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존재해야 마땅할 사랑하는 마음
인류는 억압에 저항한 세월을 거쳐 진정으로 자유로워졌을까? 왜 우리는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때로는 내 앞에 놓인 이 자유를 한꺼번에 포기하고 싶어질까? 왜 어떤 자는 자신의 자아를 모두 버리고, 소위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선택을 감행하는 것일까? 1941년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 쓴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위의 질문에 답하며, 서구 사회에서 종교 개혁과 자본주의로 인해 사람들에게 자리잡힌 심리 상태가 어떻게 1930년대의 파시즘으로 이어졌는지 분석한다. 비록 약 80년 전 쓰여진 책이지만 오늘날 적용해도 전혀 이질감이 없는 이 책은 자유를 맞닥뜨린 현대인의 심정을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진단하고 있다.
책은 총 7장으로 구성되며, 인간과 자유에 대한 고찰인 1장에서 시작하여 인류의 역사 속 개인이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다룬 2장으로 넘어간다. 3장에서는 종교개혁 시대의 자유를 다루고, 4장에서는 종교시대 이후 근대인의 관점에서 본 자유를 다룬다. 5장에서는 이 책에서 중요한 두 가지 개념 중 하나인 도피에 대해 다루며, 6장에서는 앞에서 다룬 내용을 바탕으로 어떻게 독일 사람들이 나치즘을 받아들였는지 분석한다. 7장에서는 파시즘에 경도되어 자유로부터 도피했던 지난 역사를 반성하고, 현대 사회에서 무지성한 인간으로 살아가지 않기 위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제시하며 끝난다.
역사적으로 인류는 이성의 힘으로 억압으로부터 개인을 되찾기 위해 싸워왔다. 그리하여 계급으로부터의 자유, 자연으로부터의 자유, 구태의연한 정치 및 종교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었고, 이러한 자유가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상"이 도래했다. 중세 시대에는 태어나면 할 일이 정해져 있었다. 농민은 농민의 삶을 살면 되었고, 귀족은 귀족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중세 시대의 인간은 다른 가능성을 꿈 꿀 수 없었다. 그러나 15, 16세기 사회적 경제적 변화로 인해 도시 중산층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생겨났다. 이들은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한편 이전 시대가 누렸던 안전감과 소속감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무한한 가능성은 곧 무한한 불안을 의미한다. 관계의 속박이 없다는 것은 곧 고독과 고립감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전보다 분명 더 자유로워졌지만, 그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는 없는 상태로 남았다.
에리히 프롬은 역사적 투쟁을 통해 소극적 자유를 얻은 인간이 적극적 자유 - 자신의 자아를 표출하며 생동감있는 생을 살아나가는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몰라 무한한 자유 그 자체에 잠식될 위험에 빠졌고, 그런 심리가 종교개혁에서부터 시작하여 파시즘까지 이어져왔다고 설명한다.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방법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1) 자기 이외의 더 뛰어난 권위에 자아를 의탁하는 권위주의, 2) 파괴성에 자아를 맡기는 것, 그리고 3) 자동인형으로 살아가는 방법이 있다. 1과 2의 매커니즘은 파시즘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3의 매커니즘은 현대인에게서 자주 관찰된다.
종교개혁과 파시즘에 빠진 인간은 자신보다 더 나은 무언가, 더 완벽한 어떤 이상, 더 훌륭하신 나의 주님을 위해 자아를 기꺼이 희생하고자 한다. 이는 일종의 피학적(masochistic) 충동이다. 연구자들은 피학적 충동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어려워하고는 했다. 남을 지배하고 소유하고 싶어하는 가학적(Sadistic) 충동이야 인간 본성과 연관시켜 이해할 수 있다고 쳐도, 남에게 지배 당하고 그에게 고통 당하는 것을 즐기는 피학적 충동이 어떻게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말인가? 프롬은 피학적 충동이 고독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 열등감과 허무함, 그리고 삶에 대한 무력감에서 나온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외부의 힘이 지니는 실제적 명령이나 가상의 명령에 복종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나는 무엇을 원한다"거나 "나는 존재한다"는 감정을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삶을 전체적으로 엄청나게 강력한 것, 도저히 지배도 통제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느낀다.
