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파워 오브 도그

The Power of the Dog, 2021, 제인 캠피온


코디 스밋 맥피와 웨스턴 - 서너시


코디 스밋 맥피를 처음 본 건 <슬로우 웨스트>(2015)에서 였다. 거기서도 그는 척박하고 야만적인 서부와 어울리지 않는 말간 피부의 '도련님'으로 나왔다. 로즈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서부를 횡단하는 소년으로. 물론 <파워 오브 도그>와 <슬로우 웨스트>가 매우 다른 분위기의 영화들이긴 하지만, 서부극을 새롭게 비트는 영화라는 점에서는 비슷한 부분이 있다. 예컨대 <슬로우 웨스트>에서는 고전 서부극에 등장하는 빠른 속도의 추격전과 결투, 정의의 문제 등등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이 느릿느릿한 서부극에서는 '도련님'이 밤하늘의 별을 보며 감상적인 말을 한다거나, 마이클 패스벤더가 연기한 현상금 사냥꾼이 강물소리와 햇빛이 가득한 숲을 배경으로 소년에게 면도를 해주는 등 낭만적인 동화 느낌의 장면들로 가득하다. 


<파워 오브 도그>에는 <슬로우 웨스트> 같은 낭만은 없다. 대신에 <파워 오브 도그>는 서부극의 마초적 남성성을 호모포빅한 클로짓 게이의 이야기로 다시 그려낸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목장주 필은 카우보이 사이에 신화적 인물로 통하는 브롱코 헨리의 제자로, 카우보이 중의 카우보이다. '서부의 사내'답게, 그는 장갑도 끼지 않은 채 동물의 가죽을 벗겨내고, 거친 언사와 행동으로 사람들을 제압한다. 그러나 목장의 우두머리로서 필이 가진 진정한 능력은 육체적 힘보다는 사람들을 다루는 심리 기술에 있다. 필은 브롱코 헨리에 관한 신화를 읊어댐으로써, 그의 계승자인 자신의 신비로움과 사내다움을 강화시킨다. 브롱코 헨리가 본 것을 필 역시 보지만, 다른 카우보이는 볼 수 없다는 식이다. 브롱코 헨리에 관한 신화는 일부 (혹은 전부) 필에 의해 창작되거나 부풀려진 것처럼 보인다. 브롱코 헨리는 필이 숨기고 싶어 하는 치부인 동성애적 욕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필에게 남성성과 우두머리로서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영웅적 인물로 사용된다. 


코디 스밋 맥피가 <파워 오브 도그>에서 연기한 피터는 필과 달리 깡말랐고, 창백하고 하얀 피부를 가져 겉보기에 매우 연약해 보인다. 어머니 로즈의 일을 돕던 피터는 로즈가 필의 동생 조지와 결혼하게 되면서 필과 엮이게 된다. 필은 조지와 로즈의 결혼을 탐탁지 않아한다. 그는 로즈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하지는 않지만, 말로 모욕을 주고 실수를 조롱하기 위해 휘파람을 부는 등 계속해서 그녀를 정신적으로 괴롭힌다. 휘파람은 짐승을 다룰 때 사용하는 신호이자, 로즈가 갖추지 못한 교양과 계층 수준을 환기시키는 음악으로서 로즈를 망가뜨린다. 필은 주먹과 채찍이 아니라 이야기와 음악, 즉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것들을 무기로 사용한다. 


<슬로우 웨스트>에서처럼 코디 스밋 맥피는 '로즈'를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행동에 나선다. 그러나 <파워 오브 도그>의 피터는 <슬로우 웨스트>의 소년과는 달리 어딘가 서늘한 면이 있다. 피터는 종이꽃을 만들고, 작은 동물을 좋아하는 등 전형적인 서부 남성성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인다. 필을 포함한 카우보이들은 그런 피터를 '암사내' 같다고 조롱한다. 피터의 아버지가 죽기 전 피터가 너무 독하다(strong)고 걱정했다는 말에 필은 웃지만, 피터는 끝내 필을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써 호모포빅한 마초적 남성성이야말로 오히려 유약한 것임을 증명한다. 필이 자신이 남자답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장갑을 끼지 않았던 사실을 이용해 그를 감염으로 죽게 만든 것이다.


