남기던 순간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이를 영화로 만든 영화들은 대체로 두 축을 형성했다. 실화에 기반한 영화 혹은 이것에 음모를 제기하는 영화. 전파를 통해 전지구적으로 중계된 달착륙 이미지에서 사람들은 스탠리 큐브릭의 흔적을 찾거나 혹은 그 이미지를 똑같이 재현하고자 했다. 이미지의 복제가 반복될수록 원본을 향한 권위와 멸시는 공존해왔다. 즉, 영화는 무엇이든 재현할 수 있으며, 재현할 수 없다. 그것은 막膜 - 스크린 - 을 건너 되돌아오는 것이고, 시각을 통한 이중적 경험에서 중요한 것은 팩트보다도 허약하게 구축된 리얼리티를 다시금 감각하고 구성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구를 둘러싼 얇은 막처럼, <퍼스트맨>에서 막의 문제는 중요하다. “…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우리가 오래전에 봤어야 할 그러나 미처 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볼 기회가 되겠죠?” 닐의 대사에서처럼, 닐이 우주로 향하는 것은 소리 없는 전쟁보다도, 어디에서 보느냐라는 위치의 문제이며, 봄과 그럼으로써 가능해지는 앎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앎은 맞닥뜨림을 통해 도약하나, 영화에서 맞닥뜨림은 닐의 헬맷을 통해 반사(mirror)될 뿐만 아니라 이중의 가리개를 통해 반영(reflex)된다. 


영화는 사실/역사를 기반으로 하는 전기적 영화이고, 역사와 전기는 국가와 대의의 문제와 상실과 애도라는 지극히 개인적 사건으로 중첩된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전기영화에서 쉽게 가능해져 버리는 내셔널주의적 어조를 피해 간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이미 영화의 결말을 알고 있다. 닐은 어떠한 실패와 희생이 있더라도 달에 가는 것에 성공한 최초의 인류가 될 것이다. 한 줄의 역사는 바뀌지 않으나, 그 역사를 구성하는 것은 다시 쓰여질 수 있다. 


영화가 우주를 구현하는 방식은 아름다움과 신비보다도 도저히 들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 않는 깡통 속에서 느끼는 질식해버릴 것만 같은 감각이다. 비좁은 장소로 하여금 익스트림 클로즈업과 폐소공포증적 시점숏 그리고 사운드의 통제는 회전을 통해 만들어지는 운동 속에서 중지의 순간으로 상연된다. 


영화의 초반으로 돌아가자면, 영화는 추락하며 시작한다. 닐이 매일같이 추락하는 동안, 인간은 매일같이 도약하게 된다. 영화에서 닐의 작은 딸 캐런의 죽음은 영화와 인류의 마법적 순간을 가능케 한다. 아픈 캐런으로 인해 우주에 가지 못할 것 같다는 닐의 바로 다음 쇼트, 영화는 캐런의 장례식으로 바로 이어진다. 이는 닐을 우주에 보내고야 말겠다는 가혹한 하나의 숙명처럼 보이는 동시에 캐런의 장례식에서 들려오는 비디제시스적 시계 초침 소리로 닐과 그의 가족의 정지된 시간을 암시한다. 영화는 인터타이틀을 통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시간이 흐름에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둘째 아들의 대사와 1960년대풍 미국 가정의 홈비디오는 현재 역시도 노스탤지어로만 가능함을 보여 준다. 이러한 정지의 반복적 사태는 어둠과 공명한다. 닐과 에드의 밤 산책길, 닐은 캐런을 상기시키는 작은 그네를 본다. 그는 꺼내지 않던 캐런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내 멈춰 돌아서 완전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닐이 달에 도착했을 때, 영화는 미국 국기를 꽂는 가장 고양적 행위 혹은 인서트 대신 닐 개인의 상상적 순간을 재구성한다. 깊은 크레이터 앞에서 캐런을 떠나보냄으로써 닐과 영화는 마침내 거대한 임무를 마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우주의 스펙터클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창을 통해 분할되는 궤도이고, 이것마저도 닐은 가리개를 내려 그의 얼굴을 가린다. 이를 통해 닐이라는 개인은 스크린 너머로 사라져 버리는 것일 수도 있는 동시에 닐의 거대한 그림자의 반영을 통해 개인으로 존재할 수도 있게 된다. 


