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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일리 Sep 15. 2020

소문 난 책을 읽고 싶다 - 당선, 합격, 계급을 읽고

책 리뷰 시장이 작은 이유 


왜 영화 리뷰 시장은 있는데, 책 리뷰 시장은 없을까?


얼마 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테넷'을 봤다. 놀란 감독의 작품이라니 당연히 극장에서 돈 주고 봐야지 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나름 집중해서 봤는데도 불구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으로 채워져 있어, 그리 '재밌다'는 느낌이 많이 들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덩케르크를 본 후 소름이 쫙 끼쳤던 그 순간에 비해 조금은 아쉽다는 생각을 하며 극장을 나섰다.

그래도 거장의 작품 답게 머릿속에서 쉽게 잊혀지는 영화가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꼭 한번 보라고 추천하는 말을 남겼다. 한 친구는 내 말을 듣더니 바로 스마트폰을 켜서 영화 리뷰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전 놀란 영화들보다 평점이 좀 안좋네? 예전 것보다 별로 아니야?"


역시 리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인터스텔라나 다크나이트와 같은 짜릿함이 부족한 '테넷'에 대한 대중의 평이 박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자기 취향에 맞는 영화를 찾을 수 있다. 평점을 검색하거나, 왓챠에 한달 12000원을 내고 자기 취향을 찾아달라 부탁하면 된다. 정 안되면 영화 관련 유투버들을 검색하면서 이건 이렇다더라 저렇다더라 하는 평가를 30분이면 모두 수집할 수 있다.

한국인은 1년간 4.37회의 영화를 본다. 대박이 난다 하는 영화들은 천만 관객을 훌쩍 넘는다. 그러니 러프하게 국민의 5분의 1정도가 대박난 영화는 거의 다 봤다는 얘기다.


책은 어떨까? 한국인이 독서를 잘 하지 않는 민족이라는 악평이 자자하지만, 국민 연평균 독서량은 7.5권이다.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과 적게 하는 사람의 격차가 큰 편이다. 한국인의 45%가 1년에 책을 한권도 읽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인 평균이 7.5권이니, 책을 읽는 사람은 아예 안 읽는 사람에 비해 평균적으로 훨씬 더 많은 책을 읽을 것이다.


영화에 비해 책은 입소문이 그리 많이 없는 편이다. 영화의 경우 그때그때 개봉하는 영화가 어떤 것이 있는지 보지 않아도 알고 있고, 재밌다는 영화는 꼭 친구가 추천을 해주곤 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누군가가 '이 책 진짜 재밌어 꼭 읽어야 해!' 라고 추천해서 책을 읽은 적은 거의 없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들어가 그때 그때 마음에 끌리는 책을 읽을 뿐이다. 그마저도 베스트셀러 코너의 '오바마가 추천한 책',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라는 말에 혹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나는 그 책을 진짜 읽은 대중의 목소리가 아닌 출판사와 전문가의 목소리만을 듣고 있었던 셈이다. 대중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만 골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당선, 합격, 계급 - 한국의 간판시스템을 다루다

[당선, 합격, 계급]은 장강명 작가의 르포로, 한국에 책 리뷰 시장이 없는 이유에 대한 나름의 답을 준다. 사실 책 리뷰 시장 분석이 메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정확히는 '소설가 지망생들은 어떻게 소설가가 되는가?' 와 관련한 작가의 궁금증에서 시작되어, 한국의 독특한 등단 시스템을 분석한 내용이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책의 화자(장강명 작가)는 등단이 일종의 '간판' 현상으로 작용해, 그 관문을 거친 사람에게 어떤 자격을 주는 시스템으로 돌아간다고 분석한다. 출판사는 멋진 간판(주로 공모전)을 단 사람의 책을 최대한으로 홍보하고, 대중은 책의 내용이 아닌 간판에 기반해 책을 고른다. 대부분의 책에 등장하는 '작가 ㅇㅇㅇ는 ㅇㅇㅇ 상을 받았고 ..' 류의 소개는 모두 해당 작가의 간판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이 작가가 얼마나 문단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qualified 된 사람인지를 소개하는 셈이다.


