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와 애도의 시간적 거리가 반나절도 안 되는 날도 있다.
지난 일요일이 내게는 그런 날이었다.
오전에는 하객이었고 오후에는 조문객이었다.
봄을 훌쩍 건너뛰고 여름이 온 것 같았던 날씨였다.
중학교 후배의 결혼식이 있었다.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후배는 내게 사회를 부탁했다.
사실 청첩장을 받을 때, 장난스레 주례든 사회든 시켜달라고 졸랐다.
원래 사회를 보기로 했던 분이 코로나에 걸리는 바람에 결국 내가 사회자가 됐다.
시원한 폭포가 흐르고 사방이 화사한 꽃에 둘러싸인 야외 예식장이었다.
신랑은 밝은 베이지색 정장을 입었고
신부는 꽃잎이 열리든 펼쳐진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화양연화(花樣年華).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내 건배사이기도 했다.
결혼 후에도 평화로운 부부관계를 위한 지침의 4행시.
화.가 나도
양.보하고 먼저
연.애할 때처럼
화.사하게 스스로를 가꾸자
후배는 언제나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외고에 진학했을 때, 연대에 들어갔을 때, 고시에 합격했을 때.
마치 자기 일처럼 축하해줬고 주변에 자랑했다.
개구쟁이가 늠름한 신랑이 되어 신부의 손을 꼭 잡은 모습을 바라보니
마치 내 친동생의 결혼처럼 기뻤고 후배가 자랑스러웠다.
두 시간 넘게 이어진 결혼식이 끝나고
초록색 넥타이를 풀고 검은색으로 갈아 맸다.
한남동에 있는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세상을 뜨셨다.
그래서 명절과 제사 때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은 작은 할아버지셨다.
작은 할아버지는 말수가 많지 않은 분이셨다.
우리집에 오셨을 때도, 삼촌집에 놀러 갔을 때도 손주들에게 말씀을 많이 하시진 않았다.
그랬던 작은 할아버지가 추석 때 온 가족 앞에서 내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당시 작은 할아버지는 청소용역업체에서 일하고 계셨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아파트 단지로 파견을 나오셨다.
단지가 꽤 컸고 주로 아침 일찍 나오셨기에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작은 할아버지를 마주쳤고 당연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차례를 지내고 청주로 목을 축이신 작은 할아버지는 빨개진 얼굴로 그날 일을 말씀하셨다.
“청소부인 할아버지가 부끄럽지도 않은지 요놈이 나한테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고 가더라구.”
술잔을 비울 때마다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셨다.
그제야 나는 부끄러웠다.
이토록 좋아하시는데 더욱 자주 친근하게 할아버지께 인사해볼걸.
부끄러움은 영원한 후회로 남아버렸다.
얼마 후 작은 할아버지께서 큰 병에 걸려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연스레 명절과 제사 때 가장 큰 어른은 우리 아빠가 되었다.
오랜 투병 끝에 작은 할아버지는 지난주 세상을 뜨셨다.
코로나 이후 뵙지 못했던 작은 할머니께서 내 두 손을 잡고 반겨주셨다.
할머니는 결혼식 사회 때문에 한껏 멋을 부린 나를 보며 잘생겼다고 칭찬하셨다.
할머니는 밤새 우셨는지 두 눈이 많이 부어있었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그치만 왠지 모르게 나는 할머니가 신부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검은색 웨딩드레스를 입고 반세기 넘는 결혼생활을 마무리하는 신부와 같았다.
상복에도 작지만 새하얀 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봄 소나기가 오후를 적시고 간 목요일.
늦은 시각 사무실을 나섰고 밤공기는 제법 차가웠다.
소설가를 꿈꿨던 큰 삼촌이 조문객들에게 감사의 문자를 돌렸다.
“홀로 병변을 겪으며 외로이 사투를 벌이시다
봄바람이 일렁이는 꽃피는 봄이어도,
멀리 떠나실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나는 그렇게 젖은 벚꽃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새어 나오는 길을 걸었다. 끝.
2022년 11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