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라의 독주!
2025년 한국시간 3월 3일 오전 9시 세계적인 영화 시상식인 아카데미 시상식이 생중계되었다. 2024년은 특히 여러 좋은 작품의 활약이 두드러진 한 해였기에 대표 부문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등이 한 영화에 집중될 지, 아니면 여러 영화로 분산될지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특히 <브루탈리스트>와 <아노라>는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모두에 후보로 등재되어 이 두 영화의 경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가 주요 관심사였다. 시상식 주요 결과는 아래와 같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노라>의 독주이다.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그리고 여우주연상까지 총 후보로 오른 6개 부문 중 5개 부문에서 최종 수상하였다. 반면 <브루탈리스트>는 총 10개 부문 후보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2개 부문에서 수상하는 데 그쳤고, 거의 확실시되던 남우주연상 부문을 제외하고 작품상이나 감독상과 같은 영화 자체에 수여하는 상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SAG(Screenplay Actors Guild)와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유력 후보로 오른 데미 무어는 아카데미에서는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데 실패하였고, 그 영광은 20대 여배우인 <아노라>의 마이키 매디슨에게 돌아갔다. 데미 무어가 출연한 <서브스턴스>는 5개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분장상 1개를 수상하는 데 그쳤다. (물론 여우주연상 외의 다른 부문에서 유력 후보로 거론되지는 않았다.)
한국에서는 아직 개봉하지 않았지만 넷플릭스에서 곧 공개 예정인 <에밀리아페레즈>의 경우 무려 12개 부문에서 후보로 이름을 올렸고, 여우조연상과 오리지널음악상을 수상하였다. 역시 국내 미개봉 작품인 <콘클라베> 역시 8개 부문에 오르며 저력을 과시하였으나 각색상 외에는 수상하지 못했다. 국내 많은 관객을 모은 <위키드> 역시 7개 부문에서 후보에 올랐고 의상상과 프로덕션디자인상을 수상하였다.
많은 수상소감에서 다양성과 관련한 언급이 두드러졌다. 여우조연상 수상자인 <에밀리아페레즈>의 조이 샐다냐는 "나의 할머니는 이 나라에 1961년에 도착하였고, 나는 이민자의 자랑스러운 자손이다. 그들의 성실함과 고귀함을 바탕으로 나는 도미니칸계에서 처음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배우가 되었고, 마지막이 되지 않으리라 자신한다. 스페인어로 노래하고 말하는 영화에서 상을 받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라며 히스패닉 계통의 존재감을 드러내었고, <위키드>로 의상상을 수상한 의상 디자이너 폴 타즈웰은 이번이 흑인 남성으로 받은 첫 의상상이라고 언급하며 자랑스러움을 전했다.
5개 부문에서 수상한 <아노라>의 션 베이커는 각본상 수상소감으로 성 노동자 커뮤니티에 대한 감사함을 전했고, 감독상 수상 이후에는 "우리는 어디에서 영화와 사랑에 빠졌을까요? 바로 영화관에서입니다."라고 수상소감을 시작하며 큰 영화관에서 관객과 함께하는 감상 체험이 극단적으로 갈라진 세상에서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후배 영화감독들이 "계속해서 큰 영화관에서 상영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었으면 한다"고 언급하며, 독립영화관이 사라지고 집에서 영화를 보는 문화가 빠르게 확산되는 현 세태를 비판하였다. 수상소감 말미에는 "우리 어머니는 내가 다섯살일 때 나를 처음으로 영화관에 데려가셨고, 나는 그녀에게 감사한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기도 하다. 어머님 생일 축하하고, 감사한다. 이 상을 당신에게 바친다"라고 언급하며 마무리하였다.
개인적으로 감독상과 작품상이 모두 <아노라>에 돌아가 한편으로 기쁘지만, <브루탈리스트>에게 분배되지 못하여 약간은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아노라>는 훌륭한 영화이지만, <브루탈리스트> 역시 그 만듦새와 연기에 손색이 없었다. <브루탈리스트>가 극중 배우의 폴란드어 발음을 능숙하게 하기 위해 AI를 사용하여 소소하게 논란이 있었던 것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사회자인 코난 오브라이언이 "관객 여러분, 우리는 이 시상식 어디에도 AI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라며 건넨 농담은 <브루탈리스트> 제작진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그나마 확실시되던 애드리언 브로디의 남우주연상 수상이 현실이 되어 위안을 삼아본다.
데미 무어의 여우주연상 수상 불발 역시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서브스턴스>에서 그녀가 보여준 연기는 단순히 연기를 잘 하는 것을 넘어 데미 무어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고찰로 느껴지기도 했다. 한 때 잘 나가던 배우였으나 나이가 들며 가치가 없다는 평가를 받는 주인공 엘리자베스 스파클의 삶은 "너는 팝콘 여배우일 뿐이다"라고 은근히 멸시 받던 데미 무어가 느껴온 불안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서브스턴스>에서 그녀가 묘사한 젊음에 대한 갈망과 나이들어 가치없어지는 자신에 대한 혐오는 관객에게 절절히 전달되어 극의 긴장감과 완성도를 더욱 높였다. 관객들은 그녀의 수상이 불발되었음을 아쉬워하며 "데미 무어가 여우주연상을 받지 못하는 이 상황이 <서브스턴스>를 완성시킨다.", "아카데미는 유독 호러 영화에 점수를 박하게 주는 것 같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독립 영화, 유색 인종, 이민자 서사에 큰 점수를 준 아카데미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수상은 아카데미 회원들의 결정에 따르므로 일반 관객이나 평론가의 평가와 달라지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관객으로서는 수상 결과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기보다 아카데미 회원의 깐깐한 눈을 만족시킨 후보작들을 둘러보는 것이 시상식 감상 경험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주리라 생각한다. 내년에는 더 다양한 서사와 예술적 시각이 관객의 일상에 찾아오기를 바라며, 마법 같았던 신시아 애리보와 아리아나 그란데의 <Defying Gravity> 동영상 감상을 권장하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