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왕초보, [1:1원어민 영어회화] 등록하다.

by 웃음소리



토익시험을 접수했다.


주민센터 영어회화 왕초보반을 그만두고 나서 또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간 각종 시험장에 많이도 드나들었다. 시험장의 느낌은 참 좋다. 시험 감독관 설명을 들을 때의 긴장감, 앞사람이 넘겨준 시험지를 받을 때의 설렘, 아는 문제가 많이 나왔을 때의 기쁨, 시험을 다 치고 나서 우르르 몰려나오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있을 때의 생동감, 시험성적 발표를 기다리며 종종 느끼곤 했던 합격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이 정도면 그냥 시험 중독인건지도 모르겠다.


'1:1 원어민 영어회화'를 검색했다.


토익시험을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영어병이 올라왔다. 이번엔 일이 더 커졌다. '1:1 원어민 영어회화'를 검색했다. 원어민 그룹수업을 듣던 시절, 돌아가면서 책에 나온 지문 몇 줄 읽고 질문 몇 개에 답하고 나면 수업이 끝나곤 했던 것이 떠올랐다. 한 시간을 꽉 채워 말하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보다. 겁도 없이 1:1 원어민 영어회화를 검색하다니.


이번엔 남편에게 말하지 않고 그냥 결제해도 될만한 금액이 아니었다. 남편에게 또 '선언'을 했다. 금액을 듣더니 남편이 난색을 표한다. 돈 되는 일도 아닌데 한 달에 수십만 원을 쓴다는 게 외벌이 빠듯한 살림에 배부른 소리로 들릴 법도 했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서운한 마음이 울컥 올라와 '내가 술을 마시냐, 친구를 매일 만나러 가냐, 옷을 비싼 걸 사 입냐, 명품을 좋아하냐, 미용실을 자주가냐, 피부과를 다니냐, 좋아하는 커피숍을 매일 다니냐, 아무것도 안 하는데 그 정도 할 수 있는 거 아니냐'라고 듣기 싫게 구구절절 말할 뻔했다. 회사를 그만둔 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만들어간 절약습관을,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남편이 속속들이 다 알아주고 감사의 표현까지 해주길 바랐나 보다. 내 남편은 국민 남편 최수종이 아닌데 말이다. 물론 나도 나긋나긋하게 남편에게 존대하는 하희라는 아니다.


내 몸뚱이 하나만 챙기면 되었던 시절, 바지런히 돈을 벌어 예쁘게 꾸미고, 내 마음대로 친구를 만나고,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차곡차곡 저축까지 하던 때가 그리웠다. 괜찮다가 그립다가 10년째 반복 중이다. 결혼할 때, 모아 둔 돈을 투명하게 다 오픈하지 말고 좀 꿍쳐둘걸 싶었다. 결혼 후에 회사를 그만두게 될 줄 알았다면, 따박따박 월급 받을 때 엄마 아빠한테 효도나 실컷 해둘걸 싶기도 했다. 나는 왜 이렇게 늦게서야 철이 들게 된 건지.


내 입술을 잘 다독여 위기를 넘기고 결국은 결제를 했다. 다시 설레었다. 영어도 못하면서 지나가는 외국인만 보면 콩글리쉬로라도 말을 걸어 보고 싶어서 움찔대던 나였다. 1시간 동안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겠다 싶어 좋았다. 전화영어 수업 때 과묵하게 전화통만 붙들고 있던 기억은 까맣게 잊고서 말이다.






수업 첫날. 내 생에 처음으로 드디어 원어민과 1:1로 한 시간 동안 대화를 하게 됐다. 긴장되었는지 얼굴 근육이 뇌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 다행히 마스크가 자유분방한 얼굴 근육을 잘 가려주었다. 마스크 끼는 게 답답하고 싫었는데 표정 감추기에는 아주 딱 좋았다. 선생님의 이름은 션이었다. 나랑 동갑인 캐네디언이었다. 한국에 놀러 왔다가 지금의 부인을 만나 한국에서 살게 되었다고 했다. 얼마 전에 부인이 아기를 낳았는데, Super baby라고 했다. 내가 질문한 건 아니다. 알아서 술술 말해주었다.


다음은 내가 자기소개를 할 차례였다. 훗. 자. 기. 소. 개. 주민센터 영어회화 왕초보반에서 어르신들의 과한 질투를 샀던 그 자. 기. 소. 개. 나는 그 자기소개를 수업 전날 다시 달달 외웠다. 술술 외워서 그대로 말했다. 이상하다. 생각보다 너무 짧다. 외운 거 다 끝났는데 션의 왕방울 만하던 눈알이 더 커지더니 양손을 들어 올리며 어깨를 으쓱한다. 너끼한 미쿡 리액션을 VVIP석에서 직관했다. 벌써 끝났느냐고 했다. 나는 전화영어 할 때처럼 단답형으로 말했다. "....Yes."


