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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먹는 동물의 얼굴을 본 적이 있나요

얼굴 없는 동물들       


인간이 사랑하는 개나 고양이를 제외하고 최근에 본 동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 기억하는가. 동물을 볼 수 있는 곳, 하면 자연스럽게 동물원을 떠올리겠지만 사실 동물원보다 가깝고, 동물원보다 쉽게 볼 수 있는 건 마트다. 대신 동화책 속에서나 보아왔던 천진난만한 동물의 모습은 기대하면 곤란하다. 소나 돼지는  형태를 전혀 알 수 없는 채로 보기 좋게 잘려 마트 정육 코너에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고, 닭이나 오리 역시 원래 모습을 알 수 없는 모양으로 먹기 좋게 요리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혹 운이 좋아 야생동물이라도 보았다고 말한다면 유감스럽지만 그건 죽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는 뒷모습이나, 도망치다 결국 로드킬을 당해  도로에 널브러진 살덩어리가 아닐까 싶다. 너무 극단적인 예라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네 발로 걸으며 살아 돌아다니는 소나 돼지를 본 적이 언제인지 한참을 생각해야 한다면, 이들이 사는 곳은 내가 사는 곳과 한참 떨어져 있어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곳이라는 걸 떠올리면 이상황들이 마냥 억지스럽다고 말할 수 없을 테다.

 생각해보면 태어나 처음 본 돼지는 동화책 속에서 보았던 진흙탕에 굴러다니며 코를 벌름거리는 돼지가 아니라 삼단 기름이 층층이 껴 있는 고소한 삼겹살이다. 어른이 되고 나서 지친 하루를 위로하기 위해 주문한 치킨에  왜 닭다리가 하나밖에 없냐고 컴플레인을 해본 적은 있어도, 왜 닭대가리가 없냐고 컴플레인을 해본 적은 없다. 오히려 닭대가리가 들어가 있으면 이물질이 들어갔다고 당장 업주를 소비자고발센터에 신고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개업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테이블 위에 떡하니 자리 잡은 돼지 얼굴을 보면 성공을 기원하는 간절함보다 동물 학대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목이 잘린 채로 웃고 있는 돼지의 얼굴은 말 그대로 기괴하고 그로데스크 하다. 동물의 살생을 직접 본적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연상케 하는 사물을 보았을 때 불편하고 불쾌함을 느낀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요즘 개업식에서 돼지머리를 보기 어려운 여러 이유 중에 하나는 이것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비용 때문이겠지만)

우리 집 식탁 위에 잘 차려진 동물들이 어디서 태어나고 어떻게 살다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잘 아는 사람도 없지만, 사실 특별히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다. 궁금한 거라곤 이 부위가 어느 부위인지, 혹은 국내산인지 수입산인지, 친환경이나 유기농 스티커가 붙여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정도다. 그것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길러졌는지 고민하는 시간은 고기의 등급과 맛, 그리고 가격을 생각하는 시간에 비교하면 찰나에 가깝다. 혹 깔끔하게 포장 되기 전, 맛있는 음식이 되기 전 동물의 모습이 어땠을지 질문하면 그것이 왜 궁금하냐고 반문한다. 중요한 건 맛이지 그것들이 살아왔던 생태계도,  생김새가 아니므로.

     

 공장에서 크고, 또 죽는 동물들   

    대안 축산업자 이동호의 <돼지를 사랑한 채식주의자>는 새끼 돼지를 받아 키우고 도축하는 과정을 유쾌하게 담은 책이다. 이 책은 폭력적 사육방식을 고발하며 채식을 권하거나 고기를 먹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가하는 책은 아니다. 다만 동물을 먹는 고기가 아닌 탄생과 죽음이란 과정을 겪는 엄연한 생명체로 바라보았을 때 우리가 외면했던 동물다운 삶, 동물의 권리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한다.

이 책이 중점적으로 다루는 주제는 바로 공장식 축산의 폐해다. 공장식 축산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인위적 교배를 통한 단일품종 생산이고, 다른 하나는 밀집 사육이다.


동물이든 인간이든 생산 시기와 그 양에는 시간적 공간적 한계가 있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동물의 개체 수가 자연스러운 범위를 넘어 증가한다는 건 인위적인 무엇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생각해야 할 문제는 누가 개입하는가와 왜 개입하는가이다.

