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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일리 Sep 25. 2020

짜라투스트라는 요로케 말했다

나는야 ♬ 초인이 될거야 

니체는 언젠가 도전하고 싶은 철학자 중 하나였다. 특히 요즘처럼 '소확행',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아','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가 범람하고 있는 시대에 오히려 더 읽기 좋은 사상가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현대 사회의 자극과 만족감에 머무르라고 속삭이는 수많은 에세이와 달리, 니체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극복하며 춤을 추라 명령하는 호랑이 선생님이다. '인간이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부에 오히려 혼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는 멋드러진 말을 남긴 그의 사상에 풍덩 빠져보고 싶었다.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니체의 유명 저작 중 하나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완벽히 읽지는 못했으나, 의외로 쉽게(?) 읽히는 책이라 설설 읽을 수 있다. 




전공자들에게는 한문장 한문장 곱씹어야 할 고전이겠지만 나는 그냥 어떤 맛인지 탐색하려고 하는 아마추어일 뿐이니, 틀리거나 잘못되더라도 그냥 텍스트를 읽어나갈 뿐이다. 


분명 어렵고 무슨 말을 하는지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텍스트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럼에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놓칠 수 없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바로 '낡은 기독교를 버리라'는 메시지이다. 조로아스터교를 그대로 따온 짜라투스트라라는 이름에서도, 1부 초반에 등장하는 짜라투스트라의 혼잣말('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니!')에서도, 과하게 친절한 각주에서도 모두 기독교를 향한 비판정신이 드러난다. 그 외에도 늙음/젊음이라는 이미지의 반전, 영원에 대한 반복된 메시지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전공자가 아닌 아마추어들도 이 책을 읽은 후에는 모두 초인이 되기를 꿈꾸게 되리라 확신한다. 


1. 기독교 비판 

니체는 기독교에 다음과 같은 이미지를 부여한다 - 죽어 있음, 대지를 초월함, 숨겨진 피안의 세계, 소인이 의지하는 사상,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믿음- 이는 초인이 갖추어야 할 여러 덕목과는 상반되는 성질을 가진다. 니체에 따르면 초인은 - 살아있고, 대지를 사랑하고, 정신보다 육체의 기쁨을 느낄 줄 알며, 사랑이나 도덕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뛰어넘을 줄 아는 자, 세상의 모든 믿음과 체계를 비판적으로 사고할 줄 아는 자이다. 


그는 예수의 거의 모든 행위를 비판한다. 읽다 보면 니체가 기독교에 대해 개인적인 경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그러나 기독교 비판 대목의 수사가 굉장히 뛰어나서, 그 강력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읽는 사람이 절로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키득거리게 되는 매력이 있다. 실제로 우리 독서모임 참가자 중 한명은 독실한 신자였는데도 니체의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굉장히 즐거웠다고 한다. 이는 짜라투스트라가 기독교를 비판할 때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정보와 수사를 바탕으로 이를 그대로 모방하는 형식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니체는 기독교에 대한 많은 지식을 바탕으로 이를 유쾌하게 비틀 줄 아는 코미디언이었던 것이다. 


'꼽추에게서 등의 혹을 떼어 내는 것은 바로 그의 정신을 뺴앗는 것이다. 민중은 내게 이렇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만일 장님의 눈을 뜨게 해 주면 그는 지상의 나쁜 일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되어 자기의 눈을 고쳐 준 사람을 저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는 자는 그에게 가장 큰 해를 끼치는 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걷기 시작하자마자 그의 악덕이 그를 이끌고 달려가기 때문이다.' 

(예수가 행한 수많은 기적이 정작 그 불구자들에게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음을 역설) 


흥미로운 점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성경의 형식을 많이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인이 지상의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려 내려온다는 설정, 대중에게 외면받지만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여럿 만나며 계속해서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스토리텔링은 모두 성경에서 익히 보던 형식이다. 이 책은 내용은 성경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내용이지만, 그 형식은 오히려 서양의 기독교적 세계관(거슬러 올라갔을 때 이성/진리를 중시하는 플라톤의 사상)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2. 늙음/젊음 이미지의 반복적 차용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다 보면 늙음/젊음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대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순례의 길 위에서 주로 늙은 학자나 성직자 등을 만나고, 이들은 짜라투스트라가 듣기에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해댄다. 그에 대응하는 짜라투스트라는 당신들이 모두 초인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며 그 늙은이가 가지지 못한 성질 - 반짝거림, 춤, 싱싱함, 육체, 욕망 - 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한다. 


'사이비 지혜, 이 영예로운 이기심은 노예와 노인과 지친 자들이 떠들어 대는 모든 익살을 그렇게 부른다. 특히 저질이고 미치광이 같고 지나치게 영리한 성직자들의 모든 어리석음을! 