영화에서 스펙터클의 전시와 스펙터클을 방해하는 요인들은 촉각으로 되살아난다. 캐런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촉각적 감각은 우주에서 돌아온 닐과 그의 아내 재닛 샤론이 만날 때, 유리막을 사이에 두고 직접 맞닿지는 못하나, 보내고 응답하는 사랑의 제스처를 통해 영화에서의 촉각적 감각은 태동한다. 



11, 10, 9, 8, 7, 6 … 1  - 서너시


포털 사이트나 기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퍼스트맨>(2018)의 영화 소개 문구는 이런 식이다. 


“이제껏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도전한 우주비행사 닐(라이언 고슬링)은, 거대한 위험 속에서 극한의 위기를 체험하게 된다. 전 세계가 바라보는 가운데, 그는 새로운 세상을 열 첫 발걸음을 내딛는데… 이제, 세계는 달라질 것이다.”


이걸 보고 ‘라이벌과의 치열한 경쟁, 권력 암투, 죽음의 위험 속에서 굴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도전한 닐 암스트롱의 눈물과 감동의 인간승리신화…’를 기대한다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겠다.  <퍼스트맨>의 닐 암스트롱은 감정을 격정적으로 표출하는 인간이 아닌 데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그의 침착함을 닮아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도래하지 않은 미래와 미개척지를 손에 넣으려는 일론 머스크식 비전과도 거리가 있다.

 

그런데 ‘잔잔한 영화’라는 타이틀 역시 <퍼스트맨>에 그닥 어울리는 건 아니다. 아폴로 11호 비행을 포함한 여러 번의 비행에서 닐은 죽음의 위기를 경험하고, 그와 달리 위기를 넘기지 못한 동료 비행사들은 사망한다. 죽음과 상실, 언론과 정부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닐은 음울하지만 차분하게 달착륙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여기에 극적 긴장감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주인공-인간이 아닐 뿐이다. 우주선, 실험・연습용 비행기, 로켓, 경고등, 철판, 버튼 등 기계장치들이 닐 대신에 폭발하고, 흔들리며, 소리 내고, 깜빡인다. 압력과 마찰에 끼익 거리는 비행선의 철판 소리는 인간의 심장소리를 압도한다. 인간은 경이롭고 위대한 개척자가 아니라 기계장치의 운명에 자신의 목숨이 달려있는 한 생명체에 불과하다. 그가 보일 수 있는 유일한 강인함이란 연약함과 흔들림 속에서도 달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퍼스트맨>에서 닐의 응시 혹은 비전은 어떤 것인가. 이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영화에서 닐의 비전은 미래라는 시간성에만 온전히 주어진 것이 아니다. 엄청난 국가 예산을 소모하는 ‘백인들의 달나라 여행’의 이면에는 빈민가 흑인의 어두운 현재가 있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에는 그것이 ‘11’호가 되기 전까지의 과거들, 예를 들면 아폴로 1호와 폭발사고로 사망한 3명의 우주비행사들이 있다. 달의 표면에 발을 내딛은 닐은 그곳에서 마침내 현재화된 미래를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달에서 바라본 지금의 지구를, 죽은 딸과 보낸 과거의 시간을 본다. 그는 정복감과 성취감에 전율하는 대신 자신이 차마 마주할 수 없었던 과거를 애도한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는 미래와 꿈을, 국가를 말한다. 기자들은 닐에게 두려움과 기쁨의 감정을 묻는다. 그러나 여기에 미국 혹은 소련이라는 국가 대신 닐이라는 한 <퍼스트맨>이 있다. 그에게는 과거와 현재가, 생동하는 감정보다 더 큰 상실이 있다. 성취해낸 미래 안에는 잃어버린 것들이,  과거와 현재의 시간성이 뒤섞여 있다. 달에 가기 전 닐은 우주 비행이 왜 필요하냐는 질문을 받는다. 닐은 우주 비행이 시각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미래 기술’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그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미래를 향해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다른 위치에서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는 것에 가깝다. 달에서 지구로 되돌아오는 아폴로 11호처럼, 미래에 대한 비전의 종착지는 과거와 현재로서의 지구인 것이다. 


그리하여 <퍼스트맨>은 질문한다. 미래라는 시간에서 과거와 현재를 분리해내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왜 종종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말하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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