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센터 영어 왕초보반에서 받은 따가운 눈총주
“저 새댁은 여기 와 왔노 참말로”
“여기서 못 듣는다 니는 다른 반 가라”
자기소개를 하는 중에 어르신들이 눈을 흘기며 나를 향해 육성으로 불만을 내뱉으신다. 자기소개 중인 내 목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말이다. 새로운 경험이다.
저렴하게 영어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검색하다가 주민센터 영어회화 강좌를 발견했다. 석 달에 삼만 원? 이건 무조건 해야지.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독서실 넉 달(3+1 이벤트) 치를 한방에 결제하고는, 독서실에 안 가고 집에 있는 것이 눈치 보이던 120일가량을 어렵사리 넘겨 낸 직후였다. 시험 결과가 나온 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다시 불안함을 느끼던 중이기도 했다.
석 달에 삼만 원이면 부담이 전혀 없는 가격이다. 마냥 퍼져있지 않고 무언가 하고 있다는 감정을 느끼게도 해 주면서, 그다지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그런 가격 말이다.
영어. 잘하지는 못하지만 한 때 썸은 탔었잖아. 거의 다 찬 정원을 보며 마음이 급해져 고민할 것도 없이 손가락을 재빨리 움직였다. 이번에는 남편에게 아무런 선언도 하지 않고 조용히 결제했다. 늘 무언가를 선언하며 비장하게 책상 앞에 “할 수 있다”를 써 붙여 남편에게 웃음을 선사하고는 지금 비웃는 거냐며 파르르 정색하다가, 며칠 후 ‘할 수 있다’를 내 손으로 슬그머니 벽에서 떼어내 분리수거하는 일을 반복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 Pixabay
드디어 첫 수업 날. 설레는 마음으로 교실에 들어갔다. 여기가 맞나? 교실이라기보다는 강당에 가까운 규모이다. 정원이 조금 많다 싶긴 했는데 출석률까지 매우 좋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책상이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어 수강생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제일 막내였다. 그냥 막내가 아니라 나는 그곳에서 분명 상꼬맹이 었다.
옆에 앉으신 ‘어르신’께 인사를 드렸다. 어르신은 훅 치고 들어오는 스타일이셨다. 철이 살짝 들고 나서부터는 첫 만남부터 말 놓고 그러는 거 좀 어려워하게 되었는데. 천천히 알아가는 게 좋은데.
어르신과의 대화에선 예외였다. 내 나이, 결혼 여부, 남편 나이, 아이가 몇 명인지, 몇 살인지, 기타 등등 어르신의 질문세례에 거부감 없이 모두 다 술술 털어놓고 있었다. 남편과 세 살 차이라고 하니 딱 됐다며 흡족해하셨고, 아들만 둘이라고 하니 깊은 탄식과 함께 아들 새끼들 애지중지 키워봤자 남이나 다름없다며 딸을 하나 꼭 더 낳으라고도 하셨다. 괜찮았다. 악의가 1%도 없음을 알기에 전혀 기분 상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솔직 담백한 어르신과의 대화가 꽤나 재미있었다.
수업 시작. 뭐지. 갑자기 합창 연습을 하신단다. 곧 열릴 한마당 축제에서 영어회화반 어르신들이 영어합창을 하기로 하셨단다. 앞다투어 앞으로 나가셔서 흥겹게 영어 노래를 부르신다. 간간히 포인트 안무도 하신다. 나는 자리에 홀로 앉아 어색한 함박웃음을 지으며 물개 박수를 쳤다. 아. 여기는 어디인가. 여기는 영어회화 왕초보반이 아니었던가.
브라운 계열의 플라워 패턴 롱 원피스에 앵클부츠를 매치하고, 얼굴에는 곱게 분칠을 하신 멋쟁이 어르신께서 호탕하게 나서신다. 반장이신가 보다. 가녀린 몸과 달리 카리스마가 어마어마하다. 고칠 부분을 세세히 지적하신다. 그런 반장님이 탐탁지 않은 어르신 한분이 티 나게 눈을 흘기고 입을 삐죽이신다. 투명하기 그지없다. 하기 싫은데 억지로 참여한 어르신, 하긴 하지만 튀고 싶지는 않은 어르신,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입을 크게 벌려 노래하는 어르신. 멀리서 보니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카리스마 넘치는 반장님도, 입을 삐죽이는 어르신도 그저 모두가 귀여운 학생이었다. 나의 이십 년 후를 잠시 상상해보았다. 배우기를 좋아했던 우리 엄마도 떠올려 보았다.
오늘 남아서 더 연습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나서야 어르신들이 자리에 앉으셨다. 수업시간의 반 정도가 흘러 드디어 수업이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선생님이 나에게 자기소개를 시키신다. 자기소개야 뭐 그동안 달달 외워둔 게 있어 걱정되지 않았다. 몇 년 전 자기소개에서 남편과 아이들이 추가되었기에 전날 밤에 내 친구 파파고와 컬래버레이션을 하여 그 부분을 업데이트했다.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웅성웅성 수군거림이 시작되었다. 기분이 이상하다. 노래방에서 회식을 할 때 노래 한곡 하라고 하라고 해서 겨우 일어나서 가사를 읊조리고 있는데, 내 노래는 아무도 듣지 않고 자기들끼리 신나게 얘기하는 순간에 느꼈던 그런 기분이랄까. 영문을 모르는 나는 그저 열심히 또박또박 자기소개를 계속했다.
“저 새댁은 여기 와 왔노 참말로”
“여기서 못 듣는다 니는 다른 반 가라”
목소리 큰 어르신 두 분이 자기소개 중인 나에게 갑자기 역정을 내신다. 대뜸 다른 반으로 가라니. 당황했다. 진정하고 가만 들어보니 내가 너무 잘한다고 이 반에 오면 안 된다고 도끼눈을 뜨신 거다. 진심으로 화가 나신 분들 앞에서 실실 웃음이 나왔다. 와. 내 영어가 여기서 드디어 빛을 발하는구나. 에이 아니에요. 저 영어 못해요. 왕초보 맞아요. 웃으며 손사래를 쳐본다.
수업을 마치고 이번엔 선생님이 나에게 다가오신다. 여기서 내가 뭔가 배우지는 못할 것 같다고 수업을 안 듣는 게 좋겠다 하신다. 환불도 해주시겠단다. 사실 배울 것은 많으나 평균 나이가 예순다섯은 족히 되어 보이는 어르신들이 모여 합창 연습을 하시는 모습을 보고는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은 아니구나 싶긴 했다. 얼마 만에 받아 본 인정인데, 여기 또 왔다가는 내 진짜 영어실력이 바로 다 들통 나 버릴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환불을 받았다. 기분 좋게 환불을 받았다. 분명 수업에서 거부당한 건데 기분이 좋았다. 나더러 영어를 잘한다니, 나더러 아줌마도 아니고 새댁이라니. 그동안 피드백도 없는 육아를 하며 누군가의 인정에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긴 했나 보다. 그런 포인트에 기분이 좋아지기까지 한 걸 보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영어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방법을 몰라서일까. 영어 주변을 맴돌기만 하고 한 번도 깊이 사귀어 보지는 못한 몇십 년째 영어 모태솔로인 나. 나와 영어 사이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주민센터를 하루 만에 그만둔 후에도 나와 영어의 썸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