<슬로우 웨스트>에서처럼, <파워 오브 도그> 속 카우보이의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장소에 코디 스밋 맥피는 등장하지 않는다. 서부극의 도련님은 <슬로우 웨스트>에서는 서부의 사나이를 가정적인 남성으로 변화시키고, <파워 오브 도그>에서는 복수를 통해 파괴시킴으로써 서부의 남성성을 흔들어 놓고 퇴장한다. 거기엔 총도, 근육도 필요하지 않다. 




찌르는 밋밋함에 관한 영화, <파워 오브 도그> - 난둘


필이 장갑을 끼지 않은 채로 피터가 가져온 생가죽을 만진다. 물에 담겨 있어 부드러워진 죽은 소의 가죽. 피터는 새끼 꼬는 필을 쳐다본다. 그 눈빛은 피터가 처음 레드 밀에서 필을 만났을 때 보여준 눈빛과는 달라 보인다. 다음 날. 필은 평소와 달리 아침 일찍 일어나지 못한다. 그는 조지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으로 향한다. 필은 완성된 가죽끈을 피터에게 전하고 싶어 하나 끝내 피터를 찾지 못한다. 피터는 그런 필을 자신의 2층 방에서 쳐다볼 뿐이다. 며칠 뒤, 필은 오염된 동물로부터 감염되는 탄저병으로 죽는다. 필의 장례식을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피터는 장갑을 낀 채로 가죽끈을 만지작거린다. 이때의 눈빛은 그때의 밤과 달라야 하지만, 그때와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


보통 상황에 따라 해석은 바뀐다. 필과 피터가 함께 언덕 위의 그림자 진 개의 형상을 바라보았을 때, 필은 그 형상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농장의 노동자들과 농장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개의 형상을 보았다는 피터를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 필의 동성애적 성향은 영화 곳곳에 은유처럼 나타난다. 그렇기에 변화한 필의 감정은 피터를 향한 로맨스로 느껴진다. 그러나 피터는 본인 스스로 동성애적 성향을 드러낸 적 없다. 종이로 꽃을 접는 섬세함, 왠지 연약해 보이는 겉모습, 남들과는 다른 옷차림, 그런 그를 낸시라고 조롱하는 주변인들이 그를 그런 성향일 것이라 착각하게 만든다. 필은 그 착각을 믿는 것이다. 


<파워 오브 도그>는 사소하지만 가장 예민한 감각에 관한 영화다. 남들과 다른 성향을 숨기려, 필은 제대로 씻지 않는다. 그는 더러운 농장 주인이라는 겉모습이 가져다주는 힘을 믿는다. 필이 자신의 예민한 감각을 드러내는 순간은 홀로 있을 때다. 필은 그 감각을 남들에게 보이길 거부한다. 그렇지만 그는 그 감각을 믿는다. 사소한 소리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필은 자신을 둘러싼 소리에 변화를 일으킨 로즈를 사소하게 괴롭힌다. 로즈가 몰래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을 때, 필은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은 채 들어와 로즈의 피아노 연주를 밴조로 따라 한다. 그 은밀한 수치심에 로즈는 사로잡힌다. 로즈는 계속되는 수치심, 남들에게 보이지 않아 사소하지만 가장 거대한 감각을 잊기 위해 집안 곳곳에 술을 숨겨놓고 마신다. 그러면서도 필이 행하는 모든 행동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모두가 모든 자극에 예민할 때, 피터는 그 모든 감각에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피터는 필에게 자신이 만든 꽃으로 조롱받았을 때, 밖으로 나가 훌라후프를 돌린다. 그리고 나선 그 일이 없던 것처럼 행동한다. 모두가 그를 낸시라며 조롱해도, 피터는 그런 그들을 그저 묵묵히 지나다닌다. 자신이 귀여워하던 토끼를 외과의사가 되어야 하는 과정 중 하나라며 해부한다. 말을 타고 농장 주변을 달리다 만난 죽은 소의 사체에 무서워하거나 애도하지 않으며 가죽을 떼어간다. 그때마다 피터는 장갑을 끼고 있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을 때 느껴지는 감각을 거부하려는 사람처럼.


