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세 Sep 05. 2017

이번 여름


바람이 선선하다. 이번 여름을 돌아본다. 


여름의 많은 면을 사랑한다. 특히 더위 때문에 인간의 이성이 느슨해지는 것을 좋아한다.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속살과 함께 드러낼 수 있는 본능도 좋다. 더 많이 밖으로 나가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좋다. 적극적으로 허물어지기 위해 완벽한 피서지를 찾는 것도 좋다.


이렇게 풀어놓고 보니까 알겠다. 내 경우에는 더위로 행인의 옷을 벗게 만들어서 바람과의 내기에서 이겼다는 어느 동화처럼, 바로 태양의 그 부분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더위가 사람들을 벗게 만드는 것이 좋고, 나 스스로 벗는 것이 좋다. 여러 의미에서.


이번 여름에 나를 마음껏 풀어놓고 마음껏 드러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만큼 공허해진 이유가 뭘까. 나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노느라 말라버린 통장처럼 모두 비어버렸다. 방탕한 한 여름밤의 파티를 마치고 일어났는데, 더럽고 작고 초라한 집에 나 혼자 남은 기분이다. 모든 걸 잃은 후다. 


지독한 여름을 겪었다. 사람을 믿지 않게 되었고 사랑도 믿지 않는다. 돈 때문에 일 하고, 돈도 많이 벌고 싶어 졌다. 천박한 것을 함부로 경멸할 수 없게 되었다. 쉽게 무기력해지고, 회의는 짙어졌다. 행복한 사람들의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다. 아무도 나를 떠나갈 수 없게 젖은 싸구려 전단지처럼 들러붙고 싶다. 내가 하나도 소중하지 않다. 자꾸 나를 실망시키는 나. 


내가 사랑했던 여름, 수명을 다 하고 말라죽은 벌레의 뒤집어진 배처럼 허옇게 바래버린 여름.

이 여름이 자꾸 떠오를 텐데, 앞으로도 여름을 사랑할 수 있을까 자문해 본다. 시간이 대답한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면 지금의 끔찍한 여름조차 그리워지게 될 거라고. 언젠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여름도 있을 거다.

내가 이 지경인 것도 금방 지나갈 거라고 위안삼아 본다. 여름이 어느새 왔다가 어느새 가버린 것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요즘 일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