전자에 대한 대답은 인간이고 후자에 대한 대답은 고기를 많이 그리고 싸게 먹고 싶은 인간의 욕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욕심은 모든 사례에 최소 투자 최대 수익이라는 효율성 원칙을 적용하는데 살아 있는 동물에게도 예외는 없다. 공장식 생산을 축산업에 그대로 적용하며 대량 생산, 대량 소비를 가능케 하도록 한 것이다.


대부분 축산업계의 경우 관리와 통제가 용이하도록 암퇘지들의 출산과 발정을 같은 날로 조정한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호르몬제 투여를 통한 동물의 신체 통제는 가장 편리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호르몬제를 통해 임신 중지와 유지를 조절하고 직원의 업무 시간과 날짜를 기준으로 출산 날짜를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임신한 암퇘지는 1년에 2.5번 출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한 번에 열 마리, 1년에 25마리를 낳지 못할 경우 손실로 간주한다. 물론 손실의 주체는 돼지를 키우는 축산업자다. 수퇘지라고 해서 암퇘지와 다르지 않다. 씨돼지를 제외한 나머지 수퇘지는 빠른 성장과 청결을 목적으로 출산 일주일 안에 마취 없이 고환을 적출당하기 때문이다. 마취약을 쓰지 않는 이유가 비용 때문이란 건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을 정도다.


저자는 지금의 동물은 오로지 경제적 논리 안에서 탄생하고 성장한다고 표현한다. 발정기를 놓쳐 임신하지 못한 소는 사료를 축내는 애물이며, 새끼를 생산하지 못하는 암퇘지는 고민할 것도 없이 도축장 행이다.

또하나 품종 개량이란 명분으로 동물의 몸에 도전 의식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선을 드러낸다. 더 강력한 종자를 만든다는 기대감 아래 죄책감이나 미안함은 불필요한 감정이다. 그나마 품종 개량, 대량생산이 성공 한다면 다행이지만, 실패한다면 졸지에 잡종으로 취급을 받으며 고민없이 고기로 깔아뭉개직고 만다. 안 그래도 좁은 축사에 돈도 되지 않는 골지 덩어리를 쌓아놓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농업이든 축산업이든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려면 두 가지가 충족해야 하는데 하나는 효율적 수확을 위한 단일 품종 생산이고 , 다른 하나는 분업을 통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공장식 시스템이다.

단일 품종 생산은 한 종류의 동물(식물)만을 키우는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 전체 생산량은 늘릴 수 있을지 몰라도 면역과 관련하여 질병으로부터 취약해질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여러 가축을 함께 키우면 다양성을 통한 상호보완 작용을 통해 불균형에 균형을 맞춤으로써 외부 질병으로부터 강해질 수 있지만, 단일 품종만 키우게 되면 균형을 맞추기까지 그만큼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만큼 불균형의 범위와 정도도 넓어지기 때문이다.

단일 품종 생산, 또는 분리 사육은 효율적 대량생산을 위한 반 자연적, 반환경 시스템일 뿐 자연스러운 사육 방식은 결코 아니다. 단일 작물만 재배할 경우 땅이 황폐해지듯이 동물 사육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오직 단 하나만 남기려면(작가는 이를 불균형이라 부른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제거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물리적 또는 화학적인 개입 즉, 인위적 억제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불균형을 지속하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키우고자 하는 것만을 최대한 많이 남기기 위해서 억제의 규모는그만큼 늘어난다. 살충제 계란, 항생제 삼겹살은 규제가 느슨해서 또는 농장주 개인이 도덕적으로 나빠서 만들어진 괴물 음식이 아니라 단일 품종, 분리 사육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할 수 없는 나쁜 예 중 하나다.

각종 동물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하루가 멀다하고 사고를 치고  주인이 뛰어다니며 동물을 잡느라 고생하는 ‘동물 농장’은 아름다운 동화책에서나 볼 수 있는 유토피아에 가깝다.


공장식 축산의 문제점은 이미 오래전부터 동물 및 환경 단체의 노력 덕분에 여러 매체를 통해 알려져 있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를 사회 정책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나, 방안은 턱없이 부족하거나 미미하다. 공장식 축산 방식이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외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역시나 돈 때문이다.


