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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마 Aug 09. 2023

07 나를 데리고 주방에 갑니다

김진경 셰프와 함께하는 요리수업 후기

Prologue : 어둠에 잠긴 주방이 가장 사랑스럽다  

 동이 트기 직전, 하늘은 잠에서 덜 깨어난 듯 푸르스레하고 공기는 더없이 투명하다. 아주 조그만 바람의 움직임에도 소리가 날 것 같은 고요한 새벽. 나는 주방에서 보내야 할 바쁜 하루를 잠시 미루고 소파에 앉는다. 잠든 아기가 가장 사랑스럽듯, 어둠에 잠겨있는 주방의 모습도 그러하다. 내 마음도 몰라주고 아침 햇살은 어김없이 조금씩 피어나, 주방 곳곳에 살며시 와닿는다. 컵, 믹서기, 밥솥이 형체를 드러낸다. 주방은 지난밤 정리된 모습 그대로다. 나는 작은 탄식을 내뱉는다. '아! 이제 다시 주방을 어지럽혀야 하는 시간이구나.'


 언제부터인가 매일 같은 공간에서 음식을 만들고, 치우고, 정리하고, 다시 만들고를 반복하는 것이 지겹게만 느껴졌다. 요리를 하기 위해 정리하는 걸까, 정리하기 위해 요리하는 걸까. 뭐든지 제자리에 놓아져 있는 상태를 좋아하는 나의 성향상, 각종 재료와 그릇이 섞이고 어지러워지는 요리 과정을 즐기기 어렵다. 닭이 먼저인지 계란이 먼저인지 묻는 것처럼 나의 주방은 답 없는 도돌이표를 맴돌고 있었다.


 그래서 요리 수업을 가야만 했다. 요리가 지겹다는 마음이 너무 깊어졌지만, 요리는 그런 내 기분과 상관없이 매일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일상에 이벤트를 만들어서라도, 나는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했다. 서론이 길어진 건, 평일 낮에 회사에 있어야 할 남편에게 미안한 부탁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에게 첫째 하원과 둘째 돌봄을 맡기고 3시간 요리 수업을 가기로 했다. 억지스럽지만 내게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새벽에 바라보는 정리된 주방과 식탁.


<H마트에서 울다> 북클럽 책거리 이벤트로 참여한 요리 수업

 나는 여름방학 총 5주간 매일 아침 6시에 <H마트에서 울다> 원서 읽기 북클럽에 참여했다. 북클럽은 테이크루트와 루트잉글리시에서 기획한 프로그램으로, 멤버들이 함께 오디오북으로 원서를 듣고, 책에 나온 단어와 유용한 표현들을 배운 후, 짧게 책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구성으로 돼 있었다. 북클럽의 마지막 책거리 행사는 북클럽 멤버들과 함께 하는 요리 수업이었다. 나는 <H마트에서 울다>를 주제로 영어공부, 책 읽기, 요리 수업까지 모두 경험할 수 있었다.


This is what I wanted, I realized, after so many days of decadent filets and pricey crustaceans, potatoes slathered in the many glorious permutations that ratios of butter, cheese, and cream cantake. This plain porridge was the first dish to make me feel full. (중략) I could always turn to, delivering the knowledge that had been withheld from me, that was my birthright.  
                                                      - Crying in H mart, chapter 16 -


 요리 수업 가는 날 새벽, 북클럽 멤버들과 함께 읽은 챕터의 제목은 '잣죽(Jatjuk)'이었다. <H마트에서 울다>의 저자 미셀 자우너는  미국인 아빠와 한국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신 후에 아빠까지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당하고 집에 누워있자, 집에서 요리를 하기 시작한다. 각종 화려한 음식을 만들고 먹으면서도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다가, 잣과 쌀로만 만든 소박한 잣죽을 만들면서 비로소 이게 내가 원하던 음식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재료는 간단하지만 따뜻하게 속을 데워주는 건강한 음식, 잣죽. 나는 오늘 이걸 만들어서 요리 수업에 올 북클럽 멤버들과 나눠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야겠다 생각하니,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쌀을 불리고 잣을 다듬었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잣죽을 나눠먹고, 요리를 배우며 건강한 위로를 얻을 시간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김진경 셰프님과 함께한 요리 수업   

 얼마만의 자유인가! 아이 둘을 남편에게 맡기고 차를 타고 요리 수업하는 김진경 셰프님 댁으로 출발했다. 김진경 셰프님은 미국 산호세 지역에서 떡, 베이킹, 한식을 넘나들며 다양한 요리를 가르쳐주고 계신다. 오늘 우리가 배울 음식은 닭백숙, 닭죽, 닭볶음탕, 오이소박이었다. 여름에 더워서 만들기 어렵지만 보양식으로는 제격인 음식들이다.


 셰프님은 UN에서 한식 전담 요리사로, 한국 대사관 총셰프로도 일하시며 몸소 익히셨던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해주셨다. 예를 들어 오이소박이에 딱 맞는 오이를 고르는 법, 적당한 맵기의 고추, 닭고기가 신선한 마트이름까지 세세하게 알려주셨다. 특히 미국에서는 한식을 만들 때 재료와 요리 도구 구하는 것도 생소한데, 선생님이 알려주시는 족집게 노하우가 도움이 많이 되었다.  


 북클럽 멤버들은 아일랜드 식탁에 둘러앉아 셰프님이 미리 준비해 두신 알록달록한 채소와 싱싱한 고기들이 맛있는 음식으로 변해가는 요리 시연을 지켜보았다. 셰프님의 금손으로 오이소박이, 닭죽과 닭백숙, 닭죽이 차례로 만들어져 갔다.

