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

퇴로는 없다

by 해우소

소처럼 커다란 눈망울이 매력적인 나의 관식이 남편 추천으로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나는 애물단지 애순이도 되어보고 집안의 자랑 금명이도 되어보고 허기진 사고뭉치 은명이도 되어보고, 이제껏 좋아한 드라마들을 볼 때마다 그래왔던 것처럼 모든 캐릭터에 차례로 감정이입하며 그래, 나도 너라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주변의 미처 용서 못한 인간들이 하나 둘 스치며 그래 어쩌면 너도…하게되는 건 덤.


나에게 아버지란 부상길에 더 가까웠지만 그 부상길조차도 이해할 여지를 주는 품이 넓은 드라마. 배경음악처럼 모든 장면 뒤로 잔잔하게 깔리던 대한민국의 역사적 순간들은 같은 땅에서 같은 시대를 저마다의 모습으로 살아온 우리 모두를 잇는 연결고리가 되어주었고, 그건 마치 낯선 이들과 오랜 친구가 되어 소중했던 옛날 얘기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누군가를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가슴에 묻어도 보고 쫄딱 망했다가 다시 일어서도 보고 가진거 털어가며 아이들 키워 학교 보내고 군대 보내고 사고치면 뒷수습하고 독립시키고 파혼에 취직에 실직하는 것도 보고 시집도 보내고 그 작았던 아이가 또 아이를 낳고…일상에 쫓겨 지나치는 모든 순간이 돌아보면 연기처럼 사라질 듯 희미했을지도 모르는데, 누군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함께 추억해주는 섬세한 따뜻함을 보는 내내 느꼈다.


새아버지의 후처조차 전처 자식에게 도의적 장학금을 내미는 착하디 착한 동화같은 드라마.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얘기를 하고싶은 드라마. 단 한 사람과의 인연도 허투루 지나치는 법이 없고 결국에는 모두가 스스로 뿌린대로 거둔다는 서사는 어쩌면 환타지지만, 어딘가에 나의 소중한 누군가가 환생해서, 또는 한 번쯤 무심코 친절을 베풀었던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고 도울지 모른다는 기대만으로도 충분히 모두 다 잘 되기를 바라며 다정하게 살고싶어지도록 만드는 고마운 이야기였다.


그 와중에 뭐하러 내까지 챙겨주노? 니 내 아나? 내가 뭐라꼬?

언니도 가방 털리면 속상하니까. 같이 안 속상해야 더 좋죠.

그래 맞다. 같이 안 속상해야 더 좋다.


나를 건드리는 대사가 정말 많았던 드라마. 눈살 찌푸려지는 세상에서 남편과 아이들의 귀함과 그들을 위해 동동거리는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게 해준 오늘의 좋은 드라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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