생산가, 자본가 입장에서 물건을 만들어 내는 기계가 많으면 많을수록 돈을 벌 확률은 분명하다. 그런데 잘 돌아가던 기계가 고장 났다고 치자. 고쳐 쓰는 게 맞지만, 수리 비용이 예상보다 높을 경우, 또는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수리가 의미가 없다고 판단되면 기계는 폐기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낸다.


축산업을 운영하는 농장주에게 동물은 생산수단이다. 기계와 동물이 다른 점이 있다면 기계는 성장하지 않지만, 동물은 성장한다는 것이다. 새끼일 때는 먹이도 입히는 데 큰돈이 들지 않지만 클수록 사육과 관련한 직접 비용 및 여러 파생 비용이 들게 된다. 무엇보다 가장 큰 부담은 사룟값이고, 동물의 덩치가 커지면서 공간도 더 많이 필요하다.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한 방법 중 가장 효율적인 건 성장하기 전에 도축하는 것이다. 돼지의 자연 수명은 평균 15년이고 오래 살면 20년까지도 산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식탁 위에 올려진 돼지들은 모두 태어나 6개월을 넘지 않는다.

맛을 이유로, 가성비를 이유로, 사육 환경을 이유로 자기 명을 살다 가는 돼지는 야생의 돼지를 제외하고는 없다. (하지만 야생의 돼지라고 해도 자연 수명을 살아내기는 어렵다. 각종 방역과 농가 피해를 이유로 각 지자체는 야생동물 사살을 적극적으로 허용하기 때문이다.)     



본능대로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동물들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죽이고 피를 묻히며 찌르고 자르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면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동물에 대한 생각, 음식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고기가 되기 이전에 내 옆에서 살아 움직였던 생명체이었다는 걸 잊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제사상에 고기를 놓는 이유는 고기가 귀한 음식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생명을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조금이라도 위안받고 싶은 마음, 즉 양심의 가책을 해소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는 바다.

동물은 살기 위해서 스스로 생명을 죽이고 먹지만, 인간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맛있는 것을 위해서, 그리고 과시하기 위해서 잔인하고 끔찍한 과정은 삭제하고 절단되고 깨끗한 고기만 먹는다.


살처분. 사전적 의미로는 병에 걸린 가축을 죽여서 없앤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살처분은 전염병에 걸린 생물만 가하지 않는다. 바이러스가 검출되었다고 확인된 공간에 있던 동물이라면 모두 살처분한다. 잠재적 바이러스 전파자라는 이유로, 완벽한 방역을 목표로.

2019년 아프리카 열병이 유행하면서 각 지역에서 매일 살처분당한 돼지는 적게는 몇백 마리 많게는 몇천 마리였다. 이 기사를 보면서 사람들은 말한다. 돼지고기 값이 올라가겠어, 치킨값이 올라가겠어. 관련주는 올라가겠군. 완벽한 살처분엔 성공했을지 몰라도 완벽한 방역은 실패했다.

지금도 인간이 밝혀내지 못해 여전히 이름을 얻지 못한,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수많은 바이러스가 출현하고 있으니 말이다. 잔인한 상상을 하자면 이 지구에 인간보다 더 고등한 동물이 존재했다면 인간은 코로나바이러스의 잠재적 숙주라는 이유만으로 대량 살처분의 대상이 되진 않을까.


우리가 고기를 먹기 전에 진짜 알아야 하는 것은 무 항생 인증을 받은 고기인지, 살충제가 뿌려진 달걀이 아닌 고급이 유정란인지, 1등급 원유로 만든 고급 우유인지가 아니다. 그들이 어떻게 탄생하고 어떻게 길러지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죽는지, 그리고 최고라며 극찬하는 고기의 맛은 더없이 폭력적이고 잔인한 방식을 거쳐 만들어진 슬픔 사실이다.


좋다. 모든 것들이 모두 귀찮고 어렵다면 이것만이라도 기억하자. 고기를 남기지 않는 행위는 단지 노동자들의 피땀과 수고에 대한 감사함 뿐 아니라 내가 이 음식을 먹지 않았다면 초원 어딘가에서 뛰어놀고 꽃 피웠을 그들의 희생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애도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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