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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May 30. 2021

허리가 나 배신함(1)

내가 일자(一字) 허리라니


작년 여름에 반려견을 목욕시키는데 등허리가 뻐근했다.


이 자세로 목욕시킨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왜 오늘따라 불편하지? 

의문이 들었지만 욕조에서 물에 흠뻑 젖은 채 꺼내 달라고 짖어대는 반려견 때문에 오래 생각할 수 없었다. 목욕을 마치고 허리를 펴자 통증이 말끔하게 사라져서 아마도 욕조 안으로 허리를 굽히고 있어서 그랬나 보다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 후에는 반려견을 목욕시킬 때마다 허리가 쑤셨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고통도 익숙해진다. 무척 낯설고 수상했던 통증과 구면이 되면서, 나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허리 안 하픈 현대인이 어디 있나?


그리고 나는 내가 주 3회 운동을 하는 '헬스인'이라는 사실을 믿었다. 

비록 코로나 바이러스로 헬스장 출입이 안 되어서 운동을 쉬어야 했지만. 

아무튼 나는 헬스인이기 때문에 작업할 때 4시간에서 6시간 정도를 한 자리에 붙박이처럼 오래 앉아있는 것쯤은 괜찮다고 생각 했다. 나는 운동하니까.

한 시간에 십 분씩 일어나야 건강에 좋다고 하지만, 남의 영업장에서 별다른 이유도 없이 일어나 있는 건 왠지 부끄러워서 화장실 갈 때는 빼곤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것도 어깨가 말린 구부정한 자세로 노트북 모니터를 보기 위해 목을 쭉 빼고, 등을 구부린 채로 반드시 다리를 꼬거나 양반 다리를 한 채로.

괜찮아. 나는 운동하니까. 


어떤 재난이 시작되기 전에는 삼백 개 이상의 징조가 나타난다는 말이 있다.

아니 오백 번이었나? 삼백 번이든 오백 번이든, 누군가에게 경고를 하기에는 충분히 많은 횟수.

한 오백 번쯤 스쳐가는 통증들이 있었고 나는 오백 번쯤 허리를 콩콩 두드렸던 것 같다.



재난은 오른쪽 고관절 부위에서 시작되었다.

관절 깊숙한 곳이 찌르는 듯이 알싸하게 아팠다. 처음에는 자세를 바꾸면 사그라들더니 나중에는 온통 그 아픔밖에 생각할 수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제일 억울한 건 걷기가 불편해졌다는 건데, 얼마 전 조카를 임신하고 있어 만삭이 된 동생이 찾아와 함께 쇼핑을 하러 갔을 때 내가 만삭의 임산부보다 더 걷지 못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바로 다음날 정형외과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도대체 정형외과는 어디에 있는가?

한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랄 때까지 정형외과를 찾아간 적은 손에 꼽는다. 정형외과를 제집 드나들듯 하는 할머니와 아빠한테서 병원 이름은 들어본 적 있지만 그 병원이 어디 붙어 있는 줄은 몰랐다. 내 라이프 스타일의 바운더리에 절대 들어올 일 없을 것 같은 장소. 나는 이번 기회로 우리 동네에 정형외과가 무척 많다는 사실과, 그곳들이 노인분들로 항상 북적인다는 것과, 그래서 30대인 나 같은 손님이 찾아가면 '교통사고세요?'라는 말을 듣는단 걸 알게 되었다.


"허리 아랫부분이 많이 아프고, 오른쪽 골반쪽도 아파요."

"어떤 식으로 아프세요?"

"그러니까... 뻐근하고... 뻐근한데..."


통증을 설명해본 일이 없으니까 의사에게 설명할 때는 유치원생이 된 기분이었다. 

어떻게 아프냐는 질문에 머릿속을 한참 뒤져도 '뻐근하다. 아프다'는 표현밖에 나오는 것이 없었다. 

의사의 도움을 받아서야 '찌르는 듯하다', '저릿하다', '끊어지는 듯하다'는 표현을 쓸 수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별로 쓸 일은 없었던 이런 표현들을 새롭게 상기할 수 있었다는 것을 기뻐해야 하나.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내 척추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나의 엑스레이 필름을 보는 것처럼 불쾌하다.


"일자 허리네요. 원래는 S자로 커브가 있어야 하는데 일자로 직선이어서, 그것 때문에 꼬리뼈 경사가 급격해져서 아픈 거예요. 골반통은 허리랑 연관통이고."

"그럼 어떻게...?"

"도수치료랑 주사치료도 받아야겠는데?"

"그럼 돌아는 오나요...?"


열심히 교정 치료하면 돌아오기는 하지만 아주 힘들다고 한다.

나는 무척 의기소침해졌다. 배신당한 기분도 들었다. 완벽한 1자 모양으로 뒤로 뉘어져 있는 자신의 척추 모양을 본 사람이라면, 게다가 나처럼 평소에 운동까지 해온 사람이라면 배신감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거다. 

그동안 운동한다고 들인 시간과 돈이 얼마고, 흘린 땀이 몇 리터 인가.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척추가 이런 반란을 일으켰는지 모르겠다.

나한테 뭐가 그렇게 서운했니??


주사치료를 받으려고 기다리면서 끝도 없는 자책과 후회, 그리고 수많은 질문들이 이어졌다. 

오후에 잡아놓은 도수치료도 걱정이다. 주사는 한번 맞으면 끝이지만...


그런데 그 주사가 엉덩이 살에 한번 맞고 끝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주사실이란 데에 들어가니 얼굴 부분만 동그랗게 구멍이 뚫린 침대가 있었고, 나에게 거기 누우라고 한 사람은 아까 엑스레이실에서 봤던 방사선사가 아닌가.

그 침대에 엎드려 누워있는 나의 바지를, 엉덩이골 아래까지 내리게 할 때부터 섬찟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보통 주사가 아닌 것 같은 아우라.


불현듯 인터넷에서 읽은 무서운 글이 떠올랐다.

주삿바늘이 무척 길고 굵은 주사를 척추까지 밀어 넣는다는, 고통이 어마 무시해서 환자들이 비명을 지른다는 그 악명 높은 척추주사...


침대에 엎드려 바지를 엉덩이 끝까지 내린 채로 의사를 기다린다.

식은땀이 흐르고 목이 탔다.

두려움 속에서도 배신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내 의지대로 따라주지 않는 몸에 대한 강한 배신감.


진짜..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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