피터에게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해석은 없다. 왜냐하면, 애초에 피터에게 해석은 어떤 상황 자체이기 때문이다. 피터는 필의 장례식에서 돌아와 저택의 홀에서 성경을 펼친다. 한 구절 앞에 카메라는 멈춰 선다. 


“deliver my soul from the sword; my darling from the power of dog.” 영화의 제목이자 원작의 제목인 <파워 오브 도그>는 바로 이 구절인 구약 시편 22장 22절, “칼에 맞아 죽지 않게 이 목숨 건져 주시고 하나밖에 없는 목숨, 개 입에서 빼내 주소서” 에서 따온 것이다. 이때 ‘파워 오브 도그’는 악의 형상이자 그림자 진 개의 형상이다. 피터는 모든 사람의 생각에 따라 어떤 사람이든 될 수 있다. 피터는 로즈의 생각처럼 어머니를 도와주는 착한 아들일 수 있고, 농장 사람들이 보듯 연약한 낸시 아가씨일 수도 있고, 필이 보듯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일 수도 있다.


영화의 배경인 1920년대는, 영화가 보여주듯 거대한 틀에 종속된 개념들을 믿어야 했다. 그 틀에서 피어나는 감각들은 거부하거나 순응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무언가다. 피터는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피터는 그 누구든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피터는 1920년대가 규정하는 ‘악의 형상’이다. 농장에서 키우는 보더콜리는 오직 피터만을 따른다. 나는 그 보더콜리를 피터를 악의 형상임을 은유하는 장치라고 믿는다. 아마 피터는 이러한 나의 믿음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피터는 그 모든 믿음을, 그 모든 감각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각을 거부하면서도 그 감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필과 달리.




<파워 오브 도그>가 삼키고 있는 말,  - A


서부극 장르는 미국의 국가 정체성의 은유이자, 백인들이 척박한 땅을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운명까지도 개척해왔음에 관한 미국적 상상력을 제공한다. 서부극은 주로 카우보이와 보안관 구도에서 법과 질서를 침범하며 다시 세우는 남성중심주의적 장르이지만, <파워 오브 도그>는 카우보이라는 도상과 남성중심주의적 질서가 어떻게 새로운 시대에 쇠락해가는지를 섹슈얼리티적 관능으로 휘감아 삼켜버린다. 영화에서 카우보이적 의상과 신발 그리고 풍모로 제시되는 단지 도상뿐인 ‘웨스턴’은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처럼, 누가 (탄저균으로 오염된) 전통을 승계받을 것인지 혹은 누가 새로운 질서를 다시 세울지의 문제로 채워진다. 카우보이들은 항상 이동하지만, 영화에서 버뱅크 가의 이주는 이미 윗세대에서 끝났으므로, 터를 잡고 대부호가 된 유서 깊은 버뱅크 가의 두 형제는 고정된 웨스턴에 정박되어 버린다.


<파워 오브 도그>가 서부극임을 인식하게 하는 것은 황야가 제공하는 풍경이다. 그러나 버뱅크 가의 웨스턴은 늘 멈춰있는 그림과 같은 정적인 봉우리이다. 말을 타고 다니는 필과 달리 조지는 레드밀의 미망인 로즈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더 자주 자동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한다. 농장의 축사는 분명 앞문과 뒷문이 있을 테지만, 항상 한쪽 문만 개방된 출구를 뚫고 나가면 프레임에 갇혀 제시되는 서부적 풍경보다도 장엄한 공중에서 찍은 트래킹 쇼트로 촬영된 포장된 ‘길’의 풍경이 보여진다. 즉, 영화를 압도하는 장소는 서부적 풍경보다도 기차와 자동차가 가로지르는 훼손된 풍경이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로즈의 섬세한 아들 피터가 농장에 오게 되면서부터 영화의 장르는 감정적 스릴러로 변모해간다. 


