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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Jan 24. 2021

[독서기록] 니클의 소년들

"그 녀석들은 죽어서도 골칫덩이였다." 

『니클의 소년들』




콜슨 화이트헤드 저

2020년 퓰리처 수상





독서모임에서 토론했던 올해의 첫 책이다. 미국의 역사 깊은 인종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본성을 심오하게 파고드는 철학적인 책이다. 가볍지 않은 주제이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층위도 깊지만 그 이야기를 흑인 소년들이 지냈던 ‘감화원’으로 풀어내는 작가의 영리함에 감탄하며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에 흠뻑 몰입해 책을 넘기게 된다. 


우선 주인공이 청소년이라 그를 둘러싼 세계를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주인공이 예상치 못한 운명에 휘말려 나락으로 떨어지는 극적인 흐름도 흥미롭다. 또 그렇게 들어가게 된 감화원에서는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의 군상을 볼 수 있는 것도 재미 요소다.  그러나 그런 장치들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어둡고 불편하다. 책을 덮고 머리를 식히고 마음을 다스려야 할 만큼 강렬한 감정에 휘둘릴 수도 있다. 그래도 끝까지 책을 읽게 만드는 힘은, 이 끔찍한 이야기가 실화라는 점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반성이며 그런 끔찍한 인생을 살다 간 이름 없는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나를 대신해 이 이야기를 파고들어 세상에 알려준 작가에 대한 경의일 것이다. 



이 이야기는 미국에서 인종차별금지법이 거론되고 시행되기 시작한 1960년대가 배경이다. 커다란 변화가 시작될 때는 언제나 혼란스럽고 용기가 필요하기 법이기에, 이 시기에 용기 있는 흑인들은 극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흑인 출입이 금지된 카페에 들어가 당당히 주문을 했다가 쫓겨났던 사람, 역시 흑인 탑승이 금지된 버스에 올라 망신을 당한 사람... 일면 그런 사람들이 무모하고 유난스럽다 느껴질 때도 있으나 그런 용기 있는 사람이 있어 우리의 인식 변화가 빨라진다는 것을 반대하진 못할 것이다. 


흑인 인권 신장이 거론되면서 일부 보수적인 백인들의 흑인 혐오가 더욱 활개를 치던 그때, 무식하고 가난한 흑인들이 모여 사는 탤러해시의 영리한 학생 ‘엘우드 커티스’는 ‘마틴 루서 킹’의 연설에 감명을 받고 세상은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학교 선생의 추천으로 지역 대학에서 강의를 들을 기회를 얻게 되어 기대에 부푼 채 대학교로 향하던 첫날, 엘우드는 히치하이킹을 해서 얻어 탄 차가 알고 보니 훔친 차였던 것이 밝혀지면서 그 차에 타고 있었다는 이유로 청소년 감화원 <니클>에 들어가게 된다. 


말하자면 <니클>은 청소년 감옥이다. 거기서 흑인 학생들은 인간이 아닌 짐승 취급을 받으며 사소한 잘못으로도 죽음에까지 내몰릴 수 있는 체벌을 당한다. 몇십 년이 흐른 뒤 니클이 있었던 자리가 발굴되면서 수많은 이름 없는 백골이 나왔다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흑인 학생들을 죽을 때까지 때리고 학생이 죽으면 아무도 모르게 땅에 묻었다. 


책을 읽다 보면 ‘말도 안 돼’라는 말이 버릇처럼 튀어나온다. 엘우드가 억울한 이유로 니클에 온 것부터가 부당하고, 또 니클에 들어온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런 부당한 이유로 니클에 끌려왔다는 것도 상식 밖이기 때문이다. 성장기 아이들에게 형편없는 식사를 주는 것도, 학생끼리 싸움이 나면 잘잘못을 가리지 않고 살이 파여 들어갈 만큼 채찍을 휘둘러 때리는 것도 말도 안 된다. 지금의 시대를 사는 나에게는 하나부터 열까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어서 그런 부분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분노를 파도를 쳤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이럴 수 있을까. 백인이라는 이유로, 어른이 아이에게 어떻게 그런 몹쓸 짓을 할 수 있을까.


반면 작가는 모든 것을 덤덤하게 묘사한다. 니클의 아이들도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지 않고, 그저 불운은 ‘동전 던지기’라며 그런 예측 불가함을 처음부터 피하는 법을 익혀간다. 친구가 부당한 일을 당해도 못 본 척, 불의에 나서지 않고 몸을 사리면서 아이들은 니클에서 점점 무력해진다. 처음에는 영리하고 도전적이었던 엘우드도 끔찍한 체벌을 겪고 나서 다른 아이들과 다름없이 겁먹고 주눅 들게 되는데 그 부분이 가장 마음 아팠다. 무엇이든 용감하게 싸우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던 엘우드는, 자신에게 그런 개념을 심어준 마틴 루서 킹을 원망할 만큼 순응적인 사람으로 변하고 아예 싸움을 그만둬 버린다.



