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해정 Oct 11. 2018

라디오 듣는 법

'띡' 
말일인데 금액이 얼마 찍히지 않는 걸 보니 이번 달엔 쉬는 날이 많아 대중교통을 덜 이용했나 보다. 개표구를 지나 지하철을 타러 내려간다. 5-2 앞에 선다. 북적거리는 발걸음이 근처에서 서성댄다. 다들 여기에 서야 환승이 빠르다는 걸 아는지. 닷새에 걸친 휴가를 보내고 온 사람들의 표정은, 열 마디 말보다 강하다.  


사무실 도착. 아직 8시 전이다. 매점에서 컵라면을 하나 먹을까 하다가 텀블러를 들고 탕비실로 간다. 직장인을 다루는 데 노련한 커피 머신은 고요하지만 강하게 움직인다. 원두를 가는 소리가 공간을 깨운다. 추석은 어땠던가. 부모님의 얼굴, 휘영청 밝은 달, 노견이 된 강아지, 소주와 늦잠. 커피를 들고 자리로 돌아와 허리를 세우고 포털에 접속한다. 메일은 얼마나 쌓여 있을까.  


결혼휴가와 연휴를 붙여 그랜드한 신혼여행에 다녀온 동료의 인사로 메신저가 시끄럽다. '동남아시아랑은 다르더라' 파도 소리가 묻어난 해변 사진이 마음을 흔든다. 연휴 전 새로운 회사에 연봉협상을 하러 간 동료가 말을 꺼낸다. '아무래도 거긴 아닌 거 같아. 연휴에 이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다른 회사를 노려봐야지.' 연휴에 이직 생각이라니, 과연 그렇다. '이번에는 대구에 나흘이나 있었어' 두 집안이 기독교지만 명절음식만큼은 제사 못지않게 차리는 동료의 말이 이어진다.  


사무실도 안부를 묻는 사람들의 말소리로 활기차다. '부장님 오늘 안 나오셔?' 몇몇 자리는 아직도 달콤한 휴가 중이다. '그래도 지난 설날보다는 나았어' '어떻게, 잘 쉬었지요?' 베테랑 며느리였을 선배들의 나지막한 수다와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인사를 건네는 상무님의 두꺼운 목소리와 발 구름 소리가 꽤 조화롭다. 


업무란 긴장의 끈을 다시 잡기까지, 잠깐의 소란을 즐긴다. 이 일이 꼭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는 일처럼 느껴진다. 회사라는 거대한 방송국이 운영하는 라디오. 조그셔틀로 주파수를 더듬을 때마다 다른 목소리와 사연 그리고 음악이 흐른다. 일방적으로 듣는 것뿐이더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소리에 교감하고 마음을 놓는다. 주파수 너머 사람, 사람이 있다는 걸 알기에.  
 


자정이 다 되어서였던가. 회식을 마치고 택시를 탄 일이 있다. 택시는 이내 동부간선도로를 타고 한강의 야경 속을 달렸다. 그때 라디오에서 어떤 노래가 흘러나왔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 산다 할 것을'. 날은 흐렸지만 반짝이는 한강과 어울리는 노래였다.  


"기사님. 이 노래 누가 부른 거예요?"

 "아, 갑자기 물어보니 생각이 안 나네. 리메이크 참 잘했어요. 그죠?"

 "인터넷에서 찾아봐야겠어요."

 "손님, 기다려보세요. DJ가 말해줄 때까지. 지금은 노래만 들어요. 라디오는 원래 이렇게 듣는 거예요." 


그치, 라디오는 원래 그렇게 듣는 거였지.  


누군가 나라는 사람에게 주파수를 맞추면 최백호가 소개하는 조관우의 '님은 먼 곳에'가 흐를 것이다. 라디오 듣는 법을 일깨워준 기사님의 말과 창문 밖으로 흐르는 불빛과 함께. 


소란을 즐기며 딴생각을 해보았다. 이제 일이라는 주파수에 다시 집중해야 할 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