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너의 미래를 위해서였다.

by 해세



부끄럽게도 최근이 되어서야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전에는 역사를 아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된다는 말이 와닿지 않았고, 현재를 살아가기도 벅찬데 과거를 공부하는 것이 시간낭비, 혹은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졌다.

미숙한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듯이, 옛사람들은 어설프고 어리석어서 현재의 나의 수준에 미치지 못할 거라는 오만함에서 비롯된 생각이었다.

역사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은 학창 시절에 의무적으로 외워야 했던 역사의 연도 순서, 인물들의 이름 따위에 질려서인 것 같다.

시험을 보기 위해서 주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연도를 외우긴 했지만 왜 이런 걸 외워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고, 역사는 단순 암기 과목으로 느껴져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뿌리가 없이 항상 붕 떠 있는 느낌을 받았던 건지도 모른다.

사람은 사회와 떨어져 살아갈 수 없고, 내가 살아가게 된 장소와 시간에 영향을 받는 존재임에도 나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채 현재의 불안함에 갇혀 있던 것 같다.


역사에 관심을 가졌다고 해서 모든 걸 알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이 조금 넓게 보이기는 한다.

오늘은 광복절이었다. 이제까지는 휴일 중에 하나였고 나에게는 여름의 끝을 상징하는 기준이었다.

광복절이 지나면 나는 절묘하게 바람에 섞이는 가을을 감지해 냈다.

나는 여름을 좋아하니까 여름이 끝자락부터 시들어가는 것을 섬세하게 느끼면서 혼자서 여름을 애도한다.

광복절은 그 정도의 날이었다.


그러다 최근 팟캐스트로 역사 이야기를 접하면서 역사가 인간의 이야기임을 알았다.

진행자가 과거의 인물이 어떻게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게 되었는지 들으면서, 역사는 내가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아니라 개인들이 만들어내는 작은 파문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았다.

한 인간을 알면 역사의 흐름을 알 수 있었다.

박정희는 어떤 결핍에서 비롯된 심리로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었는지,

고려의 무신들은 어떤 울분이 쌓여서 정변을 일으키게 되었는지.

그들은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혹에 약하고, 욕망에 휘둘리고, 사사로운 것에 상처받고, 사회와의 갈등과 부침 속에서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의 나보다 조금도 모자라지 않고 어리석지 않았다.


시험에서 자유로워진 나는 역사를 파편적으로 알아도 괜찮았고, 다른 사소한 것들은 무시하면서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만 알면 되었다.

다량의 정보가 버거우면 원하는 것만 기억했다가, 나중에 반복하면서 얼마든지 새롭게 받아들여도 된다.

선사시대부터 순서대로 배우지 않아도 되고, 고려로 갔다, 원나라로 갔다, 일본으로 갔다 하면서 마음껏 기웃거려도 된다.

그게 너무 자유롭고 통쾌하기도 하다.

처음엔 이렇게 파편적으로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전체적인 역사의 순서를 아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산발적으로 알고 있던 지식들이 퍼즐처럼 들어맞으면서 쾌감이 느껴질 때도 있다.


그렇게 파편적으로 배운 역사 중에서 내 마음을 울린 것은 그래도 현대사였다.

내가 딛고 서 있는 이 땅을 얻기 위해 목숨 바친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이 다르게 느껴진다.

지금의 나라면 그때 그 사람들처럼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하고 신념에 목숨을 걸 수 있을까.

갖은 수모와 고문을 당하면서도 의지를 굽히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까.


오늘 광복절을 맞아 노들섬에서 태극기 전시를 한다기에 다녀왔다.

이전의 나였다면 무심코 넘겼을 전시 광고에 흥미가 간 것은 최근 알게 된 광복군 열사들의 존경스러운 투지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끝없는 실패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간 그들의 의지는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나를 숙연하게 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광복절의 뜻을 기리고 싶었다.

노들섬에서는 여러 역사적 시점에 제작됐었던 태극기를 커다랗게 재현하여 광장에 전시하고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웅장하고 힘차게 움직이면서 그 사이로 뻗어 나온 태양빛이 그 아래 펄럭이는 태극기를 장엄히 비추었다.

내 키의 세 배가 넘는 거대한 크기의 태극기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무겁고 코끝이 시큰했다.

태극기가 움직일 때마다 그 속에 서린 사람들의 한이 너울거리는 듯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으며 그 아래 스러져갔을까.

지금의 우리는 상상도 하지 못할 숭고한 목표를 위해서.


대형 태극기 앞에 쓰여있던 글귀는 아름답고 슬퍼서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독립, 너의 미래를 위해서였다.


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내 목숨을 바친다 해도 올지 안 올지 알 수 없는 독립을, 미래의 세대를 위해서 투쟁하는 마음이란 것은.

동료가 죽고, 거사에 실패하고, 당장 오늘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 속에서 어떻게 독립에 대한 의지를 이어갈 수 있었던 걸까.

감히 상상이 되질 않는다.


노들섬에는 휴일을 맞아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은 행복하고 자유롭고 미래에 대한 희망에 차 있었다.

이 평온한 일상을 선사해 주기 위해서 우리의 선조들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을지 생각하니, 노들섬에 나온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평화로운 분위기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 사람들의 무지한 순진함이 너무 소중해 보였다.

끔찍하고 무서운 일들은 알지도 못하고 경험해보지도 않은 이 순수함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선조들은, 광복적이 어떤 날인지 의식하지 못한 채, 그저 휴일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이 평화로운 날을 위해 목숨을 바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너무나 많은 빚을 졌다.

이제까지 과거를 알지 못해도 아쉬울 것 없는 인생을 살았으니까.

너무 안락하고 대수롭지 않고 지루하기까지 한 인생을 살았다.

그렇다면 내 인생도 별 볼일 없지 않은 것이 아니고, 이 하루하루가 소중한 것이 아닐까?

내 이 느긋한 휴일을 만들어주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나의 하루는 거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값지고 소중한 것이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노들섬에 비추는 햇빛 한쪽, 넘실거리는 강물과 그 너머로 보이는 아파트와, 세련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갑자기 나에게 주어진 행운처럼 느껴진다.

나는 나를 위해 죽어간 사람들의 미래다.


조금 더 멋있게 살고 싶어졌다.

역사를 왜 배우는지 너무나 절실히 느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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