“그를 망가뜨린 것은 스펜서가 아니었다. 2호실에서 잠들어 있는 새로운 적이나 감독관도 아니었다. 그가 싸움을 그만두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소등 시간까지 무사히 하루를 보내기 위해 고개를 수그리고 조심스레 행동하면서 그는 자신이 이겼다고 스스로를 속였다. 자신이 문제에 휘말리지 않고 잘 지내고 있으니, 니클에 한방 먹인 셈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는 이미 망가진 상태였다. 킹 목사가 옥중 편지에서 말한 검둥이들처럼 변해버렸다. 오랫동안 억압당한 끝에 그냥 현실에 안주하며 멍해져서 그 현실을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침대로 여기고 잠드는 법을 터득한 검둥이.” p.196



니클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서 마음이 답답했던 이유는 물론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끔찍한 체벌 때문이기도 했지만 인간의 자유를 앗아간 억압 때문이었다. 내가 너무나 당연히 누리고 있는 이 자유가 과거 어느 시대에는 그렇지 못했을 거라 생각에 미치면서 조금 무서워지기도 했다. 이 책이 흑인으로 상징하고 있는 약자는 신분차별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식민지 국민일 수도 있고, 남성으로부터 억압당했던 여성일 수도 있다. 아마도 나는,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어떤 상황에서 약자의 역할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고, 이 책은 그런 기억들을 불러일으켜 과거의 고통을 불러온다. 반항해본 적도 있고, 반항하다 무력해본 적도 있고, 그래 봤자 변화하지 않을 거라 체념한 적도 있다. 나는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책을 읽으며 가늠해본다. 그랬더니 조금 섬뜩해졌고 다시금 반성을 하게 된다. 


그래도 엘우드는 행동하기로 했고, 무모한 시도를 해보기로 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이 책을 읽게 될 미래 독자들을 위해 감춰놓겠지만 그 후의 이야기는 뻔한 ‘성공기’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은 일러두고 싶다. 마틴 루서 킹과, 그리고 출입 금지 카페로 당당히 들어갔던 용감한 사람들의 정신은 엘우드의 작은 마음에 돌을 던져 반향을 일으켰고, 또 그의 행동은 다른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쳐 결국은 변화를 야기시켰다는 것도 강조하고 싶다. 지금은 나약해 보이는 나의 정신도 훗날 누군가에게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직은 포기를 미루고 싶다고 작은 다짐을 하게 된 계기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그것은 인종차별 같은 거대한 힘에 대한 도전일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도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희망을 놓기에는 도전에 도전하는 우리의 용기가 아름답다. 



“하지만 그는 비틀거리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약 23마일 지점에서 반쯤 걷다시피 하며 레트리버처럼 혀를 내밀고 헉헉거리는 사람들. 나이키를 신은 발이 피투성이 고깃덩어리처럼 변했는데도 기를 쓰고 구르듯이 결승선을 통과하는 사람들. 뒤에 처져서 절뚝거리는 사람들은 코스를 제대로 달리지 못했지만 자신의 내면을 향해 깊은 곳까지 달려갔다가 거기서 발견한 것을 쥐고 다시 밝은 곳으로 돌아왔다... 결승선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군들 그런 사람을 축하해주지 않겠는가.” p. 201 



나도 흔들리는 사람이 좋다. 흑인 인권도 좌절하고 실패하며 지금의 평등을 거머쥐었고, 지금도 완전한 평등을 위해 나아가야 할 길이 험난해 보이지만 그래도 옮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나아가는 것은 흔들린다는 것과 동의어라고 생각한다. 흔들리는 사람은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엘우드의 고귀한 행동이 마음에 잔잔하게 남는다. 그것을 이어받은 ‘터너’의 삶도 아름다워 마음에 아른거린다. 이 책을 읽은 후 내 영혼을 다시 정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크고 작은 실패들을 겪고 자꾸만 무기력해지는 영혼이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가자고 추슬러보고 싶다. 나에게 지금의 자유를 준,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희생을 위해서라도 보이지 않는 결승선을 향해 나아가자고. 





더 생각해 보면 좋을 것들

- 미국의 인종차별 역사

- 흑백 인종차별의 현주소는 어떨지 – 작년 백인 경찰의 흑인 질식사 사건 등

- 니클의 실제 모델인 ‘도지어 남학교’ 현재 발굴 현황

- 작가 콜슨 화이트헤드의 또 다른 작품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찾아본 기사들

https://www.chosun.com/culture-life/2021/01/12/FC62HDCLMZAKXIGLG3ZWV6AM5Y/?utm_source=naver&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naver-news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31/2017083100148.html


(기사 발췌) 

당신의 소설은 사회 변혁을 위함인가?

"소설은 자기만족인 동시에 세상을 파악하는 방식이다. 어릴 적 판타지 소설가 스티븐 킹, SF 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을 보며 자랐다.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작업이 완벽한 직업처럼 느껴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qm8XP2k1TBo&ab_channel=%EC%9D%80%ED%96%89%EB%82%98%EB%AC%B4TV


(유튜브 인터뷰 발췌)

"<니클의 소년들>의 두 영웅(엘우드와 터너)을 만들 때는 제 내적 딜레마를 빌려왔습니다. 트럼프 정권 아래서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고 믿기 힘든 증거들이 많지만, 저는 제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세상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제 내면에는 희망적인 부분과 실용적 또는 냉소적인 부분이 있고,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는 엘우드에게 세상의 악의 세력과 맞서는 모델을 제시해 줍니다. 만약 네가 떨쳐 일어난다면, 정의를 위해 싸운다면, 사회 질서를 재정립할 수 있다고 말이죠. 반면에 터너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살아남았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요. 엘우드와 터너가 소년원에서 만날 때 어떻게 살아가고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는데, 저에게는 그게 소설의 핵심입니다. 두 가치관 사이의 전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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