한국의 간판 문화는 문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험 혹은 학위로 어떤 자격을 획득할 수 있는 많은 직업에서 간판 효과가 발생한다. 대표적인 것이 명문대 간판이다. 대기업 사무직을 뽑을 때 가장 확실한 무기로 여겨지는 해당 간판은, 수학능력시험이라는 하나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주어진다. 어린 시절 수능을 잘 풀었다고 해서 나중에 훌륭한 회사원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래도 명문대 출신은 다르다'라는 말을 은근히 입에 올린다.


의사 시험, 변호사 시험은 망할 리 없는 확실한 간판에 속한다. 작가는 이 간판 시스템의 특성 중 하나로 '절대 하락할리 없는 안정성'을 꼽는다. 많은 사람들이 의사와 변호사 시험을 보는 이유는, 전문직이 되면 절대로 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한 계급의 계단을 올라가면 내려오기 쉽지 않다. 314p에 이와 관련한 설명이 나온다.



"술을 마시고 수술을 하는게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보다 처벌이 더 약하다는 사실을 아는가? 음주 운전은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5~0.1%라면 100일간 면허정지, 0.1% 이상은 면허 취소다. 그런데 의사가 음주 수술을 하면 1개월 면허 정지 처분을 받는다. 2008년에는 서울 강남에서 한 유명 성형외과 의사가 환자 2명을 성추행했다. 그는 벌금 700만원만 내고 진료를 계속했다. 2007년부터 2016년 8월까지, 성범죄로 검거된 의사 747명 중 자격정지 처분을 받는 사람은 5명뿐이다. ...(중략) 범죄자도 쫒아내지 않는 판국인데, 이들 업계에서 자격증 소지자가 실력이 없다고 쫓겨나는 일은 정말이지 없다. 전형적인 정보 비대칭 시장이라 소비자 처지에서는 누가 유능하고 누가 무능한지 잘 알수도 없다. 자신이 찾아가려는 변호사, 의사, 교사의 실력에 대해 잘 아는 일반인이 몇이나 있을까."


전문 직업인이라는 면에서 정보의 비대칭이 어느정도 발생하는 현실은 그러려니 해도, 의사의 음주 수술 처벌이 음주 운전보다 미약하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일정 기준을 통과한 사람을 '우리 집단'의 일원으로 꽁꽁 묶고, 서로의 편의를 봐주는 문화에서 나타난 현상이라 감히 추측한다. 그러니 한국에 책 리뷰 시장이 없는 이유는, 아주 크게는 한국에 의사/변호사/교사 리뷰 시장이 없는 이유와 유사할지 모른다. 출판 시장에는 작가에게 간판, 즉 권위를 부여하는 특정 시스템이 존재한다. 그 시스템을 통과한 사람은 좀처럼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책의 콘텐츠보다는 그 책의 간판을 더 신뢰하는 경향을 보인다. 영화의 경우 어느정도 그 비대칭성이 완화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대중이 영화를 더 많이 보고, 입소문을 내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일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혁명, 대중의 힘, 뉴파워


최근 그 '간판'을 따지 않고도 성공적인 작가 커리어를 이뤄낸 사람이 있다. 바로 2018년 '일간 이슬아'를 시작한 이슬아 작가다. (알고보니 2014년 한겨레문학상으로 등단을 이미 하신 상태였다고 한다.) '한달 구독료 만원, 매일 하나씩 보내주는 수필' 컨셉은 문학계에 일어난 하나의 혁명이었다. 사람들은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혹은 문재인 대통령이 추천한 책 등의 추천사 없이도 그녀의 글을 구독했고, 그녀는 스타 작가가 되었다.

이슬아 작가는 새로운 형태의 권력이 출현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방탄소년단의 흥행, 유투버의 등장, 음원차트 역주행 현상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바로 대중권력, New Power의 등장이다. 엘리트 방송사 PD들이 만드는 프로그램보다 대도서관의 게임 방송이 더 조회수가 높은 이유, SM의 완벽한 아이돌보다 방탄소년단의 화양연화가 히트를 쳤던 이유, 제국의 아이들의 '후유증'이 어느날 갑자기 전국 술집에서 흘렀던 이유는 모두 대중이 그들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제 문화는 엘리트 계층이 대중을 위해 선별한 컨텐츠를 단순히 소비하는 형태에서 벗어나 대중이 직접 적극적으로 자신의 취향을 고르고, 그를 주류로 만드는 형식으로 소비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j-S03JfgHEA