오이소박이 양념 색감이 아름답다. 오이소박이는 물기 없이 만드는 것이 팁!


 북클럽 멤버들은 앞치마를 하나씩 두르고, 오이소박이 양념을 오이에 넣는 것만 해보았다. 셰프님과 보조 선생님이 미리 준비해 주신 덕분에 만드는 즐거움만 느낄 수 있었다.

오이를 양쪽 방향으로 십자 모양을 낸 후 양념을 꼭꼭 넣었다.


 여러 명이 함께 만들자 어렵게만 느껴졌던 오이소박이가 금세 완성됐다. 오이소박이의 색감을 받쳐주면서도 그 자체로도 멋스러운 옹기그릇에 음식을 담자, 그 아름다움이 배가 되었다. 북클럽 멤버들은 모두 아름다운 음식 사진을 핸드폰에 담기 바빴다.


음식엔 그릇이 중요해  

 그 사이 완성된 삼계탕과 닭죽, 닭볶음탕까지 앞에 두고 모두 시식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셰프님께서 음식을 마무리하시는 동안, 나는 미리 준비해 온 잣죽을 꺼내서 멤버들에게 나눠주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전 속을 달래주기엔 제격인 애피타이저였다.


 그리고 오늘의 메인 요리인 삼계탕과 닭죽, 닭볶음탕을 오이소박이와 곁들여서 먹기 시작했다. 셰프님은 음식을 그릇에 담고 식감과 조화가 눈으로 먼저 느껴질 수 있게 스타일링하는 것에도 공을 들이셨다. 같은 음식이라도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음식이 담겼을 때 맵시가 돋보이는 그릇, 음식이 가진 색감을 살려주면서 그릇 자체의 매력도 함께 살아나는 그릇이 중요하겠구나 싶었다. 참한 백자와 투박한 옹기, 옥빛 한식기에 차례로 담기는 음식들이 한층 고와 보였다.


 음식을 먹는 공간도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커다란 그릇이지 않을까? 김진경 셰프님의 클래스는 독특하게 감도는 따뜻한 분위기의 청자 그릇 같았다. 오이소박이가 카펫 위에 떨어졌을 때 너나없이 달려들어 얼룩을 지워주려고 돕는 사람들, 이 그릇에 소중한 사연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촉촉한 셰프님의 눈빛, 셰프님과 보조선생님의 끈끈한 관계를 보여주는 듯 척척 맞는 손발 등에서 나는 그 따뜻함을 읽었다. 온갖 재료, 그릇, 배려 넘치는 말들, 차분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까지. 여기에 김진경 셰프님이라는 푸른 물감 한 방울이 더해져 이 모든 게 담기는 멋진 그릇이 완성된 것 같았다.


요리의 즐거움만 느껴보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다. 요리 수업을 듣는다는 것은 요리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의 정수만 뽑아서 누리는 행복 같았다. 재료를 사고, 다듬고, 정리하는 번거로움은 하나 없이, 적당히 만들고 그걸 지켜본 후 나눠 먹는 것. 요리를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다는 것은 이렇게 행복한 일인데, 나는 그 전후 번거로운 과정에 치여서 이걸 잊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이번 요리 클래스에 가서 새로운 레시피를 배운 것도 좋았지만, 요리의 즐거움을 다시 한번 일깨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요리 수업을 마치고 나눠 먹었던 음식들. 하나 같이 정갈하고 건강한 음식들이었다.


Epilogue : 나를 데리고 주방에 갑니다

 <H마트에서 울다>의 저자 미셀 자우너는 '음식은 엄마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자신의 엄마가 항상 엄격했지만 음식으로 사랑을 표현하시는 분이었다고 회고한다. 나 역시 아들에게 비교적 엄격한 엄마이다. 평소에 아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똑바로'이다. 옷 좀 똑바로 입어라, 연필 좀 똑바로 잡아라, 책상 앞에 똑바로 앉아라 등등. 하지만 음식을 해줄 때는 레시피 대로, 똑바로 가 아니라 '아들이 좋아하는 대로' 한다.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익힘 정도로 달걀 삶기,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밥의 되직함 정도,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국의 온도를 알고 있는 건 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에게 사랑스러운 애교도 없고, 살가운 말보다 지적을 더 많이 하는 엄격한 엄마이지만 매끼 정성스러운 식사로 사랑을 표현한다.


Food was how my mother expressed her love. No matter how critical of cruel she could seem, constantly pushing me to meet her intractable expectations, I could always feel her affection radiating from the lunches she packed and the meals she prepared for me just the way I liked them.  

                                                - Crying in H mart, chapter 1 -


 정신없이 저녁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순간, 음식을 맛있게 먹는 가족들의 얼굴을 보았다. 먹으면서 행복해하고 있었다. 내가 음식 만드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처럼, 가족들도 음식을 먹으면서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다. 가족들이 식사가 끝나고 잘 먹었습니다 하고 빈 그릇을 내보였다. 그렇게 나의 요리는 완성이 되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주방도, 조리된 음식도 아니라, 그것을 먹고 난 빈 그릇이 모든 것을 완성시켰다. 주방에서 보내는 나의 시간들이 음식이라는 언어로 행복을 나누는 소중한 시간이 켜켜이 쌓여가는 생활이길, 그걸 위해 나는 오늘도 나를 데리고 주방에 살 것이다.



+ 요리 수업에 다녀와서 바로 다음 날 닭볶음탕도 만들고, 오이소박이, 물김치까지 만들어 보았다.

+ 김진경 셰프님 레시피는 정말 최고!

   (레시피는 모닝뉴스 주간지에도 공유되어 있습니다. https://svkoreans.com/news_column/407)

요리 수업 후에 집에서 만든 음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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