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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Aug 24. 2017

요즘 일과


영화 할 때는 드라마를 우습게 봤다.

영화판 사람들의 태도 자체가 그랬고, 영화 환경이 드라마보다 열악하고 예술적인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드라마는 저속하고 쉬운 장르 같았다.

두 시간이면 끝날 이야기를 16부로 구구절절이 늘려놓은 수다스러운 이야기.

그런데 신기하다. 내가 손대기 시작하면 별거 아닌 걸로 보이던 일들도 어려운 걸 보면. 


나는 끈기가 부족한데 드라마는 영화보다 장기 레이스다.

16부라니. 

영화는 기껏해야 100페이지면 끝났는데, 드라마는 한 편에 40-50페이지다. 

끝까지 흡입력 있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려면 

인물들의 깊이, 성격, 과거, 관계 등도 개성적이고 입체적으로 그려야 한다. 

약간 오바스럽지만 재치 있는 에피소드들이 연속적으로 등장해줘야 하고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감정과 감동이 있어야 하고 

드라마 전체를 아우르는 결정적인 사건, 미스터리 등이 있어야 한다. 

영화에서는 큼직하고, 깊은 감정을 다룬다면

드라마는 소소하고 일상적인 감정, 사람 간에 오고 가는 사소한 감정이 대부분이다.

나에겐 그런 작은 감정의 밀고 당기기들이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게다가 나는 말수가 적은 편이라서 치고받는 대사를 쓰기가 아직 힘이 든다. 

같은 말을 해도 재치 있게 늘려 말하는 판소리 같은 사람이 있고

나처럼 간명하게 치고 빠지는 시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김은숙의 도깨비를 조금씩 복기하면서 밀려드는 자괴감.

대사가 찰지고 맛있다.

그냥 볼 때는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쓰려니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설레는 딱 김은숙 대사. 

저 정도의 작가와 비교하지 말자고 나를 추켜세워보지만, 

오늘도 내 노트에는 빙글빙글 낙서만 늘어간다. 

남들은 열심히 일했을 오늘, 난 뭘 한 거지?




아홉 시 반에서 열 시 정도에 동네 카페에 착석한다. 

어제 구상하다 관둔 곳에서 다시 구상을 이어보려고 노력한다. 

인물 세팅은 대충 했는데, 개연성이 맞지 않는 구멍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그걸 메워보려고 머리를 짜내다 보면 억지 설정과 무리수들이 난무한다.

다시 줄을 좍좍 긋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모든 인물을 이어 줄 수 있으며, 주제를 관통할 수 있는 적절한 사건이 필요하다.

드라마 전체를 아우르는 사건이 뭐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것은 떠오르지 않고 이야기만 복잡해진다.

이야기는 심플해야 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러다 보면 이 얕은 인물들로 16부를 끌어갈 자신이 없어진다.

도대체 어떤 일상적이고 소소한 감정들로 16부를 채울 수 있을까?

그걸 생각하다 보면 때려치우고 싶다. 

집중력이 흐려지고, 자꾸 카톡과 인스타를 확인하고, 왠지 이쯤에서 레퍼런스라도 보면

뜻밖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펼쳐보는 영화와 로맨틱 코미디류의 드라마들. 

그걸 카페에 앉아서 보다 보면 왠지 어깨가 움츠러든다.

누가 나를 대단히 할 일 없는 여자로 볼 것만 같아서 모니터 밝기를 자꾸 줄이게 된다. 

어떤 여자가 맨날 찾아와서 커피 한잔 시켜놓고 머리를 쥐어뜯다가 

한갓지게 드라마나 보고 있으면, 나부터도 한심하게 볼 것 같다.

내 등 뒤에 '열일 중'이라고 써 붙이고 싶은 욕구가 한차례 지나간다. 


그렇게 내면의 자괴감이 깊어질 때쯤 배도 고파진다. 대략 오후 한 시나 두시쯤.

가까운 집에 들러서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카페로 오는 경우도 있지만,

가족들과 마주치기 싫거나 비가 무지막지하게 내려서 집에 가는 수고를 생략하고 싶을 때는

그냥 카페에서 파는 샌드위치를 먹는다. 

약간 논다는 기분으로 평소 내 취향인 영화나 만화를 보려고 하지만,

샌드위치 한 입을 먹는 순간 뭔가 스스로 처량하다고 생각한다.

쓸데없는 감상에 젖지 말고 힘차게 밥을 먹자, 노동자여.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나면, 

여느 회사원이 그렇듯이 산책이나 수다로 몸을 움직이고 싶다. 

하지만 딱히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고, 혼자 동네를 배회하는 것도 좀 재미없어 보이니까 그냥 제자리에 있기로 한다. 

그러다 보면 지겹고, 외롭고, 집중력이 떨어진다.

점심을 먹는 순간, 거의 오늘 작업은 종 쳤다고 보는 것이 정답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배고픈 걸 참고 그런 인간은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직장인 정도의 시간은 채워야 한다는 혼자만의 기준 때문에 자리를 옮겨보기로 한다.

버스를 타고 좀 다른 분위기의 카페로 가서 분위기 전환을 시도한다. 

그런데 어쩌나. 카페는 바뀌었지만 나는 이미 많은 감정 소모를 한 뒤다.

이제는 "내가 이 드라마를 해낼 수 있을까"하는 울적함이 남아있다. 

"어쩌면 나는 인생을 잘못 선택한 걸지도 몰라"

그런 나를 입 닥치게 하는 것이 나의 오후 일과.


그렇게 나와 씨름하다 보면 오후가 많이 지나있고,

해는 저물어가고 계절이 지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회사원들은 열심히 돈을 벌었을 텐데,

내가 만든 인물들과 이야기들은 어제에 머물러 있다. 

여러 가능성을 탐색하고, 새로운 인물들을 만들었다 죽였다가 수많은 시도를 해봤지만

결국 다 버리고 어제랑 다를 바 없는 이야기.

참고한다고 <괜찮아, 사랑이야>, <연애의 발견> 같은 것을 틀었다가 괜히 자존감만 떨어지고 있다. 

그러고 나면 외로움의 시간.

차라리 대본을 쓰는 중이라면 여러 인물에 빙의해서 대사라도 쳐보고 할 텐데

이렇게 기획, 구상 단계일 때는 어느 이야기에 집중해야 할지 정해지지 않아서 방황하는 기분이다. 

어떤 인물을, 어떤 설정을 잡고 따라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갈 곳을 잃는다.


아무것도 안 했지만 나 오늘 힘들었어, 방황하느라.

그렇게 얘기하면 딱 알아먹을 누군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무리 보잘것없는 아이디어라도 이러면 어떠냐고, 툭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다른 작가랑 비교하지 마 잘 하고 있어,

내가 매일 나에게 해주는 이야기들을 다른 누군가가 해준다면 더 믿음이 가고 힘이 날 거 같은데.



누군가 필요하지만.


오늘부터 남자는 제로.

어젯밤에 자리에 누워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번 달에만 스쳐가는 인연 세 명을 정리하고, 이제 정말 아무도 남지 않았다. 

기댈 곳도 없는 주제에 더 만나보지 왜 칼 같이 정리를 했느냐고 묻는다면,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과 예의를 차리면서 감정 소모를 하느니 차라리 외로움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자가 제로인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다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이상현상이 발생하다가 다시 제로인 상태로 돌아가겠지.

마음이 제대로 안 될 거면 일이라도 잘 풀렸으면 좋겠다.

어디 마음 줄 곳도 없으니까 내일부터는 일이라도 잘 해보자.

내일은 오늘보다 잘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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