션은 눈으로 오만가지 감정표현이 가능한 사람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도 느낌이 다 전달되었다. 한국사람들은 자기소개를 이상하게 한다며 외국인들은 실제로 그런 영어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My son is nine years old." 말고 아이의 캐릭터를 세세하게 알려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본인이 소개한 것처럼 결혼했다는 사실뿐 아니라 스토리도 원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두 손을 턱에 괴고는 갑자기 왕방울을 빠르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어머머머머머머 뭐야 이 사람 귀염둥이 스타일인가. 집에서 무뚝뚝하고 시커먼 남편과 생활하다가 덩치는 산만한데 귀엽고 하얀 귀염둥이를 만나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럴 때 솔직하고도 재미있는 얘기 한마디면, 금빛 털이 소복이 나 있는 저 두툼한 손으로 박수를 왕왕 쳐대며 웃을 텐데. 한바탕 호탕하게 웃고 나면 수업분위기가 훨씬 좋아질 것 같은데. 아쉬웠다. 영어로는 도무지 농담을 할 수가 없었다.


더듬더듬 자기소개 위기를 모면하던 중이었다. 션은 나에게 shy 하다고 했다. 뭐 맞는 말이긴 하다. 낯은 가리는 편이니까. 자기소개를 무사히 넘긴 후 주로 듣고만 있던 나에게 션이 말했다. 질문은 정말 중요하다며 질문을 하라고 말이다. 묻고 싶었다. 나도 묻고 싶었단 말이다. 문법에 딱딱 맞는 멋들어진 의문문 대신 의문사만 오물오물거리며 옹알이를 했다. 영어회화 그룹수업에선 다른 사람들이 대답할 때 내가 할 말을 생각할 시간이 있었는데, 1:1 영어회화에서는 그런 시간 따위는 없었다. 왕방울만 한 눈알 두 개가 나만 지켜보고 있으니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시간 동안 끊임없이 듣기 평가를 하며 완벽히 들어낸 것은 거의 없었다.



마스크 안에서 오물오물 얼마나 애를 썼는지, 집에 돌아와 마스크를 벗고 거울을 보니 코밑이 거뭇거뭇했다. 코밑에 땀이 나서 화장이 몽땅 지워졌는지 웬 사내가 거울 속에 서 있었다. 나와 개그코드가 잘 맞았던 작은언니가 옆에 있었다면 "많이....검네? 면도 시기 넘겼나 봐? 면도 한번 해야겠어?"라고 낮은 목소리로 알려줬을 텐데. 요즘 가르마를 요리조리 바꿔봐도 머리카락들이 맥없이 푹 꺼지고 실실 빠지더니 그게 다 코 밑으로 이사를 왔나 보다.





수업시간 대화 녹음본을 다시 듣는 것이 숙제였다. 듣고 싶지 않았지만, 다시 들어보았다. 윽. 휴. 한 시간 동안 수다 점유율이 [나:션 = 10:90]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점유율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으면서 "yes, yes, yes"는 왜 그리도 많이 외쳐댔는지. 내 영어의 30%는 "yes"였고, 30%는 오버스러운 웃음소리였고, 나머지는 콩글리쉬였다. 내가 내뱉은 콩글리쉬를 내 친구 파파고에게 그대로 입력해 보았다. 낯뜨거웠다. 션은 프로페셔널했다. 낯 뜨거운 내 영어를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답해 주었으니 말이다.


션이 보내준 다음 수업 관련 영상도 봤다. 영상과 관련된 문장들을 작문해 보았다. 내 친구 파파고가 참 많이 도와주었다. 액정 밖으로 아이콘을 꺼낼 수만 있다면 꺼내어서 꼭 안아주고 싶을 만큼 말이다. 준비한 문장을 수업시간에 어떻게든 엮어서 내뱉어 보려고 했다. 달달외운 문장은 술술 말하다가 갑작스러운 질문에는 옹알이를 하는 패턴을 유지하며 몇 번의 수업을 이어갔다. 션에게 나의 영어 레벨은 어느 정도 인지 물어봤다. 힘들었겠다 싶다. 옹알이를 반복하는 학생의 레벨을 책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레벨이 어느 정도 되느냐는 나의 물음에 션은 아주 장황하고 정성스럽게 대답해 주었다. 나는 끝끝내, 알아듣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기초 영단어 몇 개를 내 마음대로 줄 세워 자주 내뱉고 있었기에, 내가 영어를 기본은 하고 있다고 착각했나 보다. 전화영어 하던 때를 떠올렸다. 아. 나는 아직 바로바로 대답이 튀어나오는 사람이 아니구나. 틀린 문장으로라도 말을 하려면 몇 분 동안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구나. 1:1 수업이 분명 도움은 되지만, 바로바로 말하지 못하는 내 영어 수준에서는 수십만 원을 지불하면서까지 다닐 만큼 꼭 필요한 수업은 아니구나. 우습지만 그제서야 깨달았다.


주 2회 총 8회 수업을 끝으로 1:1 원어민 영어회화를 마무리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는 이렇게 시도해 본 나 자신을 칭찬해 주었다. 남편은 분명 '불타오르더니 금세 사그라든 거냐'라고 눈치 없이 깔깔거리고는, 내가 파르르 정색하면 그제서야 농담이라고 할 테니 말이다. 엄마가 있었다면 해 주었을 칭찬을 내가 나 스스로에게 해 주었다. 자신감이 떨어질 때면 칭찬이 더 많이 고프다.



1:1 원어민 영어회화를 마무리한 후에도 나와 영어의 썸은 계속되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