더 극단적인 경우 - 이런 경우는 너무나 많다 - 에는 자신을 비하하고 외부의 힘에 복종하는 경향 외에 자신을 해치고 괴롭히려는 경향까지 드러낸다. 본문 158pg
한편으로 인간은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사회 속에서 자아 없이 기능하는 "자동인형"의 상태로 도피할 수도 있다. 그는 자신만의 의견을 구축하지 못하며, TV나 라디오에서 떠드는 소리를 자신의 의견인 것 처럼 포장한다. 어떤 직업을 원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괜찮아" 보이는 직업을 아무런 고민 없이 선택하고는 스스로 한 선택이라 착각한다. 이런 인간은 비록 살아는 있지만 진정으로 살아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말하자면 사람이 아닌 인형의 인생을 산다. 많은 현대인이 자신만의 의견을 가지기를, 자신의 자아를 두려움없이 표출하기를 두려워한다. 사회의 안정적인 일원이 되어 규범에 순응하고, 의견을 가지지 않는 상태가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자아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세상으로부터 위협 받지 않고 세상의 일부로 여전히 기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권위에 복종하면, 외부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사회적 관계를 파괴하면, 혹은 외부와 완전히 동화되어 순응하는 인형처럼 살아가면 인간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프롬은 책의 말미에 이러한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절대 인간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위 세가지 방법은 말 그대로 적극적 자유로부터 일시적으로 "도피"하는 매커니즘이며, 절대 인간이 마주하는 고독과 불안을 완전히 해결해 줄 수는 없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잃지 않아야만, 자신의 자아를 생산적 활동으로 표출해야만 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직시하고, 자발적 활동으로 자아를 실현하는 적극적 자유로 나아가야 한다.
그는 자아의 실현과 적극적 자유의 실현의 핵심 요소를 사랑과 생산적 활동으로 꼽는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책의 7장 "자유와 민주주의"에 보다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핵심은 자신의 자아를 표출하면서 세계와 관계를 맺는 것, 삶의 의미는 산다는 행위 자체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독자는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으며 삶에 대한 회의에 빠진다. 혹시 나도 자동인형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부모와 선생이 옳다고 한 길을 의심 없이 따르며, 내 안에 자라나는 자아를 애써 꾹꾹 누르고 있었을까? 민주화 운동의 시대를 지나 저항할 대상이 없이 평화로운 청춘을 보낸 요즈음의 젊은이들이 집단적으로 회사를 그만두거나 방 안에 고립되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게 너무 많은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자아를 표출할 길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나 역시 자동인형처럼 살고는 했다. 20대 후반 자동인형이 되기에 적합한 자리를 찾았을 때 비로소 안도했다. 아, 나도 이제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겠구나. 남들이 봤을 때 허접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멀쩡한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 당시 나와 함께 갈팡질팡하던 친구들 역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남들을 지나치게 신경썼다. 우리가 생각하던 '남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우리는 끊임없이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여기에서 "현실"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우리도 알 수 없었다. 구체적인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상 속의 잔혹한 세상, 그리고 현실과 싸우고 있었다. 이 세상과 단절되고 싶지 않았으므로, 타인으로부터 미움받고 싶지 않았으므로.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계속해서 자신을 억압하기 위해 되뇌었던 남들의 시선과 현실적 제약이란 진짜로 존재하는 물리적인 실체가 아닌 가상으로 만들어낸 하나의 환상이었다.
자동인형의 삶은 꽤나 행복했다. 남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잔뜩 으스댈 수 있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어딘가에 속해 있다고 이야기하면 타인이 흡족해하며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는다는 것이, 여론과 상식에 부합하는 인간이 되어 으레 생각하는 정답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간편했다. 어쩌면 이렇게 계속 살아가도 큰 무리는 없지 않을까? 권위에 짓눌려 있더라도 안전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이곳을 벗어나면, 내가 원하는 바와 느끼는 바를 솔직하게 얘기하면 어딘가 나락으로 떨어져 버릴 것 같았다.
나는 권위에 복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권위 앞에서 나의 인간성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억울하거나 잘못된 일을 겪어도 그 구조 안에서의 나 자신을 무시하기 바빴다. 불만과 답답함이 있더라도 내 마음 속으로 삼켜왔다. 그렇게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과정이 안정감과 만족감을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깝게도 끝없이 인내하는 삶은 그다지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고 권위주의에 짓눌려 스스로를 옥죄었던 그 나날에 대해 생각한다. 나에게도 어떤 피학적 충동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세상은 어차피 내 통제 밖에 있다는 무력감. 내가 가진 능력과 자신으로서의 특징은 어차피 더 큰 이 세상에 통합되기에는 너무나 보잘것없다는 자기혐오. 그때 왜 난 내가 가진 자아를 솔직하게 꺼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까? 나의 목소리를 타인에게 전하고, 나에게 알맞은 자리가 뭔지 세상과 조율해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용기가 없어서, 이 세상이라는 큰 존재에 맞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갇혀서이지 않을까 싶다. 그때로부터 몇 년이 지난 오늘 내가 얼마나 연약했는지 보였다. 자신이 만들어 낸 상상 속 현실과 싸우며, 자기 혐오를 감추며 괴로워한 자아가 보였다. 아무도 그렇게 내가 희생한 자아에 대해 잘했다며 칭찬해주지 않았다. 자기 혐오는 나 자신을 포기하면 포기할수록 내면을 침범했다. 그냥 난 시간을 잃어버린 채 배만 불리며 살 뿐이었다.