그러나 사이비 현자들, 모든 성직자들, 세상에 지친 자들, 여자와 노예와 영혼을 가진 자들의 유희는 옛날부터 얼마나 이기심을 핍박해 왔던가! 

이기심을 핍박하는 것, 바로 그것을 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무아, 이 모든 세상에 혐오를 느낀 비겁자와 십자 거미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란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드디어 그날이, 변화가, 심판의 칼이, '위대한 정오'의 시간이 그들 모두에게 찾아오리라. 그러면 많은 것들이 분명히 밝혀질 것이다.'  


니체의 철학은 기존의 담론을 잘 정리하고 해석하는 방향이 아닌, 기존의 것을 전복하고 반항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인간으로서의 니체 자신도 사회의 중심부에서 잘 자리를 잡았다기보다 그 주변부에서 불꽃처럼 살다 간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니체에게 기존 사회/제도/인간들은 모두 낡고 늙고 생동감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며 책장을 넘기니 독서 경험이 더 즐거워졌다. 

철학은 많은 학문 분야 중에서도 더욱 옛것에 대한 찬미를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묵직한 사상과 어쩔 수 없이 두텁게 잡혀 있는 체계를 탐구하다 보면 지금 이 대지에서 우리가 느끼는 생동감과 욕망, 자신의 인생에 대한 어떤 의지 같은 것들은 쉽사리 사그라들지도 모른다. 쌓일 대로 쌓인 학문적 토대 앞에 주눅 든 젊은이로서 니체의 철학은 자기 긍정을 가능하게 하는 영감의 원천이다. 두 발을 땅에 딛고 있으면서 느끼는 이 생명력과 욕망, 기존 질서에 대한 환멸 등을 일찍이 철학적으로 풀어낸 사상가가 있다는 것이 다른 한편으로 위로가 된다. 


3. 순간은 영원할 것이니 - 영원 회귀론 

짜라투스트라의 가르침에서 영원 회귀는 굉장히 중요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보라, 그대는 영원 회귀를 가르치는 자이며, 그것이 이제는 그대의 운명인 것이다.' 

'보라, 우리들은 일체의 사물은 영원히 회귀하며, 우리들 자신도 역시 그들과 더불어 회귀한다는 가르침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제까지 우리들은 이미 무수하게 번갈아 가며 존재해 왔으며 일체의 사물도 역시 우리들과 함께 존재해 왔다는 가르침도 알고 있다.' 


우선 회귀가 정확히 어떤 뜻인지 알아보자.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 [명사]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거나 돌아감- 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니 영원 회귀란 한 바퀴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오는 영원을 뜻한다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로 찾아봐도 eternal return/recurrence라고 번역되는 듯하다.) 


우리에게 시간은 과거에서 와서 미래로 흘러가는 직선의 이미지로 있다. 영원이라는 개념 역시 미래로 무한히 뻗어가는 시간을 의미할 수 있다. 교회에 가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 역시 이 현세를 지나 언젠가 죽을 때 하늘로 승천(?) 해서 하나님과 함께 오래오래 잘 사는 걸 의미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니체에게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과거는 현재로 돌아오고, 미래 역시 현재로 돌아온다. 결국 시간은 영원히 회전하고 지금 이 순간만이 의미를 가진다. 


얼핏 들었을 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분명 어제를 살아왔고 미래를 살아갈텐데, 그렇다면 내 인생은 하나의 도표에서처럼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한번 더 생각해보면 니체의 시간 개념이 일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과거라는 시간이 있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미래가 오늘의 앞에 있음을 어떻게 인지할 수 있는가? 결국 모든 인식은 지금 이 순간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침대에서 일어나 또다시 잠에 들때까지 하나의 인생을 살고, 잠에 드는 순간 그러니 그냥 한번 죽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다음 날 일어나면 또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인생은 그렇게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명과 죽음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우리들 뒤에 있는 이 긴 길, 이 길은 영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 앞에 있는 저 긴 길 - 그 길은 또 다른 쪽 영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두 길은 서로 반대쪽으로 나 있다. 그들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리고 이 두 길은 이 출입구에서 만난다. 이 출입구의 이름은 그 위에 쓰여 있다. '순간'이라고.' 


영원 회귀 사상은 볼때마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나에겐 첫번째 니체 저작이다. 가장 유명하고 아무래도 니체 사상의 핵심을 많이 담고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위에 설명한 기독교 비판/ 늙음과 젊음의 대조/ 그리고 영원 회귀 사상에 대한 설명 이외에도 니체의 수많은 사상이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읽는 재미가 있음은 확실하다. 중간중간 너무 힘들다 싶으면 한 챕터 쯤 건너뛰어 읽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단락 단락의 핵심 내용을 파악해 논문을 쓸 것도 아니요, 강연을 해야 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니체라는 한 사상가가 어떤 말을 세상에 남기고 갔는지, 그리고 그 수사학과 은유로 뒤덮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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