뉴파워에 대해 설명한 TED 영상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상영관 수가 적거나 배급사의 공격적인 마케팅 없이도 소위 말하는 대중의 선택만으로 대박을 터뜨리는 경우가 있다. 설경구 팬덤을 불러온 '불한당'이 그랬고, 국내 독립영화 판을 흔든 '메기', 그리고 '벌새'가 그랬다. 한국에서 영화가 대중화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영화를 찾고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결국 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국에서 책을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책을 찾기 시작한다면 '화제의 책'이 생길지 모른다. 회사 점심시간과 학교 쉬는시간에 '그 책 읽었어요? 대박' 류의 이야기가 일상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국은 책을 쾌락의 수단이 아닌 학습의 수단으로 바라보는 관점에 익숙해져 있다. 사람들은 자신을 발전시키고자 할때 책을 읽지, 심심할때 책을 읽지 않는다. 영상 매체들이 주는 자극이 너무 즉각적이어서 책에 정신을 집중할 여지가 없기도 하고, 어린 시절부터 '공부 열심히 해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 책에 진절머리가 나서이기도 하다.


성인 중 '독서가 즐겁고 습관이 되어서' 책을 읽는다는 사람의 비율은 5.9%에 불과하다


당선, 합격, 계급에도 이와 같은 현상을 분석한 대목이 있다.

사람들은 (특히 어른들은) 책을 재미로 읽는 경우가 아주 적다. 한국에는 책이란 어떤 정보를 얻기 위한 통로, 나를 '발전시키기' 위해 읽는 것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 자기계발서가 넘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서점에 가면 '일찍 일어나는 습관', '나는 이렇게 성공했다' 류의 책들이 베스트셀러 칸을 꽉 채우고 있다. 도대체 저 재미도 감동도 없는 책을 누가 읽는지 항상 궁금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알 것 같았다. 자기계발서 독자들은 애초에 재미를 바라고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아니, 한국 독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책에서 재미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책의 내용물을 깊이 살펴보지 않고 간판만 쳐다보는 현상이 생겨난다.


이제 책에서도 취향을 찾아야 할때

사실 나부터도 책과 관련한 취향이 명확하지는 않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책을 취향의 영역이라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인생 영화가 뭐에요?'라고는 쉽게 질문하지만, '인생 책이 뭐에요?'류의 질문은 잘 하지 않는다. 아마 책이라는 매체가 너무 딱딱하고, 고상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는 액션 영화 좋아해요, 아무생각없이 볼 수 있는거요" 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손가락질하지 않지만, "저는 보노보노류 책 있잖아요. 그냥 휘리릭 넘기고 자기위안 할 수 있는 책이 좋아요" 라고 말하는 사람은 깊이가 없다며 손가락질을 당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어떤 책을 좋아하시나요, 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괜히 고등학교 시절 추천도서 목록에서 억지로 읽었던 고전을 꺼내들어야 할 것만 같다. 보노보노 좋아하는게 틀린 것도 아닌데.


사람들과 책에 대해 그냥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그 책이 어땠고 저 책은 어땠고. 그냥 자기 취향이 온전히 인정받는 분위기가 되면 좋을텐데. 책에서도 간판 떼고, 고전이라는 계급장 떼고 얼마든지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영역이 있지 않을까. 모두가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야 하는건 아니잖아. 난 장강명, 오찬호, 박노자, 문유석 (어 이쯤이면 취향이 있는것 같은데)이 좋은데 어쩌라고! 솔직히 말하면 김영하 '여행의 이유'가 왜 베스트셀러인지 모르겠다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과 나에게 책 취향이 조금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서로의 취향만을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저녁 식사 자리가 있었으면 한다. 내 취향이 최고야 으스대면서 유쾌하게 웃어넘길 수 있는, 요즘 화제의 책을 언급하면 누구나 '아 그책!' 이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텍스트의 나라를 꿈꾼다. 책에서도 뉴파워가 생겨날 수 있지 않을까. 역주행의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강렬했던 한가인의 후유증, 하니의 웨이브, 다운타운 베이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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