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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일리 Dec 09. 2020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다들 그런 때가 있지 않나요? 광활한 우주 안에 내가 짊어지고 가는 이 인생이 한없이 작다고 느낄 때가. 내가 사랑하고 미워하고 용을 쓰는 이 현실을 갑자기 한 발자국 떨어져 보게 될 때가. 그럴 때면 나의 우스운 행동과 지나치게 진지한 마음, 남들을 향한 안쓰러운 노력 같은 것들을 다 포기해 버리고 싶지 않나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바로 그런 마음이 생길 때 읽기 좋은 책입니다. 가벼운 남자와 무거운 여자 사이의 사랑을 그린 이 책은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한편으로 하나의 철학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자 밀란 쿤데라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풀어놓는 곳곳에 인생의 의미에 대한 본인의 철학을 심어놓으며, 이 책을 소설 이상의 무언가로 만들어 냅니다. 덕분에 독자는 하나의 이야기를 읽는 도중 작가가 심어놓은 이미지와 상징물들을 곱씹을 수 있으며, 동시에 본인의 인생에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적용시킬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제목이 '참을 수 없는 인생의 가벼움' 일까요? 이는 소설 첫 장을 읽으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작가는 우리가 흔히 느끼는 인생의 덧없음이 사실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찰나를 살아갈 수밖에 없어서, 그리고 인생을 한번 더 되풀이할 수 없어서,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존재입니다. 만일 우리가 인생을 한번 더 살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면 그 두 번째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어떤 실수를 했다면 다음 인생에서 그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지요. 더 선하고 더 후회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터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고, 지금 이 순간에도 찰나는 계속해서 손끝에서 빠져나갈 뿐입니다.


1) 토마시와 테레자 - 우연과 운명, 그 사이를 교향곡처럼 작곡하는 커플


주인공 중 한 명인 토마시는 한없이 가벼운 남성입니다. 외과의사인 그는 여러 여자 친구와 성관계를 하는 데서 만족감을 얻지만, 그 누구와도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지 않습니다. 그들과 함께 밤을 지새우고 싶지 않아서 집에는 소파조차 들여놓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보헤미아의 한 마을에서 테레자라는 여인을 만나 운명에 이끌리듯 사랑에 빠집니다. 그녀가 하필 그날 아파서 그랬는지, 그녀가 보헤미아를 떠나 프라하로 그를 찾아와서 그랬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우연이 여러 번 겹친 작은 만남으로 인해 토마시는 테레자와 동거를 시작합니다.


테레자는 토마시와 정반대의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한 그녀에게 삶이란 끊임없이 증명해내야만 하는 무거운 것입니다.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 어머니는 늙고 추한 자신의 모습에서 오는 불행을 테레자를 향한 학대로 풀어냈습니다. 테레자는 어머니에 대한 반항심으로 오히려 더욱 외모에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바람기가 다분한 토마시를 만나 겪는 인생의 무게는 더욱 무거웠을 것입니다. 만남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토마시와 달리, 테레자는 우연이 여러 번 겹치면 그게 바로 운명이라고 여깁니다.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작가는 토마시와 테레자의 만남을 통해 가벼움과 무거움, 우연과 운명이라는 서로 다른 이미지의 대조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인간이 인생을 살아나가는 방식에는 우연을 마치 운명처럼 그려내는 미학적 과정이 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토마시와 테레자가 서로 다른 인생의 의미를 가지고 관계를 맺어가듯, 인간은 본질적 가벼움에도 불구하고 우연에 미학적인 의미부여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에는 인생이란 이렇다는 식의 결정론도, 인생이란 이렇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뻔한 조언도 없습니다. 그저 살아 숨 쉬는 다른 인물들을 분석하며 작가가 늘어놓는 상념과 여러 이미지를 통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의 결론을 향해 가지 않아도 된다는 다채로움이 독자의 독서 경험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줍니다.


"현기증, 그것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현기증은 우리 발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홀리는 공허의 목소리, 나중에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


