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려 했던 엘리트주의자의 명 에세이 모음집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1984를 들어봤을 것이다.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을 우화로 재미나게 풀어낸 그의 책은 사람을 서늘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그러나 오웰이 어떤 삶을 살다 갔는지 아는 독자는 많지 않다. 명문 이튼 스쿨을 졸업했지만 옥스브릿지에 진학할 돈이 마땅치 않았던 그는 버마(지금의 미얀마)에서 제국주의 경찰로 일한다. 그러나 영국 제국주의에 환멸을 느낀 후 이내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유럽을 전전하며 접시 닦기와 부랑자로 생활한 후 그 경험을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로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한다. 웬만한 작가들이 다 드라마틱하게 살고 가셨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오웰의 인생은 상상 이상이었다.
'나는 왜 쓰는가'는 오웰이 버마에서 경찰로 재직했던 시절에서부터 동물 농장을 집필하기 전까지인 1948년까지 쓴 에세이를 엮은 책이다. 짧은 에세이는 겨우 두세 페이지밖에 되지 않지만, 긴 에세이는 70페이지 정도의 분량이 되기도 한다. 모두 읽을 필요는 없으며, 흥미가 가는 주제의 에세이만 골라 읽어도 좋다.
한겨레출판에서 나온 책에 실려있는 에세이들은 크게 다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제국주의 경찰로서의 경험을 담은
- 교수형, 코끼리를 쏘다
2) 국가, 사회에 대한 그의 통찰을 담은
-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다, 나는 왜 독립 노동당에 가입했는가, 좌든 우든 나의 조국, 영국, 당신의 영국, 웰스, 히틀러, 그리고 세계국가, 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 민주주의 비망록, 당신과 원자탄, 과학이란 무엇인가
3)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담은
- 문학 예방, 정치와 영어, 어느 서평자의 고백, 나는 왜 쓰는가, 정치 대 문학: 걸리버 여행기에 관하여,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
4) 그 외의 일상 에세이들인
- 스파이크, 서점의 추억, 마라케시, 시와 마이크, 나 좋을 대로, 행락지, 물속의 달, 두꺼비 단상, 정말, 정말 좋았지, 간디에 대한 소견
서양 역사, 특히 서양 근대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위 분류 중 2번에 해당하는 국가, 사회에 대한 통찰 부분에서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다. 당시의 파시즘, 트로츠키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등 여러 정치/사회 이념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우리가 아는 사회주의라곤 북한의 사회주의 밖에 없는데, 오웰이 지식인으로서 추구했던 사회주의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살짝 혼란스러워 질지 모른다.
한때는 오웰의 '1984'와 '동물농장'이 반공주의 대표 작품으로 여겨진 적도 있었다. 일례로 '동물농장'은 1945년 발간 이후 1948년 한국어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최초의 외국어 번역이다. 이는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전체주의 비판이 공산주의 비판과 같은 것이라 당시 정권이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웰은 평생 사회주의자로 살아간 지식인이다. '좌든 우든 나의 조국', 그리고 '나는 왜 독립노동당에 가입했는가'를 보면 역사적 맥락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오웰의 사회주의자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오웰은 엘리트주의자인가? 영원한 타자인가?
친구들과 독서모임에서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니, 오웰의 밑바닥 생활 '체험'이 사실상 오늘날 비판받고 있는 노숙자 체험과 뭐가 다른가, 그는 결국 기만적 엘리트주의자가 아니었나 하는 비판이 나왔다. 비록 밑바닥 생활로 뛰어들었다는 용기는 칭찬해줄 만 하지만, 결국 그는 평생을 언론인/작가로 살아왔다. 오웰은 당시의 많은 위선적 엘리트처럼, 오히려 밑바닥 생활을 글의 소재로 삼아 자신의 명성을 위해 이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대표작 '코끼리를 쏘다'에 사실 그런 대목이 나와 있기도 하다. 오웰이 버마에서 경찰로 재직할 당시, 그는 사장 바닥에서 난동을 피우는 코끼리를 진압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는 코끼리를 마주하고 그 생명력에 경외감을 느끼지만, 문득 백인 제국주의 경찰로서의 자기 위치를 자각하게 된다.
'백인인 나는 겉보기엔 작품의 주연이었지만, 실은 뒤에 잇는 노란 얼굴들의 의지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바보 같은 꼭두각시였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알게 되었다. 백인이 폭군이 되면 폭력을 휘두르고 말고는 자기 마음이지만, 백인 나리라는 상투적 이미지에 들어맞는 가식적인 꼭두각시가 되고 만다는 것을 말이다. 언제나 '원주민'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안달하고, 그래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원주민'이 예상하는 바대로 행동해야만 하는 게 그의 지배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면을 쓰고, 그의 얼굴은 가면에 맞춰져 간다. 그러니 나는 코끼리를 쏴야 했다.'
