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묵한 전화영어 수강생

by 웃음소리


" Julia are you ok? "

"....Yes."




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 영어를 잘 못하면서, 같은 레벨에서 20년도 넘게 벗어나지 못하면서, 신기하게도 영어가 싫지 않다. 계속 좋다.


하지만 영어를 그냥 좋아하기만 했지, 적극적으로 영어 뿌시는 방법을 알아보지 않았던 나는 무조건 원어민이랑 같은 공간에만 있으면 영어가 늘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어민 수업을 들어야 한국말을 안 하니까 더 빨리 늘겠지. 나는 늘 원어민 선생님을 고집했다.


그래, 이번엔 전화영어를 해 봐야겠다. 친구들과 함께 떠난 유럽여행에서 외국항공사 직원에게 개망신을 당하고 돌아온 나는, 금방 사그라들 의욕에 불타올라 이번엔 전화영어를 냅다 신청했다. 영어도 못하면서 전화영어를 신청했다. 물론 폼나게 원어민 선생님으로 선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업 가능한 시간을 설정해야 했다. 당시 나는 새벽 6시 40분 YBM 원어민 회화, 회사 마친 후 저녁 8시에 수영을 다니고 있었다. 남친 없는 20대 후반의 하루에 외로움이 비집고 들어올 틈 없이 아주 빡빡하게 일정을 설계해 두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시간이 점심시간밖에 없었다. 9시에 수영을 마치고 씻고 집에 오면 열시가 훌쩍 넘으니 말이다.


점심을 후딱 먹어치우고, 화장실에서 통화를 하면 되겠거니 생각했다. 누가 들을까 살짝 불안은 했다. 하지만 활활 타올라 이글거리는 (유통기한이 매우 짧은) 나의 의지를 잠재울 만큼은 아니었다.





레벨 테스트를 했다. 자기소개는 그동안 달달 외워둔 게 있으므로 문제없었다. 나는 미국계 선생님을 요청했다. 왕초보 주제에 이것저것 체크하는 것은 빼놓지 않았다. 상담은 한국말로 했으니 말이다. 미국계 선생님은 스케줄이 맞지 않아 필리핀계 선생님이 배정될 거란다. 쿨하게 넘기기로 했다. 사실은 나 같은 왕초보에겐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문제였다.


선생님과 첫 수업시간. 선생님이 뭐라 뭐라 말씀하신다. 무슨 말씀인지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나는 원어민 영어회화에서 N년째 열심히 '듣기'를 해오지 않았던가. 대충 느낌으로 의미를 때려 맞춰 새초롬하게 단답형으로 대답한다. 내 전화영어 사전에 되묻기는 없었다. 아무리 물어봐도 단어 몇 개를 문법에 맞지 않게 정성스레 배열한 단답형 대답을 해대는 과묵한 학생에게, 선생님은 당황하지 않고 늘 밝은 목소리를 유지하셨다. 프로페셔널한 선생님이 분명했다. 선생님 전화는 놓치지 않고 꼭 받았다. 어차피 말도 안 할 거면서, 절대 피하지는 말자는 이상한 철칙을 세워두고는 꼭 지켰다. 아쉽게도 집에서 반드시 복습을 한다는 철칙은 나에겐 없었다.


여느 날처럼 화장실 변기 뚜껑을 내리고 휴지로 대충 쓸어내린 후 그 위에 걸터앉아 선생님과 한참 대화를 하고 있는데, 아니 주로 듣고 있는데, 밖에서 양치질을 하는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진땀이 흐른다. 누가 내 구린 발음을 들을까 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몇 년간 새벽같이 원어민 회화수업을 듣고 오는 걸 사람들이 아는데, 내 발음이 이렇게 구린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그녀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여기는 화장실인데 사람들이 들어와서 통화가 힘들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말이다. 공기반 소리반으로 변한 내 중저음은 새어 나갈까 한껏 오므린 나의 손을 타고 전화기 너머 그녀의 달팽이관에 쿵쿵 노크를 하고 있었다. 말도 많이 안 하면서 이번엔 갑자기 속닥속닥 속삭이기까지. 그녀는 나를 이상한 여자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 수업 땐 안 되겠다 싶어 장소를 옮겼다. 자기 객관화나 메타인지와는 거리가 멀었던 나는 사람들이 와서 대화를 제대로 못한 것 같다는 커다란 착각을 하고서 이번엔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선생님과 나의 폰팅은 명확히 일방적이었다. 차라리 소음이 있을 때가 나았다. 고요한 순간이 몇 차례에 걸쳐 찾아왔다. 그간 지루한 통화에도 프로페셔널하게 수다쟁이가 되어 밝은 목소리를 유지하던 선생님은 아무리 물어도 단답으로만 말하며 질문이라고는 하지 않는 과묵한 나에게 이제는 지친 듯이 얘기한다.


" Julia are you ok? "

"....Yes."


복습따위는 하지 않았기에, 한껏 쪼그라들어 과묵하게 단답형으로 말하는 것 외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지친 그녀를 놓아주기로 결심했다. 내가 의지박약이어서가 아니라 전화영어를 할 만한 장소가 없어서라고 예쁘게 포장도 했다. 새벽반 수업만 들으면 됐지 무리하지 말자고 합리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주 3회 20분 수업, 총 12번 240분 동안 필리핀 선생님과 함께한 완벽한 '듣기 수업'은 그렇게 허무하게 마무리 되었다.


영어를 손에서 놓지 않고 오랫동안 곁에 두었는데, 그저 맴돌며 바라만 보아서일까. 나와 영어 사이의 거리는 좀처럼 줄어들지가 않았다.


결혼을 한 후에도 나와 영어의 썸은 계속 되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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