2) 사비나와 프란츠 - 결코 닿을 수 없는 타인에 대한 고찰


사비나는 프라하에 거주하는 화가로, 자유로운 영혼과 그에 못지않은 자유로운 관계를 즐기는 여성입니다. 사실 앞서 소개한 토마시와도 가벼운 관계를 맺고 있었죠. 그렇게 인생을 즐기던 그녀는 어느 날 명망 있는 과학자 프란츠와 연인으로 발전합니다. 프란츠는 사비나와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입니다. 학계에서 명성을 떨치며 살아가고 있지만, 자신이 있는 곳의 현실성을 부정하고 진정한 현실이 다른 곳에 있다고 여기죠. 그는 현실감을 느끼기 위해 시위 행렬이나 혁명에 참가합니다. 그런 그에게 사비나라는 보헤미안 아티스트는 삶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한 사람으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비나는 그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공산주의와 혁명의 과정을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보헤미안 토박이입니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을 둘러싼 세계(공산주의)를 배신하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죠. 그렇기에 프란츠와 사비나는 서로의 육체는 탐하지만, 결코 합일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성관계를 맺는 도중 중절모를 가지고 장난을 치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합니다. 밀란 쿤데라는 서로 닿을 수 없는 타자와의 이질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토마스와 사비나가 중산모자의 모티프를 서로 나눠 가졌듯)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사비나와 프란츠의 이야기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토마시와 테레자의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토마시와 테레자 사이에는 가벼움과 무거움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사비나와 프란츠도 한쪽은 한없이 가벼운 반면 한쪽은 한없이 무겁습니다. 예를 들어 사비나는 공산주의라는 사상에 별다른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고 본인이 속한 세계(프란츠까지도)를 계속해서 배신하며 파리로, 뉴욕으로 향합니다. 반면 프란츠는 테레자가 떠난 다음에도 그녀가 자신을 어디에선가 부르고 있다고 믿으며, 그녀와 자신 사이의 운명을 믿습니다. 마치 테레자처럼요.


그러나 토마스-테레자 커플과는 달리 사비나-프란츠 커플은 진정한 사랑에 도달하지 못하고 흩어져 각자의 끝을 마주합니다. 이런 상반된 결말 역시 독자의 상상력과 의문을 자극합니다. 우리는 과연 토마스-테레자처럼 미학적인 운명의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아니면 끝끝내 사비나에게 자신의 무거움을 인정받지 못한 프란츠처럼, 무거운 나의 인생을 누군가로부터 가볍게 외면당하게 될까요?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우연일까요? 아니면 운명일까요?


다시 분명한 것은 우리는 타인의 삶을 살지 못할뿐더러, 나의 두 번째 인생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무엇에 의해 어디로 흘러가든, 그것을 증명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나의 과거는 누군가에게 한없이 가벼워질 터입니다.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3) 카레닌의 미소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영원 회귀 사상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영원 회귀가 무엇인지는 사실 아직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영원 회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들 뒤에 있는 이 긴 길, 이 길은 영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 앞에 있는 저 긴 길 - 그 길은 또 다른 쪽 영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두 길은 서로 반대쪽으로 나 있다. 그들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리고 이 두 길은 이 출입구에서 만난다. 이 출입구의 이름은 그 위에 씌어 있다. '순간'이라고."


개인적으로 니체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영원 회귀라는 사상이 시간을 직선의 형태가 아닌 순환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시간이란 단선적으로 흘러서 지금의 뒤에는 과거가 있고 지금의 앞에 미래가 있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니체에 의하면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고 찰나의 반복으로 흘러갑니다. 찰나는 영원과도 같고, 그 영원은 찰나가 계속되면서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그리하여 시간은 영원히 회귀합니다.


니체가 말한 시간의 개념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초인은 드물 것입니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도 주인공들은 인생의 가벼움과 무거움과 관련한 많은 경험을 하지만, 이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몰라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 유일하게 니체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토마스와 테레자의 개, 카레닌입니다.


책 표지에 그려진 카레닌의 모습

밀란 쿤데라가 직접 그렸다는 이 책의 표지에도 카레닌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만큼 카레닌은 단순한 반려 동물을 넘어 이 책의 핵심적인 등장인물(이 아닌 등장물)입니다. 카레닌은 니체의 가르침을 행하고,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유일한 존재입니다.


카레닌은 잠에서 깰 때 순수한 행복을 느꼈다. 그는 천진난만하게도 자신이 아직도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진심으로 이를 즐거워했다. 반면에 테레자는 밤을 연장하고 싶고 다시 눈을 뜨고 싶지 않은 욕망 때문에 마지못해 잠에서 깨어났다.
카레닌이 개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틀림없이 테레자에게 오래전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 매일같이 입에 크루아상을 물고 다니는 게 이제 재미없어. 뭔가 다른 것을 찾아줄 수 있겠어?" 이 말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심판이 담겨 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라고 테레자는 생각한다.


결국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하루하루를 이루는 반복적인 일에서 싫증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는 결론이 납니다. 오늘 처음으로 세상에 온 것처럼, 지금 먹고 있는 크루아상을 마치 어제는 먹지 않았던 것처럼 계속해서 반복하며 살아가야만 영원히 반복되는 시간을 진정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라고 말합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우리는 그를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주어진 주사위의 결과를 받아들인 채 주사위를 다시 던지는 것뿐입니다. 비록 그것이 무의미할지라도, 나의 미래를 조금도 바꾸지 못할 지라도. 나에게 주어진 것은 지금 이 순간뿐 이기 때문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연애 혹은 섹스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다가도, 중간중간 삶과 존재에 대한 무거운 생각들로 인해 휙휙 넘기기 어려워지는 책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수많은 가르침 (인생은 소중하다 / 우리는 선하게 살아한다 / 삶을 성실히 살아야 한다)에 삐딱선을 타고 싶은 사람이라면 읽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매일매일을 행복하게 사는 카레닌처럼, 오늘 당신의 책장 넘기는 소리가 반복에서 오는 행복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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