오웰의 에세이집에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온다. 죽어가기 전 끔찍한 공공병원에서 여생을 보내는 환자들, 동물 우리보다 못할 것 같은 노숙인 숙소에서 지내는 사람들, 휴양의 섬 모로코에서 사람대접을 거의 받지 못하는 흑인들. 오웰은 그들을 최대한 치밀하게 묘사한다. 백인에 고등 교육을 받은 그는 아마도 평생 피지배인들과 같은 위치에는 있지 못함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는 때로는 그들과 함께 생활하기도, 때로는 그들과의 돌이킬 수 없는 간극에 대해 최대한 깊이 파고들어보기도 한다.
우린 서로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거야, 단정 짓는 것은 쉽다. 당사자성을 지닌 운동만이 의미가 있다 라고 말해버리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간단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사자성을 지닌 모든 사람은 결국 같은가? 아니면 엘리트이면서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자는 모두 위선적인가? 그리고 우리가 서로 각기 다른 성질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선을 그었을 때, 더 나은 상태를 향해 가는 일이 가능해지는가?
오웰을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엘리트라고 비판하는 것은 타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오웰이 사회주의자로서, 지식인으로서 쏟아냈던 그 글과 밑바닥 생활을 전전했던 세월이 무의미해지지는 않는다. 만약 오웰이 지식인이 아닌 그냥 접시닦이 하나에 불과했다면, 우리는 그의 글을 읽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지적인 허영심에서 나온 것이었든, 미학적 열정에서 나온 것이었든 간에 일종의 허례허식에서 파생된 글쓰기도 결국은 의미가 있다.
독서모임을 하던 중 얼마 전 '소년이 온다'를 감명 깊게 읽었다는 지인이 다음과 같은 문장을 추천해주었다.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오직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에세이집을 읽은 후, 오웰의 제국주의 혐오,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 그리고 작가로서의 노력 등이 위의 문장과 같은 맥락에 있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는 오웰이 한편으로 엘리트였지만, 한편으로 유년 시절 상류층으로부터 받았던 차별과 멸시에 대한 뿌리 깊은 반항심을 간직하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는 유년 시절을 다룬 '정말, 정말 좋았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학교생활 돌아가는 게 그런 식이었다. 언제나 강자가 약자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미덕은 이기는 데 있었다. 즉, 미덕이란 남들보다 더 크고, 강하고 잘생기고, 부유하고, 인기 좋고, 세련되고, 거리낌 없는 데 있었다. 달리 말해 남을 지배하고,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고, 바보 같아 보이게 하며, 모든 면에서 남보다 앞서는 데 있었던 것이다. 삶이란 본래 위아래가 있어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 자체가 옳은 일이었다. 강자가 있어 그들은 이겨 마땅하고 언제나 이겼으며, 약자가 있어 그들은 져 마땅하고 언제나, 끝없이 지기만 했다.'
'어릴 적부터 나 자신이 그런 식의 현실에 '자발적'으로는 도저히 순응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마음속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깨어 있는 내면의 자아가 있어 도덕적 의무와 심리적 실상의 차이를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학교에서 철저하게 강자에게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사회를 맛보았다고 고백한다. 나는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이 학창시절을 지배했고, 그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생존 본능 덕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어쩌면 학창 시절에 느낀 신분 차이/ 경제적 지위의 차이가 그로 하여금 계속해서 깨어 있을 수 있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이는 얼핏 보기에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신분의 격차/ 힘의 차이를 느낀 많은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 약한 자에게 시선을 돌리기보다는, 그 신분을 극복할 만한 사다리를 오르려 끊임없이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 시스템에 굴복한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히려 자신보다 더 낮고 약한 사람들에게 더욱 폭력적인 성향의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오웰의 시선은 위가 아닌 아래로, 접시닦이와 노숙자들에게로 향했다. 그는 인간의 조건을 고민했고, 그 조건에 맞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려내려 노력했다. 그 속에 조금의 위선과 엘리트주의가 있었는지 아닌지는 사실 알 수 없다.
이러나 저러나 요즘 우리가 서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잘 살아보세' 류의 에세이집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가볍게 휙휙 넘기기보다는 에세이가 하나 끝날 때마다 조금씩 쉬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가벼운 제목에 숨겨진 무거운 타자와의 갈등, 근대 유럽 속 정치의 소용돌이를 느끼고 싶다면 추천할 만하다. 무엇보다, 글을 너무 잘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