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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iley Jun 06. 2024

조금 뻔뻔해져도 괜찮아

당신은 당신의 답을 가지고 있나요?

꽤 오래 전, 친한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 자신을 정확히 표현한다면 어떻게 표현하겠냐고. 나는 시간에 따라 변하고, 상황에 따라 변하겠지만, 그래도 나라는 사람을 관통하는 문장은 뭐겠냐고. 살면서 그런 고민은 처음 해봤는데, 곰곰이 생각하다 이렇게 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사람들이 진짜 나를 알게 되면 다 나를 떠나갈까봐 항상 무서운 사람" 같다고... 


아직까지도 칭찬을 받으면, 감사하다고 하거나 종종 그런 얘길 듣는다는 너스레를 떨기보단, 멋쩍어하거나 아니라며 손사레를 치는 편이다. 때로는 다른 사람과 별 다를 바 없다는 말도 한다. 지금은 좀 덜한 편인데, 예전에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 메일 하나하나 친구나 상사에게 물어보고 컨펌 받는 편이었고, 내가 한 행동에 대해 크게 의식하면서 갑자기 친구나 상사의 행동을 주시하며 혹시 내가 그를 기분 상하게 하진 않았는지 신경썼다. 아주 잠깐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심리 상담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때 상담사 분은 이것이 내 인생의 정답이 '내'가 아닌 '남'이 되어 그렇다고, 남들의 답을 맞추는 삶을 살지 말라고 말씀 해주셨다. 물론 말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지만.


나는 왜 이렇게까지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나 확신이 없을까? 잘 모르겠다. 원래 그런 성향으로 태어났을 수도 있고, 살면서 겪은 어떤 일들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고, 두 가지 요인이 모두일 수도 있겠지.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크게 몇 가지 사건은 기억이 난다.


하나는, 내가 원래 그런 성향으로 태어났을 확률도 꽤나 높다는 점이다. 다섯살 쯤, (상대적으로 어리므로 내 타고난 성향이 많이 남아있을 시절) 어린이집에서 천장에 날아다니는 커다란 벌레를 보고 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일이 있었다. 소리를 질렀다는 이유로 선생님께 혼이 단단히 났고, 그 다음 날 아침 어린이집 문 바로 앞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서성였던 기억이 있다. 선생님이 이제 나를 미워하는 것 같아서.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두번째는, 학창시절 내내 칭찬에 박했던 엄마 밑에서 자라며 나를 채찍질하는 삶이 익숙해졌을 수도 있다. 나중에 어른이 되고 알게된 사실이지만, 사실 엄마는 나를 꽤나 만족스러워 했는데 엄마의 칭찬이 나를 안주하게 만들까봐 걱정되서 칭찬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 나는 우리 엄마는 만족이라는 걸 모르는 무서운 상사(....) 같다고 생각했고, 나는 언제나 아직은 부족하며,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내 기억에 나는 10대 중반까지는 꽤나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 토론형의 본인의 생각과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는 수업 방식과 달리 교수님이나 선생님의 주입식 교육이 진행되며, 그 안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는 자에 대한 은근한 비난과 멸시가 느껴지게 하는 문화를 정말 싫어하는데, 내가 의도치 않게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중학교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국어 시간에 셜록 홈즈에 관한 수업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에도 나는 책을 좋아했고 특히 그쯤 셜록홈즈에 한참 빠져있을 때여서 선생님이 던진 몇 개의 질문에 나는 내 지식을 뽐내기보단 (그랬을 확률도 없진 않다) 답을 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답을 했고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나중에 여름방학 쯤 알게된 사실이 그 일로 몇몇 친구들이 나를 '잘난 체하는 재수없는 애'라고 생각했다는 사실과 알고보니 '별 생각 없는 그냥 재밌는 애'여서 의외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그 말을 듣고 꽤나 큰 충격을 받았다. '아, 이런 행동을 하면 사람들이 싫어하는구나..', '내가 의도하지 않은 행동으로도 오해를 사고 미움을 받게 되는구나.' 라는 걸 깨달았던 것 같다. 이런 기나긴 역사를 겪어오며 나의 답에 자신이 없는 내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나의 답에 자신 없는 똑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느냐 물으면,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셜록홈즈 질문에 대해 한, 두개까지는 대답할 자신이 있는 나로 돌아가고 있다고는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내가 다시 변할 수 있었던 데는 그 이후로 내게 끊임없이 응원과 칭찬, 애정을 전해준 사람들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멋진 어른이자 진정한 부모였던 엄마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당신이 칭찬에 박하셨음을 인정하셨다. 그리고 내가 당신께 얼마나 자랑스럽고 만족스러운 딸이었는가를 말해주셨다. 엄마는 과연 별 거 아닌 그 말이 평생 내 안에 쌓여있던 어떤 울분과 벽을 얼마나 쉽게 허물었는지 알까? 그 다음엔 친구들이 있었다. 나를 '잘난 체 하는 재수없는 애'라고 보지 않고 좋아해주는 친구들과의 인연이 10년 넘게 쌓여가고 있었고 학교에서, 사회에서도 친구들을 계속 만들어갔다. 그리고 그런 친구들 중 앞서 "나 자신을 정확히 표현한다면 어떻게 표현하겠냐?"는 질문을 했던 친구는 내 대답을 듣곤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나는 이미 진짜 너를 알고 있는데도, 너를 좋아하고 계속 친구하잖아."라고. 그 친구는 그 말이 내가 재수없는 애라서 싫어했었다는 중학교 친구들의 말만큼이나 또 다른 충격과 위로를 줬다는 것을 알까? 


마지막으론 회사 동료들이 있었다. 회사 생활을 인터넷으로 먼저 배웠던 나는 세상의 모든 상사와 동료는 앞에선 가식과 뒤에선 뒷담화를, 때로는 가스라이팅까지 일삼는 거짓 세상으로 알았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겪은 회사 생활은 좀 달랐다. 일적인 칭찬을 넘어 사람 대 사람으로, 나보다 회사 생활을 조금 더 해본 사람으로서, 항상 나를 의심하고 누구보다 나에게 가장 각박한 내가 지칠까봐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상사와 동료들이 있었다. "조금 더 뻔뻔해져도 괜찮다."고, "의심하지 말고 네 결정에 자신을 가져도 괜찮다."고, "그러다가 진짜 뻔뻔해지고 나태해지는 것 같으면 경고해줄테니까, 그때까진 걱정말고 생각대로 하라."고. 그 말이 친밀하고 끊기 힘든 관계인 가족과 친구를 넘어, 어떤 사회 조직에서도 나는 충분히 받아들여 질만한 사람이라는 또 다른 위로와 자신감을 심어줬다는 것을 그들은 아마 모를 것이다.


그들이 모르더라도 나는 이렇게 기록해두고 싶다. 나를 남의 답만 쫓아다니게 만든 것도 사람이었지만, 나를 내 답에 집중하게 한 것도 사람이었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나 혼자서만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의 나를 만들어줘서 너무 고맙다고 전하고 싶고, 여러분이 내게 좋은 사람이었던만큼 나 또한 여러분께 좋은 사람이 되겠노라고, 그리고 또 다른 나같은 친구에게, 후배에게, 여러분이 전해준 그 위로와 응원을 이렇게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노라고 기록하고 싶다. 우리 좀 더 뻔뻔해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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