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까만 프레임에 비치는 모습이 얼마나 예뻤는지 알아?
J양은 자신이 어떻게 하다 퀸 사이즈 침대를 사게 되었는지를 위와 같은 낭만적인 말으로 시작했다.
J는 자취 한달차 새내기였다. 야무지게 집을 구하던 그녀는 새집 정비를 끝낸 후 친구들을 집으로 불렀다. 그녀의 오피스텔 안은 자취의 로망을 담은 물건으로 가득했다. 아기자기한 화분과 예쁜 찻잔, 책장과 테이블을 겸하는 신개념 나무 판자들은 친구들의 감탄을 사기에 충분했다. 가장 주목을 끈 것은 역시 퀸 사이즈 침대였다. 그녀는 파리에서 만난 남자의 집에 있는 퀸 사이즈 철제 프레임의 침대를 보고는 혼자 살더라도 퀸 침대를 사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J양의 친구들은 애프터눈 티 세트와 피자를 먹은 후 세명이서 퀸 침대에 누워보았다. 세명도 누울 수 있네? J양의 선택은 옳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날은 불타는 금요일. H양도 업무를 끝내고 J양의 집에서 막 피자를 씹고 있던 참이었다. 잇몸 운동은 생각을 촉진시킨다고 하던가? H양은 J양의 철제 프레임을 보며 파리의 한 다락방을 상상했다. 달빛이 쏟아지는 비스듬한 창문, 그 아래 넓게 펼쳐진 까만 철제 프레임 침대는 상상만으로도 아름다웠다. 그 위에서 친구나 애인과 영화를 보며 낄낄거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 H양은 당근마켓 어플리케이션을 다운받아 관심 항목에 침대를 추가했다.
H양은 서울로 이사하며 전 세입자가 남기고 간 침대에 매트리스 커버만 바꿔 끼워 그대로 쓰고 있었다. 침대는 사용하는 데 불편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사이즈가 조금 작을 뿐이었다.
본래 슈퍼 싱글 사이즈에서도 잘만 잠에 들던 H양은 J양의 집에 다녀온 후로 좀처럼 잠에 들지 못했다. H양에게도 자기 삶에 필요한 것 그 이상을 욕망하는 단계가 찾아온 것이다. 1인 가구인 자신의 삶에는 슈퍼 싱글이 필요하지만, 기왕이면 그 이상의 사이즈가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물론 6평 짜리 집이면 혼자 살기에 충분하지만, 그럼에도 10평이 넘는다면 더욱 쾌적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당근마켓에 올라온 수많은 퀸 사이즈 침대 판매해요 글에 찜하기를 누르기 시작했다. 채팅으로 가격을 네고하고, 용달 차를 섭외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슈퍼 싱글 침대를 무료 나눔한다는 글을 올려 기존 침대를 처분하는 약속까지 받아놨다.
대망의 침대 교체일, H양은 회사에 오늘 일이 있어 칼같이 퇴근해야한다는 엄포를 놓고는 여섯시 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빠르게 퇴근했다. 공덕동 오피스텔에서 용달 아저씨와 함께 퀸 침대를 힘겹게 트럭 위로 싣고는 마포구 자취방으로 향했다. 침대와 용달차 예약, 대금 송금까지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다. 자취방에 침대를 옮겨 두고 슈퍼싱글 침대를 잠깐 집 밖에 놔둘 때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이제 채팅으로 나눔 약속을 한 이 뭉게구름님만 제때 나타나면 되었다.
뭉게구름님, 어디쯤이세요? 오늘 8시 약속이신데 아직 연락이 없으셔서요~
저녁 여섯시반, H양은 오후에 보낸 채팅에 답변이 오지 않는 것을 보고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상대는 당근마켓으로 걸려오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당근 노쇼인가. 다른 노쇼는 기껏해야 기분이 좀 나쁠 수준일지 몰라도 H양은 원룸에 싱글침대 하나와 퀸 침대 하나가 동시에 놔두고 생활할 수가 없었다. 다급하게 지금 침대를 가져갈 사람을 인터넷으로 수소문해 봤지만 소용 없었다. H양은 꼼짝없이 슈퍼싱글 침대를 혼자 처분해야 했다.
그리고 H양은 오랜만에 '그 감정' 을 느꼈다. 바로 자책이었다. 이렇게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마다 H양은 스스로를 자책하고는 했다. 왜 노쇼를 미리 예상하지 못했을까? 왜 침대가 나가는 날과 들어오는 날을 같은 날으로 잡았을까? 애초에 왜 집에 들어갈 때 전 주인에게 침대를 처분해달라고 하고는 좋은 새 침대를 들여놓지 않았던 것인가? 자책은 혼자서 결정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에게 더욱 자주 찾아온다. 만약 H양이 혼자서 살지 않았더라면, 주변에 H양 대신 결정해 줄 사람이 있었더라면, H양은 이런 자책을 느끼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자기 자신 대신에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아니면 아예 결정 내릴 일 없이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H양은 혼자서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있었고,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도 오로지 자신의 몫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단 하나, 이 상황을 스스로 해결하는 일 뿐이었다.
H양은 우선 핸드폰을 들었다. 우선 ‘숨고’ 어플리케이션에서 대형 폐기물을 공짜로 처리해주는 업체가 있는지를 물색했다. 견적을 올리니 많은 업체에서 연락이 왔지만 대부분 10만원 정도의 가격을 요구했다. 침대는 사는 데만 돈이 드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데도 돈이 드는 물건이었다. 왜 전 세입자가 흔쾌히 침대를 주고 가겠다고 했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결국 대형폐기물 스티커를 붙여 버리는게 가장 저렴한 방법인 듯 했다.
대형 폐기물을 버리기 위해서는 구청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폐기물을 종류를 선택하고 카드로 비용을 납부해야 한다. H양은 당근마켓 후기로 ‘매너가 똥이에요’를 기입한 후 침대 항목의 폐기물 처리 비용을 확인했다. 매트리스와 프레임을 합하니 23000원 정도의 금액을 구청에 납부해야했다.
그렇게 또다시, H양은 오밤중의 침대 해체 쇼를 벌이게 되었다.
지난번 서랍을 조립할 때 사용하던 드라이버가 있는 게 큰 도움이 되었다. 목재 프레임을 가로로 눕힌 후 허벅지로 아래 판자를 고정하고 위의 판자부터 차례로 나사를 빼는 작업이었다. 어휴.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H양이 꾸물거릴수록 이 일이 끝나는 시간은 지연될 예정이었다. 성인이 되기 전에는 하기 싫은 일이 있을 때 늦장을 부리면 어떻게든 해결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H양은 빼도 박도 못하는 성인이었고, 이 모든 일은 강제로 시킨 사람도 아무도 없었기에, H양 혼자 감당해야 했다. H양의 가장 큰 자산인 젊은 몸뚱아리와 약간의 돈을 가지고 말이다.
J양은 자취를 시작하기만 하면 취업도 연애도 인생도 잘 풀릴 것이라 믿었다고 했다. 자기만의 방은 모든 일의 시작점이다. 성인이 되면서 책임져야 하는 일 - 그것이 일이든, 연애든, 자기계발이든 - 그 모든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집 안에 침대를 들여놓는 일 부터 시작해야 한다. H는 낑낑거리며 슈퍼 싱글 매트리스와 분해된 판자를 들고 재활용 쓰레기장에 자신이 벌인 일의 대가를 가지런히 놔 뒀다.
대형폐기물 처리 바랍니다.
H양은 이마의 땀을 닦고 새로 들여온 퀸 침대 위에 누웠다.
침대는 더없이 쾌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