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예전부터 이런 농담을 해왔다.
대학병원 내과 과장인 영빈은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참한 교사 와이프와 토끼같은 두 딸, 와이프를 도와 살림을 맡아주는 어머니까지. 강남에 있는 40평대 아파트에 살며 간간히 TV 프로그램에도 등장하는 그는 세상을 이긴 사람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는 한평생 모범생으로 살아왔다는 일종의 억울함을 품고 있다. 공부를 잘해야 응당 의사가 되고, 의사가 되었으면 응당 괜찮은 직업과 집안의 여자와 결혼을 해야 했다. 그래서 영빈의 삶에는 안정감은 있어도 자율성은 없다. 그가 유일하게 숨 쉬는 공간은 40평대 아파트의 0.7평만을 차지하는 다용도실. 그곳에서 일렁이는 강변북로를 보며 영빈은 중년의 고독을 달랜다.
그에게도 가슴 떨리는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 남들 앞에서 나는 장래 의사가 되겠다고 했던 날이었다. 라이벌인 광이 ‘훌륭한 의사가 되겠다’고 말했으니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 돈을 많이 버는 의사가 되겠다는 거였다. 그 둘의 말을 귀담아듣던 동급생 여자애 현금은 수업이 끝난 후 '나는 돈을 많이 버는 의사에게 시집을 갈 거라'며 혀를 낼름 내민다. 광과 영빈은 그런 현금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이야기는 껍데기처럼 살아가던 중년의 영빈이 현금을 병원에서 마주친 날로부터 시작된다. 사채업자와 결혼하고 이혼 후 홀로 살고 있는 현금은 예전과 같지는 않아도 여전히 관능적이다. 허무한 삶에 지쳐가던 영빈에게 현금의 등장은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처럼 보인다. 그렇게 영빈과 현금의 부적절한 관계가 시작되고, 박완서의 자본주의 및 가부장제 해체쇼가 벌어진다.
90년대생인 나에게 박완서라는 이름은 어렴풋하고 때로는 전형적으로 느껴졌다. 전쟁의 아픔을 다뤘다는 소개글을 읽고 나면 왜인지 그녀가 쓴 책을 모두 읽어본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전쟁의 아픔을 다뤘다고? 뭐 전쟁이 얼마나 끔찍했나,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다 끝나겠지. 나와 같은 어리석은 독자에게 <아주 오래된 농담>은 도파민 넘치는 스토리로 박완서의 세계를 소개한다. 영빈과 현금의 불륜, 재벌가에 시집간 영빈의 여동생 영묘의 병수발, 영묘와 결혼한 후 암에 걸리지만 자신의 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경호, 영묘를 조종하여 가문의 영광을 드높이려는 Y건설의 송회장과 시할머니까지. 아침드라마에서 볼 법한 이야기가 긴박하게 전개되는 것이 넷플릭스보다 자극적이다. <아주 오래된 농담>이 출판된 것은 2000년이다. 지금으로부터 26년전 독자들은 이런 소설을 두고도 나같은 어린아이에게 “박완서는 전쟁의 아픔을 다뤘다“는 재미없는 말으로 독서 장벽을 세웠더랬다.
책 속 인물은 하나같이 미쳐있다. 결혼할 여자조차 자신의 의지로 고르지 못한 영빈, 시댁의 경제적 횡포에 꼼짝하지 못하여 속에 병이 쌓이는 영묘, 자기 몸에 대한 주도권을 갖지 못한 채 죽어가는 경호, 자식의 생전 모습보다 자식의 장례식에 올 사람이 더 걱정인 송 회장까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라는 이름 아래 모범 시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서로를 향해 폭력의 칼을 계속 휘두른다. 영빈은 가정을 배반하고, 영묘는 자신의 영혼을 배신한다. 경호는 꼭두각시로만 살아가며 송 회장은 인간이기를 포기한다. 현금은 자식에게 병명을 알리지 않는 이 일련의 사태가 ‘모두 농담일 뿐’이라며 웃어넘긴다. 그렇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속을 할퀴며 농담을 계속해 왔다.
이야기의 인물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 철저히 순응하는 방식으로 나름의 투쟁을 전개한다.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더 많은 돈을 쓰고, 아들을 향한 집착에서 해방되기 위해 기어이 아들을 낳고자 한다. 투쟁의 끝은 아름답거나 희망차지 않다. 그럼에도 확실한 종결이라는 점에서 해방감을 안긴다.
이 책은 자본주의에 대한 동화 같은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는 이상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더 속이 시원해질 수 있다. 그래, 기왕 다들 미친거 나도 같이 미쳐보자. 이길 수 없을 거라면 철저한 패자가 되자. 책을 덮은 후 버스에 앉은 승객들의 얼굴이 문득 섬뜩하게 느껴졌다. 순진해보이는 이들의 속에도 가족을 피흘리게 할 면도날이 있을까. 우리는 언제 서로에게 진실을 말하고, 농담같은 이 굴레를 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