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by Dancing with 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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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셨다. 세상을 떴다. 운명했다.


어떻게 돌려말해도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할머니가 죽었다.



며칠 전 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엄마한테 전화왔다.


“할머니가 오늘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 의사가 몇시간 안 남았다고 한다.”


몇 시간 뒤 다시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숨을 거뒀다.


대한민국 의사의 유능함이 야속했다.


내 디스크 통증 치료법은 별짓을 해도 못찾던 주제에.



급히 한국 가는 비행기표를 찾아봤다.


당장 4시간 뒤에 떠나는 비행기를 타지 않는한 발인을 볼 수 없었다.


14시간 빠른 한국 시간, 최소 25시간의 비행.


39시간의 벽을 극복하지 못하고 나는 할머니의 마지막을 함께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온화한 사람이었다.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었고 언제나 웃는 표정이었다.


멋드러지게 패인 얼굴 주름은 할머니의 미소와 참 잘 어울렸다.



물론 울기도 자주였다. 가끔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도 있었다.


대학생 때 사촌동생 입시를 도와준다고 과외를 했다.


TO 부정사의 부사적 용법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을 때


옆에서 지켜보던 할머니가 갑자기 눈물을 훔쳤다.


우리는 당황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내가 말을 너무 잘한다면서 마치 김대중 선생님이 살아돌아온 것 같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 할머니는 전라도 나주 출신이다.



신림동 고시촌 원룸에서도 울음이 터졌다.


물티슈로 닦이지 않는 허름한 바닥을 침 발라서 닦는 중이었다.


“우리 손자 덩치가 저리 큰데 이리 작은 집에서 우째 살꼬.”


시험에 합격해서 다시 잠실로 복귀했을 때도 마찬가지.


“우리 손자 이제야 답답허지 않게 살겄구만.”


사실 신림동 원룸이 본가의 내 방보다 컸지만…



할머니는 식성이 좋았다.


내가 라면을 끓이거나, 삼겹살을 구우면 어김없이 다가와 “나 한 젓가락만 먹게”했다.


아빠가 늘 그러는데 ‘한 입만’은 모자의 유구한 전통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샤브샤브였다.


엄마와 나의 최애 메뉴이기도 해서 세 명은 종종 식신원정대를 꾸렸다.


우리가 잘 잡수신다고 칭찬하면 할머니는 머쓱해하면서 언제나 같은 말을 했다.


“내가 젊었을 때 못 먹어서 그랴.”


추가 주문은 돈 아깝다고 못하게 했다. 우리는 늘 무한리필 가게로 갔다.



할머니는 해방 이전에 태어나 10대에 시집을 갔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


삼남매를 낳아 길렀다. 2남 1녀는 시골을 등지고 서울로 향했다.



자식들 힘들게 내려오지 말라고 설이나 추석에 직접 서울로 올라왔다.


갖가지 차례음식을 가득 담은 가방을 꼬부라진 등 위에 메고


서울역에 내리는 할머니를 보면 명절이 시작됐음을 느꼈다.



어느 날 할머니가 내 방에 방치된 큰 백팩을 보며 ‘나 주라’고 했다.


고등학생 때 쓰던 가방이라 흔쾌히 그러시라고 했다.


다음 추석 때 할머니의 작은 체구에는 더 큰 백팩이 올려져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송편이 잔뜩 들어있었다.



할머니는 한글을 읽지 못했다.


글을 배울 나이가 됐을 때 식민지 조선에서는 한글교육이 금지됐다.


물론 학교를 다닐 여유도 없었으리라.


나는 초등학생 때 할머니가 본인 이름 석자 김.윤.님.을 삐뚤빼뚤 쓰는 걸 보고 의아했다.


보호자 김윤님이 어린 손자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이.하.형. 또박또박 썼던 것이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한글은 물론 외국어도 배우고, 미국에서 인턴도 하고, 석사 학위도 따고, 외교관이 되어


지식과 견문을 넓혀 더 큰 세상을 알게 됐다고 혼자 으스대기도 했다.


글을 모르고, 평생 거의 전라도에서만 산 할머니의 세상은 좁지 않을까.


나중에 해외여행을 모시고 가야겠다고. 효심과 동정이 뒤섞인 결심도 했었다.


제멋대로 효도를 유예하고 있을 때 할머니가 코로나에 걸렸다.


의식불명이 되어 병상에서 수년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할머니가 사랑과 희생으로 품은 세상은 더 크고 깊었다.


글을 모르고 해외를 다니지 않았어도 삼남매가 가정을 꾸리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남겼다.


나의 세계도 그 안의 일부였다. 더 넓은 세상의 시작이자 중심이 붕괴했다.



나도 할머니 앞에서 대성통곡한 적이 있다.


시골집에 5명의 손주 가운데 한 사람의 사진만 없었는데, 그게 내 사진이었다.


유치원생이었던 나는 서럽게 울며 할머니가 밉다고 했다.


다음에 갔을 때 원숭이 흉내를 내고 있는 내 사진이 가장 큰 액자에 담겨 맨 앞에 놓여있었다.


언제나처럼 자상한 미소를 간직한 할머니의 영정 사진 앞에 이번에는 그 손자만 없었다.



할머니.


고맙고 사랑해. 편히 쉬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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