항상 고정된 풍경 속에서 남들은 보지 못하는 개의 형상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필에게 중요하다. 봉우리에 숨겨진 그림자 진 개의 형상은 야성과 문명 그리고 새로운 미국과 과거 미국의 경합으로, 무엇이 개의 머리를 차지할 것인가는 필과 그 형상을 알아보는 또 다른 인물인 피터로 병치된다. 개의 형상은 텅 빈 기표로서 이상적인 남성성으로 대변되는 브롱코 헨리로부터 필에게 전수된 지식이지만, 이 시대에 와서 사실상 그 지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민함이 된다. 필은 개의 형상을 헨리에게 배운 후에야 볼 수 있었지만, 배움 없이도 볼 수 있는 오리지널은 피터이다. 그러나 오만하고 거만한 필은 조지와 일꾼들은 보지 못했으나, 그것을 본 피터에게 ‘무언가’를 승계하고자 하고, 그런 필을 또 기민하게 알아보는 피터는 그가 어머니와 자신에게 행했던 일련의 실수들을 복수하고자 한다. 


영화 초반, 죽은 가축을 만지지 말라는 필의 말이 저주가 될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피터에 의해 필이 무너져 내리는 형국을 봐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영화에는 긴장감이 유영하고, 필의 남성적 에너지는 피터에게 전치된다. 피터가 농장에 도착하면서부터 형성되는 동성애적 에너지는 필의 오만으로부터 가능해지는 것이다. 레드밀 식당에서 필과 피터가 처음 만난 날, 필의 모욕에 훌라후프를 하며 혼자 분노를 삭이던 피터의 급작스러운 쇼트는 저 멀리 한 소녀의 등장으로부터 즉각 중단된다. 이어지는 쇼트는 없으나 아마도, 그날 피터는 그 소녀와 밤을 보냈을 것이다. 영화에서 인물을 나타내는 중요한 모티브는 클로즈업되는 발 또는 신발 - 로즈와 조지의 구두, 필의 박차가 달린 부츠, 하인의 신발, 피터의 흰색 스니커즈까지 - 이다. 피터가 흰색 스니커즈를 신고 청바지를 입은 채 농장으로 왔을 때, 영화는 그를 트래킹하며 마치 필을 벌하러 온 신처럼 그려낸다. 본래 청바지 역시 카우보이의 전유물이었지만, 시대가 변함에 따라 그 의미도 달라진다. 그리고 영화의 결말, 피터는 남성성의 극한이자 남성적 육체미와 감각에 완전히 매료된 필을 벌하는 것에 성공하고, 버뱅크 가를 차지한 외부인 로즈와 피터만이 영화의 결말에서 장갑 - 원주민이 준 수공예 장갑과 외과의사의 라텍스 장갑 - 을 끼고 있다. 


보지 못하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가 끝나고 묻게 된다. 나는 개의 형상을 보았는가 하고. <파워 오브 도그>에서 개의 형상을 본 이들은 무엇을 보았느냐고(혹은 오해했는가). 우리가 보았다고 말할 때, 우리가 본 개의 형상은 필의 것인가, 피터의 것인가. 피터가 원주민을 모욕하고, 그의 남성성으로 미국의 역사를 쓰려했을 때 - 승계하려 했을 때 - , 필의 부츠를 끝내 벗긴 뒤 깨끗하게 씻기고 양복을 입혀 관에 넣으며, 모든 일이 해결된 것처럼 그리는 엔딩이 서슬 퍼렇다. 어쩌면 오해일지도, 오만일지도, 지성과 통찰력일지도 모르는 작은 에피소드로 시작된 미국적임을 관에 묻어버리는 <파워 오브 도그>는 국가 정체성에 관한 서부극 장르에 대한 제임 캠피온식 주석처럼 보인다. 


작가의 이전글 퍼스트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