난 그때 제대로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했다. 오히려 타인에게 남을 끊임없이 '사랑해달라고' 했다. 프롬에 의하면 이는 자기애가 아니라 탐욕이었다. 끊임없이 만족을 모른 채 더 큰 무언가를 상상하고 바라는 자아를 진정시킬 도리는 없었다.
이기심은 자기애와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자기애와는 정반대의 것과 동일하다. 이기심은 일종의 탐욕이다. 모든 탐욕이 그렇듯이, 이기심은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불만족감을 포함하며, 그 결과 진정한 만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탐욕은 바닥이 없는 구덩이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지만 끝내 만족에 도달하지 못하고 기진맥진한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이기적인 사람은 항상 불안하게 자신을 걱정하지만, 절대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안절부절못하고, 충분히 얻지 못하거나 뭔가를 놓치러나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늘 사로잡혀 있다. 그는 자기보다 다더 많이 가진 사람에 대한 불타는 질투심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무의식적인 역학 관계를 관찰해보면, 이런 유형의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며, 사실은 자신을 몹시 혐오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g 130
그건 아마도 자아를 버리고 사는 시간에 대한 보상심리였던 것 같다. 사회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버렸으니, 때마침 걸려든 '날 사랑해야 마땅한 사람들'에게 과한 충성심을 요구하는 형국이었다. 보상 심리가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것 만큼 나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충성을 맹세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밑 빠진 독에 계속해서 술을 넣는 것처럼, 잃어버린 자아는 탐욕이라는 괴물이 되어 인생을 덮쳤다.
누군가 나와 같은 세월을 보내고 있는 이도 있을 것이다. 길을 잃어서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자아를 계속해서 방치하는 기분이 드는 사람들. 남들의 말에 계속해서 웃어주고 신경을 거슬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다가, 오히려 자신의 정신이 망가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사람들. 어떻게 하면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준 것은 믿음과 사랑, 그리고 용기였다.
자신을 싫어하고 내면을 억누를수록, 사실은 나의 자아가 존중받아도 될 무언가는 아닐까 하는 회의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인생은 내가 보고 경험하는 것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을까? 차가운 현실과 나의 인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그 상상 속의 지옥이 과연 있는 게 맞을까? 어느 날 나는 손끝으로 방 안의 공기를 만지고, 두 다리로 땅을 힘껏 밀어내 보았다. 문득 내가 존재해야만 나의 인생이 존재할 수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나의 몸과 정신으로 세계를 경험하고 통과해나가야만 인생이 이루어진다는 진실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몸과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고, 타인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저 깊은 곳에서 몸집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자신을 싫어하지 않고 사랑하여, 믿고 용기를 낼 구석도 생겨났다.
친구들이 나에게 물었다. 그렇게 자신을 믿는 게 어떻게 가능했느냐고.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었느냐고. 그러나 프롬에 따르면 자신을 긍정하고 표현하도록 놔두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신을 혐오하고 억누르면서 어딘가로 도피하는 것은 그런 자아의 본성을 억누르기 마련이기에 자연스럽지 않다. 당신이 자기 혐오로 가득차 있다 해도 내면의 깊은 곳에선 사실 나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과, 나의 인생이 아름답고 사랑으로 가득찰 수 있다는 진실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자동인형으로서의 삶이 끝난 건 아니었다. 난 여전히 남들을 만족시키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사회의 정도를 걷지 못한다는 생각에 불안해한다. 현실의 벽에 가끔 덮쳐지는 상상을 하고, 내 안의 괴물과 싸우기도 한다. 그러나 참을 수 없이 죽음을 사랑하고 싶을 때, 나 자신을 버리고 싶을 때는 생각한다. 손끝과 발끝을 타고 지나갔던 나의 세상과, 내 안에 존재해야 마땅한 사랑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